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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김지우 - 시놉시스
제 목 : 기억 (가제)
형 식 : 미니시리즈 20부작
작품의도
이 드라마는 알츠하이머를 선고받은 로펌변호사 박태석이 남은 인생 전부를
걸고 펼치는 흥미진진한 법정 미스터리이며 가슴 뜨거운 가족애를 담은
이야기다.
기억을 잃어가는 병, <알츠하이머>.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일이 별안간 그 남자, 박태석에게 닥쳐왔다.
그것도 사십대 중반 인생 최고의 황금기에...
그는 기억해야 할 것은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자꾸만 기억해 낸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끝내 지키고 싶은 것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여정은 각자의 고민과 고통 속에서 소통하지 못했던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고 성공에 집착해 돌아보지 못했고 또 잊고 있었던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깨닫게 해준다.
흔히 알츠하이머는 고통과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기대했던 삶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을 찾는 희망의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유난히 척박하고 황량한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중년의 가장들과
가족,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힘찬 응원가가 되는
드라마이기를...
기획 포인트
1. 흥미진진한 로펌 사건과 그 남자의 인생을 건 마지막 변론.
‘난 기억을 잃어가고 있어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거죠. 변호사로서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오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당신 옆에 있겠다는 것을.’
권력자를 위한 변호사였던 박태석, 알츠하이머라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남아있을 때 자신이 그 동안 저질렀던 과오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 막강권력을 상대로 펼쳐지는 그의 인생을 건 마지막
변론이야기가 전체를 관통하는 한편, 시추에이션 성격의 새로운 소재의
로펌사건들을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풀어나가 통쾌함과 감동을
끌어내고자 한다.
2. 과거로 회귀하는 그 남자의 기억 그리고 속죄.
‘나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내고
있다. 잊고 싶었던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됐을 아주 소중한 기억들을..’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특성 중 과거기억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경향이 있다.
과거로 회귀하는 남자의 기억여행은 자신의 아픔과 상처,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선물한다.
일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달려오느라 잊어버리는지도 모른 채 잊었던
인간애, 순수한 열정, 진정성을 회복하며 소중한 삶의 가치를 되찾는 과정을
유쾌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3. 사랑 그리고 두 여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 누군가요?’
<한 여자-전처>
사랑은 끝났어도 추억은 남는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전처에 대한 추억이
그의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튀어 나온 것인지 태석의 기억은 종종 전처를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했던 시절에 머문다.
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프고 미안하기 때문일까?
전처는 자신을 찾아와 엉뚱한 행동을 보이는 태석의 모습이 황당하고
당황스럽다.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했고 누구보다 아프게 그리고 원망하며
헤어졌던 사람이다. 전남편, 태석과의 이별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던 그녀였다. 늘 태석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그리고..그리움이
그녀에게 남아있었는데..태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헤어질 때조차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지 않았고 냉정하기만 했던 그가
천진한 모습으로 사랑을 전할 때는 그녀의 마음에 행복과 그리고
슬픔이 교차한다. 태석이 병들고 나서야 알게 된 진심들..
그녀는 이제야 그 남자와 진정으로 행복한 이별을 고한다.
<한 여자-아내>
남편 태석이 전처를 기억하면서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아지면서 아내는 상실감과 배신감을 경험한다.
남편이 아파서 그렇다는 걸 안다.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걸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하지만 여자로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상실감은 감당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전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힌다.
남편에게 온전한 기억이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두렵고,
무서우면서도 태석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그녀.
하지만 이런 아픈 과정을 통해 남편의 아픔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한 집안의 남편과 아버지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비로소
이해하고 깊은 사랑을 되찾는다.
4. 가족, 그 남자의 모든 것.
`내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간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가정 그리고 가족.
삶의 균열이 깨어지고서야 알게 된 가족 개개인의 속내와 상처들이
드러나 부딪치고, 깨지고, 어루만지고,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
너무 가까이에 있어 잊고 있었던 가족의 소중함을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나가고자 한다.
5. 불행 속에 희망을 그린다.
‘누구에게나 비는 내리고 햇볕은 빛난다.’
알츠하이머는 흔히 고통, 상실, 혼란, 갈등을 연상시키지만, 소원했던
가족을 새롭게 이어주고, 성공을 위해 앞만 보며 달려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세상과 삶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여는 계기가 되어준다.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이 힘든
이들의 지친어깨를 토닥이고, 넘어져 일어설 힘을 잃은 이들에게
‘괜찮아, 함께 가자’ 손을 내밀 수 있는 드라마가 되어주기를!
등장인물
1. 박태석(사십대 중반, 로펌변호사)
‘나는 빠른 속도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내 기억은 전부 사라질
것이 확실하다.’
2남 1녀의 장남. ‘대영로펌’의 승률최상위의 파트너변호사.
지방국립대 법대졸업, 사법연수원 중상위성적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대영로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좋은 머리와 권력관계를
꿰뚫어보는 동물적 감각, 빠른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무장한 압도적인
카리스마 때문이다.
그의 성공을 질투하는 동료들은 그를 ‘삼유(류)의 사나이’라며 비아냥거린다.
권력자가 원하는 바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과 때와 장소에
따라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을 이용할 줄 아는 판단력, 조직에 순응하는
유연함, 세 가지(삼유)를 두루 갖췄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그 속뜻의 진의는 지방대 출신의 사법연수원 중간성적인 삼류주제에
성공을 이룬 그를 향한 속 좁은 질투심이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왜, 무엇 때문에 이리도 성공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었는지를...
그는 지방에서 소박한 식당을 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식당운영은 모친의 몫이었고 부친은 무위도식하며 지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부친은 설상가상으로 도박에 빠지고 외도를 일삼았다.
하지만 모친은 그런 남편에게 싫은 소리 없이 묵묵히 돌보며 뒤치다꺼리를
했다. 그는 부친보다 모친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중학교 졸업식 날, 부친이 젊은 유부녀와 눈이 맞아 빚만 남겨두고
야반도주한 뒤 그나마 생계를 이어가던 식당을 정리해 빚잔치를 하고
모친은 노점상인으로 거리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단칸셋방으로 이사를 하던 날 모친은 말했다.
‘아버지 원망마라. 불쌍한 인생이다. 가슴에 화가 쌓여 엄한 심장만
태우다 저리된 것‘이라고.
그때 알게 된 부친의 진실은 오히려 그에게 ‘세상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만
공평하다‘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성실하고 생활력이 강한 모친은 자식들을 공부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고 어떡해든 모친을 돕기 위해 나섰던 그 역시
동정 없는 세상을 온몸으로 체험해야 했다.
대학도 포기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려던 그를 설득한 것은 모친이었다.
‘배워야 한다고, 엄마를 정말 생각한다면 많이 배워서 보란 듯이 잘 살라고’
뒤늦게 맘 잡고 입시를 준비해 지방국립대학에 합격하고 사법고시 준비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는 꾸준히 병행했다.
누구보다 모친의 피눈물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모친을 호강시켜주고 싶었고, 대학을 포기하고 상고에 진학한 누나에 대한
미안함, 무엇보다 가족을 버린 부친에게 보란 듯이 출세하고 싶었다.
그리고 잘나가는 변호사가 됐다.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친에 대한 연민보다
부친에 대한 미움과 동정 없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변호사로서 그는 승률이 높다. 이길 수 없는 게임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포기도 빠르다. 판단착오로 승산이 없는 재판을 맡게 되면 미련 없이
포기한다. 시간을 끌어봐야 의뢰인 주머니사정만 나빠진다.
그에게 정의란 질게임의 의뢰인을 빨리 포기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특히 VVIP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문제와 관련한 소송을
누구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해주어 특급고객의 신뢰를 쌓았다.
그가 처음부터 잘나가는 변호사는 아니었다.
서울대 출신이 주를 이루는 대영로펌에서는 지방법대출신의 그를 받아주지
않았었다. 대학선배가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에 첫 출근을 했고,
국선변호도 맡으며 나름 영화에서 나올 법한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도 한때 있었다.
하지만 힘의 논리에 진실이 묻히고 정의가 사라지는 경험을 치열하게
하면서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무수히 경험했던 불평등과
불합리한 세상을 떠올렸다. 고작 월급쟁이 힘없는 변호사가 그의 실체였다.
아들을 뺑소니로 잃고도 변호사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놀이공원 한번 데려가지 못했던 아들이었다. 겨우 4살인 아들을 억울하게
보내고 깊은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 절망은 이혼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뜻밖에도 대영로펌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는 대영로펌에서 평범한 변호사인 자신에게 왜 손을 내미는지 몰랐다.
휘청거리고 있던 그는 결심했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정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힘을 길러야 한다.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그는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진실과 정의 같은 건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TV법률자문 프로그램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유명인사가 된
그는, 친근감을 주는 화술, 푸근한 외모와 털털한 성격을 부각시켜
주부들이 선호하는 남편감 인기순위에 오르며 정치판에서도 은근히
눈독을 들이는 인물이 되었다.
드디어 그의 인생 최고의 황금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최근에 건망증이 심해진 것이 옥에 티라면 티다.
너무 바쁜 스케줄 탓에 피곤이 쌓인 때문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방송녹화 중, 쉬운 단어조차 잘 떠오르지 않자 병원을 찾았다.
이참에 건강검진이나 받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신경외과의 친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병명을 말했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알츠하이머...이건 또 무슨 썰렁한 농담? 장난은 그만하지.’
의사친구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서야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초기니까...그 동안 마셨던 술이 원인일 수도 있고 과도한
스트레스 탓일 수도 있다..어쩌고 하는 친구의 말이 남의 일처럼 들렸다.
오진일거라는 기대..방법이 있을 거라는 희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자신의 기억과 함께 점차 사라져갔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그는 가족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끊고 그렇게 하기 싫던 운동도 하고,
기억력에 좋다는 건 전부 다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후관계나 전체를 좀 더 헤아릴 필요가 있는 일에서는 비로소
그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중요한 변론을 앞두고 그의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잊어야 하는 것은 기억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꾸만 잊어갔다.
특히 그의 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급기야 자신도 모른 채 전처를 찾아가는 일이 생겼다.
자신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녀는 변해있었다.
사랑하는 아들 동우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왜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우리가 이혼을 했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기절하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동우를 만났다. 기쁘고 반갑고 행복했다.
행복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곧 상황을 깨달았다.
꿈속에서 만났던 동우의 부재가 사무치게 그리워져 바보처럼..펑펑
울어버렸다. 동우의 장례식에조차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왜 하필 전처를 찾아갔을까...그의 인생에서 깨끗하게 정리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왜 자꾸 기억이 이곳으로 되돌아오는지 그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전처와는 미워해서 헤어졌던 건 아니다. 아픔을 극복하지 못해서였다.
대학 때 만난 첫사랑과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했고
익숙한 만큼 편안했고 또 행복했다.
바쁜 시기인 탓에 그는 그녀를 외롭게 했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이었던 그였기에 그녀를 돌아볼 틈도 없이 일에
빠져있었다. 아들이 태어났고 행복하고 안락했었다.
이대로 삶은 평범하지만 순탄하게 지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뺑소니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뒤 그녀와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났다.
그는 그녀에게서 안식처를 찾고 싶었고 그녀는 그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었다. 같은 걸 바랐지만 서로의 상처에 함몰되어 서로를 밀어냈고 상처를
주었다. 마치 똑같은 N극을 마주하고 있는 자석처럼...
그럴수록 그는 일에 몰입했다.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결국, 서로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헤어졌고 그때부터 더욱더 성공을 위해
일에 매달리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헌데 왜 이제 와서..기억을 잃어가는 지금 이 시점에 그의 기억은 왜 자꾸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그의 기억은 조금씩 사라져갔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생겨났다.
자신의 삶이, 생명이 한 방울 한 방울 빠져나가는 것 같은 절망감...
이렇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자신을 하나씩 지워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는 자신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기전에 스스로 인생을 정리해야한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가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기 전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정리하는 것이 가족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우선 주변정리를 하자, 무엇부터..어디서부터..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적인 문제부터 시작했다. 유언장, 각종비밀번호, 문서정리..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깨끗하게 끝내자.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지속하는 바보짓은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직 남은 시간과 기억을 붙들고 싶어졌다.
이렇게는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정리를 제대로 하고
싶어졌다. 헌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그의 기억은 그가 기억 속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상처,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봐야 인생의 그 순간들
이었다. 그가 비겁해서, 두려워서, 용기를 내지 못해서 묻어두었던
숙제 같은 시간들로 그의 기억은 되돌아갔다.
마치 신이 그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잘못 살아온 인생에 대해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기회를 주겠다고..’.
인생의 아이러니...병들어서야 알게 되는 인생최고의 순간들을 그는 몸소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병이 점점 깊어질수록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식이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면 날카로운 칼날로 명치끝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줘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 중학생인 아들이 학교에서 힘든 문제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로서 가장 취약한 인간인 순간에 아들은 가장 힘겨운 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있는 힘껏 힘을 냈다.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근사한 아버지의 틀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들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그리고 그의 진심은 아들에게 가 닿았다.
지금껏 아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아니 자신이 바라는 아들로 만들기 위해
했던 자신의 행동과 말은 번번이 아들의 닫힌 문 앞에서 좌절했었는데
부족한 그의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들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늘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아빠.’
‘아빠는 어쩌면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미안해.’
전처를 자주 찾아가는 일로 아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전처를 찾아가는 일이 거듭 일어나자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 생에 단 한 가지만 기억할 수 있는 행운을 신이 내게 허락한다면
나는...당신을 잊지 않게 해 달라고..당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최고였다고..말하고 싶어‘
아내는 힘겨운 일들을 겪고 있지만 지금도 내 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집을 나서면 아내는 나를
따라 나선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함께 걸어가자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잘못된 변론으로 불행한 시간을 보낸 젊은이를 위한
인생 마지막 변론을 준비하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알츠하이머라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는, 단순
살인사건 속에 숨은 엄청난 비밀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으려는 권력자들은 그가 가진 권력과 지위를
뺏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병을 이용해 그에게 살인누명까지 씌우지만
그는 기억을 하지 못해 스스로를 변론하지 못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는 기억보다 더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이제야 그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인생의 몇 년, 아니 몇 십 년 동안 배운 것보다 짧은 한순간에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그리고 소중한 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그는 기억이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암울하게 보내기에는
그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그에게 남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의 기억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한 것들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그는
소망한다.
그리고 그 소망은 분명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그는 믿는다.
2. 서영주(여. 40대 초반, 태석의 아내, 전업주부)
‘모든 사람이 치매에 걸려도 딱 한사람만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바로 남편이에요.’
2녀의 장녀.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정도 많고 배려심도 많다.
참을성이 많아 웬만한 일은 잘 참아 넘기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무섭게
돌변하기도 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이지만 자기 원칙이 확실하고
소신이 분명해서 때론 융통성이 부족하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고 분리수거, 교통질서 같은 사소한(?) 규칙을
지키는 일이 생활화 되어 있다.
철도공무원이었던 부친은 그녀가 고교2학년 때 산재로 사망하고
초등학교교사였던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명랑하고 따뜻한 성격인 모친의 영향으로 그늘 없이
자랐다. 하지만 부친의 부재는 항상 마음 한 곳에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남편친구인 신경외과 전문의
소개로 태석을 만나 결혼했다.
첫아이를 임신한 뒤 병원을 그만두고 살림과 육아에 전념했다.
수간호사가 되길 소망했던 모친은 실망했고 그녀 역시 일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었지만 ‘어린 시절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 불을 켜는 일이 가장
싫었다‘는 태석의 말이 누구보다 이해가 됐던 그녀였기에 태석의 뜻을
받아 주었다.
이혼경력이 있는 변호사인 남자와의 결혼, 그녀는 태석의 이혼경력이
문제되지 않았고 변호사라는 직업에 현혹되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은 태석의 모습이 신중해 보였고, 무뚝뚝한 성격이 우직하게
느껴졌었다.
지금은 태석의 적은 말수도 무뚝뚝한 성격도 그녀에겐 불만사항이 되어
버렸지만...
남편은 유능한 변호사로 정평이 나 있지만 가족들에게는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다 보니 집에 오면
말수가 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녀는 이해했고, 아이들을 이해시켰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2아들, 정우의 사춘기 반항이 조금 버겁게 느껴져
남편의 도움을 바랬지만 태석은 번번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려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잘나가는 변호사 남편을 둔 그녀를 몹시 부러워
했다. 식사는 밖에서 거의 해결하니 밥할 걱정 안 해도 되고, 돈도 잘
벌어다 주고, 정년걱정도 없고, 그야말로 누리고만 살면 된다고 말하지만
천성이 소박한 그녀는 살림 말고는 별달리 취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안정되고 안락한 생활이 고맙고
평온하다. 다만 마흔을 넘어서고 부터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쓸쓸하고
허무한 기분에 자주 사로잡히곤 한다. 가사와 육아는 물론이고 친정집과
시댁을 챙기는 일도 지금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바쁜 남편을 위해
당연히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외로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복에 겨운 투정이라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최근 들어 더욱더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 태석과 중2병을 앓고 있는 아들 정우의 모습이 마치
각자의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녀를 완강하게 밀어내는 것만 같다.
더군다나 최근 태석이 방송출연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인간미를 잃어가는 것 같아 결혼생활에 조금씩 회의가
찾아왔다. 그러다 친정엄마의 칠순생신 가족모임을 잊어버리고도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태석에게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감정을
터트리며 결혼하고 처음으로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다 남편의 병을 알게 됐다.
내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니...
최근에 태석이 자동차 키를 놓고 가는 일이 빈번하고 사람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피곤한 탓이라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태석의 방에 늘어나는 메모들..친정엄마의 칠순생일을 잊은 것도 병 때문이
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그녀는 도무지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영민하고 명석한 남자,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 남자..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남편이..알츠하이머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고, 좋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였다.
하지만 태석의 증상은 차츰차츰 나빠져 갔다.
지금껏 태석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서 평온하게 살아왔던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가 두렵고 무섭고 겁이 났다.
그래도 힘을 내야했다. 태석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밝은 태도를 유지했다. 남편 태석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남편의 병이 거짓말처럼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늘 가슴 한구석에 송곳처럼 걸려있던 이름을 말했다.
‘나은선’ 남편의 전처였다.
남편은 낯선 집에 잠들어있었다. 남편이 깨어나면 과연 나를 기억할까.
자신을 잊은 건 아닐까...그녀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남편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을 기억하는 태석의 모습에 안도했고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음 구석에서 상실감과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떻게 전처의 집을 알고 있는 걸까?
전처의 집을 찾아온 것이 이번이 처음일까?
남편이 환자라는 걸 그녀는 이성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헤어진 전처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질투심과 배신감, 슬픔,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실망..복잡한 감정이 얽혀 그녀를 괴롭혔다.
‘못나게 굴지 말자. 남편은 환자야..’
자신을 다독이고 다독이지만 남편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랑타령이라니...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다 남편이 자신에게 숨겨왔던 깊은 슬픔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남편에게 미안했고..또 미안했다.
하지만 태석의 병이 점점 진행될수록 그녀도 지쳐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남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의 조언조차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남편은 마음에도 없는 이혼을 요구했고, 착한친정엄마조차 모른 척 받아
드리라고 했다. 아직 젊은데 남은 삶을 치매 걸린 남편 병간호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붙들고 부탁했다.
‘언젠가 정우애비가 기억을 전부 잊어버리고 나도 너도 기억 못하게 되면
그때 떠나라. 태석인 내가 돌보면 된다. 너를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미가 새끼 돌보는 건 힘들 거 하나 없다. 면목 없지만 그때까지만
정우애비 옆에 있어줘. 지금 떠나면 내 새끼가 너무 불쌍해서..부탁한다,
애미야.‘
눈물이 쏟아졌다. 힘들다고..두렵다고..투정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를 잊는 건 용서해도 우리를 떠나는 건 절대 용서 못해.’
태석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남편의 기억 속에 난 언제까지 존재하게 될까....기억이 다 빠져나간
남편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알게 되었다.
남녀의 사랑보다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인생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도 남편은 집에 가야한다며 집을 나선다.
그리고 난 그 옆을 걷는다. 그곳이 어린 시절 남편이 살던 동네이기도 하고
때론 동네를 돌아 다시 우리 집이기도 하고 또..가끔은 전처 은선의 집일
때도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날이면 은선은 기꺼이 문을 활짝 열어준다.
은선과는 이제 서로를 이해하는 미소를 주고받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아들 정우와의 일,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이 끝내 용서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상처...인생을 건 태석의 마지막 변론을 지켜보며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 태석을 새롭게 알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남편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남편이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남편을 한 남자로
아버지로 아들로..한 인간으로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이..
마치 난파선에 타고 있는 위태로운 가족을 바라보는 지인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남편을 알츠하이머환자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힘겨운 어린 시절과 패기에 찬 젊은 시절을 지나 자신의 꿈을 이룬
한 사람, 병들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라 사십년이 넘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 온 한 사람의 모습을 함께 기억해 달라고..
남편은 지금 갈 길을 모르는 길 위에 서 있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을 그녀도 함께 걸어간다.
더 힘든 시간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녀는 오늘만을 생각한다.
오늘 이 순간, 위태로운 길 위에 선 남편의 손을 꼭 잡아 주리라고..
3. 나은선(40대 초반, 태석의 전처, 판사)
‘넌 어떻게 죽기를 원하니?’
‘살아서’
지방국립대 법대교수인 부친과 전업주부인 모친의 외동딸로 유복하게
자랐다. 부친이 몸담고 있는 지방국립대 법대에 진학했다.
태석과는 법대 선후배사이로 만나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한 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연수원성적 최상위로 졸업한 뒤 판사로 재직중이다.
타고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이혼녀로 현재 솔로지만 그녀를 연모하는
남자들은 무수히 많았고 연애도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결혼 얘기가 나오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싫고 좋음이 분명한 명쾌한 성격이다.
에둘러 말할 줄을 모르는 직선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때론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솔직담백하며 아이 같은 천진함이 있다.
태석과 이혼하고 공부에만 매진한 그녀는 부모의 바람대로 법조계에서도
촉망 받는 판사가 되었다.
태석과의 결혼은 그녀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결혼에 대한
극도의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후배검사 유빈이 오랫동안 그녀주위에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녀 역시 유빈이 싫지 않지만 결혼에 회의적인 그녀이기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태석과는 법원에서 오가다 가끔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세련된 척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고 헤어지는 사이를 십년동안 유지하고 있다.
아직도 법조계에서는 태석과 그녀의 사이를 대학선후배 정도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만큼 철저히 의례적으로 행동하지만 실상 그녀는 태석을 마주칠 때마다 심장에 묻은 아들 동우가 깨어나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 탓에 태석이 변호인인 재판은 자의, 타의로 맡질 않았다.
대영로펌에서 승승장구하는 그를 볼 때마다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착한 변호사가 될 것이라 믿었던 그였다.
인권변호사까지는 아니어도 힘들게 살아온 만큼 약자의 편에 서는 변호사가 될 줄 알았었다. 이제는 그녀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녀가 예전에 알았던
박태석은 어디로 갔을까 싶을 때가 있다.
유빈이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용기내서 처음 전하고 연애는 Ok 결혼은
No라는 대답을 하고 돌아온 그날 밤, 느닷없이 태석이 그녀를 찾아왔다.
오래전 신혼 때로 돌아간 모습으로 그녀를 대하는 태석의 모습에
그녀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이런 장난은 도가 지나치다.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사람이 술에 취한 건가...술 냄새는 나질 않았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이상한 약이라도 먹은 건가..
당황스럽고 어이없고..도무지 상황판단이 되질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태석은 갑자기 동우를 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유를 알지 못한 상황에서 태석은 정신을 잃었다.
태석의 아내를 자신의 집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태석의 아내 영주 역시 그녀와는 다른 심정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태석이 아프다고 했다. 그렇게 명석했던 그 남자가
그렇게 냉정하게 자신을 떠났던...끝내 털어버리지 못한 상처로 남아있는
그 남자가..아프다고 했다. 그것도 알츠하이머라니...말문이 막혔다.
태석과는 법대 신입생 환영회 때 처음 만났다.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달랐지만 그녀는 첫눈에 태석이 좋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아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태석은 어딘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먼저 고백을 한 건 그녀였다. 태석도 그만의 방법으로 그녀의
고백을 승낙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자신이 태석의 첫사랑이었다.
여자와 손을 잡은 것도, 키스를 한 것도 그녀가 처음이라고 했다.
고액과외는 생활이고 부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한
그녀와는 달리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이 자신보다 좋은 성적으로 입학
했고, 사법고시를 준비해야하는 마당에 아르바이트를 뛰어다니는 태석이
그녀에겐 신선한 존재였다. 만약 태석이 자신처럼 공부했다면 서울대
수석도 했겠다 싶었다.
부모님은 태석의 가난한 집안환경과 딸이 사법고시에 패스하기도 전에
결혼을 하겠다는 말에 망설였지만 태석이 이미 사법고시에 패스 했다는
사실이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결혼을 하더라도 그녀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든든히
지원하겠다는 태석의 듬직함에 결혼을 승낙해주었다.
물론 부모님이 반대를 한다 해도 결혼을 감행할 딸이라는 것을 부모님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엔 이미 태석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축복 속에 결혼했고 그녀는 행복했다.
사법고시 준비는 행복한 신혼생활에 젖어 자꾸만 뒤로 미뤄졌다.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동우라고 지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탄생한 이름이지만 유치원에 같은 이름이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서로 창의력이 없다면 놀려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존재, 목숨을
내 놓아도 아깝지 않은 존재가 있음을 동우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동우가 4살 되던 해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녀의 공부를 든든히 지원하겠다던 태석의 약속은 차츰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았기에 동우의 육아는 대부분 그녀의 차지였다.
공부를 하면서 육아를 하는 일에 차츰 지쳐갔고 일을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태석에게도 화가 났다.
그리고...
목숨과도 같던 아들 동우가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뺑소니 사고였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날따라 동우는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억지로 떼어놓고 그녀가 도서관으로 가지 않았다면..그리고 그녀가
시간에 맞춰 유치원에 동우를 데리러 가줬더라면 동우는 아직도 그녀
곁에서 숨을 쉬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후회하고 자책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에 태석은 그녀 옆에 없었다.
태석에게 이해 받고 싶었고, 그녀 탓이 아니라고..위로 받고 싶었지만
태석은 그래주지 않았다.
왜 자신 혼자만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지 태석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리고 오히려 태석과 함께 하는 공간에 동우가 없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무엇보다 태석은 동우가 없는 시간을 잘 견디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동우를 잊은 것 같아 보였다.
이혼 얘기는 그녀가 먼저 꺼냈지만 행동에 옮긴 건 태석이 먼저였다.
그녀의 손을 잡아달라는 호소를 태석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외면했다.
그녀는 그에게 버려진 기분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우까지 그가 버린 것 같았다.
동우의 사고 탓에 지금도 뺑소니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판사로 정평이 나있다. 물론 동료들은 그녀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그가 재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쩐지 두 번 버려졌다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던 그녀다.
헌데..왜 이제 와서..기억을 잃어가는 이 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왜 동우를 찾는 것인지..그녀는 당혹스럽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알 수 없는 건..그가 아직도 나를,..동우를..그리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태석의 기억이 과거에 머물러 그녀를 찾아올 때를 기다리기까지도 했다.
태석의 아내를 만날 때면 유치하게도 내심 승자가 된 기분이 들다니..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이해되질 않았다.
마치 오래전 그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다정한 태석의 모습에 때론
그 시절 감정이 되살아나는 자신의 모습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태석의 존재에 질투를 느끼는 유빈의 모습이 어이없지만
더 기막힌 건 유빈에게 질투를 느끼는 태석의 태도였다.
그러다가도 현실로 돌아온 태석이 당황스러워하며 사과를 할 때면 오히려
그녀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알츠하이머환자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그녀는 태석의 상처를, 진심을 알게 되면서부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젠 진정으로 그녀 마음속에서 태석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동우도
보내주어야 할 때가 왔음을 그녀는 느낀다.
이젠 알 것 같다. 그도 나만큼 아팠다는 걸..
태석이 변호인의 자격으로 들어서는 법정을 그녀는 이제 피하지 않는다.
자신이 갖고 있는 온 힘을 다해 변호인으로 의뢰인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그를 그녀는 기억하고 싶고,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다.
자신의 상처만 바라보았기에 지금껏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던 그녀는 유빈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를 낸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언제나 문을 열어두려고 한다.
내 오랜 친구 태석과 그의 아픈 손을 잡고 함께 그녀의 집으로 찾아올
새로운 친구 영주를 위해 따뜻한 차도 함께 준비한다.
‘친구야, 니가 언젠가 나에게 얘기했지. 네 책상위에 적힌 문구를.
어떻게 죽기를 바라냐는 물음에 ‘살아서’라고 대답한 드골의 대답을‘
내 친구 박태석은 지금 죽어가고 있지만...힘껏 살아있다.
4. 이찬무 (50대 중반, 남. 대영로펌 대표변호사)
‘기록을 햇빛에 말리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말리면 신화가 된다.’
서울대 법대 졸업, 연수원 수석졸업.
검사로 재직하다 부친이 설립한 대영로펌에 합류했다.
부친 밑에서 어소시엣변호사로 시작해 파트너변호사 그리고 현재는
명실상부 대영로펌을 운영하는 대표변호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차가움과 부드러움, 이성과 감성, 유연함과 결단력,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냉혹한 승부사 기질등 양면성을 갖고 있는 포커페이스의 절대강자.
일제치하 때 판사였던 조부와 검사출신의 부친, 대대로 상류층의 삶을
살아왔다. 누리고 살아온 자만이 갖고 있는 자신감이 충만하지만 약자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
음악, 미술, 문학, 예술방면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클래식을
유독 사랑한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그는, 미모의 아내와 두 아들을
두었으며 맏아들은 로스쿨에 재학 중이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더없이 냉정한 그는 지금의 대영로펌의 신화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기기 어려운 소송, 그러나 꼭 이겨야 하는 소송이라면 우리에게 오라’
그가 대영로펌에 합류하면서 내건 홍보문구가 보여주듯이 그는 이기기
어려운 소송을 승소로 이끄는 힘을 발휘하는데 탁월하다.
기업 M&A가 전문이며 외국기업과 한국기업의 합병을 주도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대영로펌을 키운 핵심은 인적관리다.
법조계는 물론 정재계 유력인사를 고문 형식으로 영입하고 연수원
우수성적의 인재에게 파격적인 대우와 연수 등을 제시하며 서울대 출신
위주로 채용한다. 또한 한 기수에서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 기수에 걸쳐 골고루 한 명씩 뽑는다.
연수원 출신뿐만 아니라 판사, 검사 출신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각 기수마다 한 명씩은 반드시 뽑는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어서 법조계의
모든 인사들이 대영로펌과 기수로 엮여있는 형태를 만들어 그야말로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명실상부 대영로펌을 운영하는 일인자로 파트너 변호사들 역시 그의 지휘
하에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를 지배하는 유일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부친이다.
부친은 일선에서 물러나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의 뒤에서 대영로펌을 움직이는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감이 충만한 그이지만 지금껏 부친의 뜻을 거역한 적은 없었다.
아니, 부친 앞에만 가면 알 수 없는 압박감과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단 한번, 부친에게 의견을 묻지 않은 채 영입한 인물이 바로 박태석이다.
부친에게는 그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쉬울 뿐 아니라 서울대 위주의
인적구성인 로펌에 구색을 갖추는데도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이댔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태석의 유능한 면과 지금껏 자신이 만나보지
못한 서민적인 인간형이라 가끔은 신선했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자신이 맡기에는 불편한 VVIP의 개인적인 소송을 맡기기에는
태석만한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태석을 자신의 로펌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십대였던 맏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태석의 아들이 사망한 것이다.
사건은 그의 발 빠른 대처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무슨 마음에선지
태석에게 보상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는 그것을 선행이라고 생각했다.
‘딱 한번 인생에서 그가 베푼 선행’이 그의 발목을 잡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것도 뜻밖에 복병처럼 태석이 공소시효를 석 달 남겨둔
15년 전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태석에게 선행을 베풀 때는 오로지 아들의 뺑소니 사고에 대한
보상만 생각했고 스스로의 선택에 나름의 부채감을 덜었었던 그였다.
태석이 15년 전 살인사건의 국선변호를 맡았었다는 것도 그를 영입하고
나서야 생각이 났을 정도로 대수롭게 생각했던 사건도 아니었다.
헌데 아들의 사고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튀어나온 것이다.
태석과 운명적으로 얽혀있다는 것을 실감하자 자신의 선택에 뒤늦은
후회를 했다. 역시..선행은 베푸는 게 아니었다고...
15년 전 살인사건은 범인이 검거됐고 증거는 조금 불충분했지만 본인의
자백이 있었으며 정황도 드러났다.
그는 검사로서 자신이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석은 복역 중인 사람은 진범이 아니며 자백 역시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주장했다. 태석은 과거 자신의 무성의한 변론을
스스로 시인하면서까지 다시 복역 중인 범인의 변론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자신이 잡아넣은 범인이 진범이 아니라니..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신은 무고한 사람을 15년 동안 감옥에 넣은 검사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도 몰랐던 일이 있었다. 사건이 있고 3년 후, 뜻밖의
사건으로 붙잡힌 범인이 15년 전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다는 진술을
했었다는 정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자신은 검사를 그만두고
대영로펌에서 정신없이 다른 사건을 맡고 있던 상황이었다.
진범을 알고 있다는 증언자의 진술은 일목요연했고 당시 사건과도 맞아
떨어졌다. 게다가 증언자가 지목한 진범은 대영로펌의 특급관리 고객의
아들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부친이 검찰에 힘을 쓴 것이다.
경찰 역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검찰, 경찰은 자신들의 조직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그리고 부친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특급고객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진범을 눈감아주고
증언자를 풀어준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과 대영로펌은 물론 부친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막강한 조직에 맞설 힘도 없는 태석을
상대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태석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태석에게
값싼 연민까지 느껴졌다.
간단한 게임이었고 너무도 쉬운 싸움이었다.
그러나...힘의 논리에 부딪치고 깨지면서도 태석은 물러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태석의 우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젠 그가 태석에게 베풀 수 있는 선행은 끝났다.
지금껏 그가 이뤄낸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태석을 절벽으로 밀어내는
수밖에 없다.
5. 이종식 (70대 후반, 남. 찬무의 부친)
‘법은 믿지만 정의는 믿지 않아.’
대영로펌의 창업주. 서울법대 졸업후 군사정권시절 검사로 재직했으며
청와대법무비서관으로 근무한 이력도 있다.
초기 대영법무법인을 설립한 그는 예상보다 빠른 시점에 아들 찬무에게
대영로펌을 맡기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뒤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실상은 대영로펌을 움직이고 있는 실세다.
부드러운 솜뭉치 속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는 인물로 권모술수에
능하다. 넉넉하고 너그러운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일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정할 정도로 망설임이 없다.
권력자를 위한 변론을 하면서 한편으론 고아들의 장학금 재단을 설립하는
등 사회공헌사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돈과 권력 인망까지 얻는데
성공했다.
법조계와 정재계를 막론한 그의 인맥은 상상이상이다.
정부인사 개편이 있을 때나 법무부 인사개편이 있을 때도 그의 의중을
물을 정도로 그의 보이지 않는 권력은 은퇴 후에도 여전히 막강하다.
물론 그 권력의 힘은 인맥과 돈으로 쌓여진 것이다.
그의 부친(찬무의 조부)은 친일행적으로 부를 쌓았고 그에게 막강한 유산을
상속했다. 그 유산을 바탕으로 지금의 권력까지 얻은 셈이다.
그의 아킬레스건은 부친의 친일행적이었고 군사정권시절 검사라는 비도덕성
이었다. 물론 그는 부친의 친일행적을 은폐했고 자신 역시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에 대한 회한이 밀려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고 시대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바람은 자신의 자손들에게는 조금의 불명예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뿐이다.
아들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대영로펌을 크게 성장시켰다.
물론 아들 찬무의 성정이 간혹 감성적으로 흐를 때가 있어 걱정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냉철하게 일을 처리하는 아들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존경받는 어른으로 유유자적하게 지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헌데, 박태석이 아들의 인생에, 자신의 인생에 태클을 걸어왔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15년 전 사건...
아들 찬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15년 전, 그는 특급고객을 위해 살인사건의 증거를 인멸하고 무고한
사람이 죄인이 되는 일에 가담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진범을 알고 있다는 증언자의 기소를 막았다.
아들은 박태석을 쉬운 상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일 뿐 아니라 지금껏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 위험한
상대라는 직감이 들었다.
박태석처럼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는 자신이 가진 힘보다 더 많은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노회한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더라도 거대 조직에 맞서기에는
박태석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알츠하이머는 박태석의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걸고 싸울 힘을 주기도 하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을 수도
있는...양날의 검. 그는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것에 능한 변호사였다. 아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비정한 방법을
동원한다.
6. 한정원 (40대 초반, 여. 대영로펌 파트너변호사)
고대법대, 하버드로스쿨 장학생, 사법고시 차석합격자로 검사로 재직하다
대영로펌에 영입됐다. 회사원이었던 부친과 동시통역사인 모친의 맏딸.
미혼으로 일중독자다. 굵직굵직한 저작권과 특허권 소송을 주로 맡아
처리했으며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의뢰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동료와 직원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감정을 소비하지 않으려 일부러 노력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감성적인
사람이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는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태석과는 보이지 않는 경쟁구도를 형성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그녀에게
농담을 건네는 사람도 태석뿐이다.
검사로 재직 중이던 시절, 감히 검찰조직의 뜻을 거역할 용기를 내지
못해 중요한 살인사건 증인을 불기소 처리했던 일은 그녀만의 상처로
남아있지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발설한 적도 없다.
이미 선배검사가 끝낸 사건을 자신이 뒤집는 일은 검찰조직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게다가 진범을 알고 있다는 증인도 믿을 수 없는 범죄자였지
않은가? 하지만..증인의 증언은 일목요연했고 신빙성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인 보강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됐고 직감적으로 진실을
은폐한 냄새가 짙게 풍겼다.
하지만 검찰조직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더군다나 당시 범인을 감옥에 보낸 검사가 다름 아닌 그녀가 검사보
시절 모셨던 멘토 이찬무가 아닌가.
그녀는 찬무를 검사선배로 존경했고 그가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검사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 당시 사건기록을 찾아보았지만 일부러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넣은
정황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자백뿐인 불충분한 증거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조직 안팎의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들의 압박은
그녀로 하여금 조직을 위한 선택, 결국 사건을 불기소처리 함으로써
더 이상의 재조사를 할 수 없도록 덮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검사라도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죄책감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이찬무의 권유로 검사 복을 벗고 대영로펌에 들어온 뒤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유난히 애썼던 것 역시 죄책감에 대한
반대급부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의 비밀이 또 한 가지 있다.
그녀는 찬무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다.
찬무역시 그녀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때론 연인처럼, 때론
후배이자 직장상사로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히 불만이 없다. 지금 이대로도 홀가분하고 편했다.
찬무가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도 그녀에겐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찬무의 진정한 소울메이트라는 자부심이
그녀의 자존심을 충족시켰다.
헌데 태석이 15년 전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떡해든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찬무를 도와야 했다.
하지만 또다시 진실을 은폐하는 일에 가담한다는 사실에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죄책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찬무와 태석, 선과 악의 중간에서 지독한 갈등을 겪으며 훗날 사건의
핵심 인물로 서게 된다.
7. 정진 (20대 후반, 남. 대영로펌 어소시엣변호사)
‘모든 국민에게 법은 공정하다. 공정? 하하!’
서울대 법대 졸업, 사법연수원 최상위성적.
판사를 염원했으나 가난한 집안형편을 생각해 대영로펌에 입사했다.
태석의 지휘하에 태석이 맡은 사건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까칠한 성격에 완벽주의자로 뛰어난 머리와 능력은 있지만 사회생활은
원만하지 못하다. 로펌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옳은가
회의가 많고 그러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생각에
빠져있다. 다른 파트너변호사들은 그의 삐딱한 듯 보이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유일하게 태석만이 그를 자신의 밑에 받아주었다.
처음엔 태석을 권력지향주의자라 생각해 속으로는 은근히 경멸했지만
태석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태석의 우군이 되어준다.
태석이 알츠하이머라 환자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되지만 비밀을
지켜준다.
또한 태석의 병이 대영로펌에 알려질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그의 비밀을 지켜주며 태석과 깊은 우정을 쌓아나간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태석이 15년 전 사건을 다시 파헤치자 갈등 끝에
태석을 도와 함께 사건을 재조사하고 변론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었던 판사시험에 도전 판사로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인물이다. 대영로펌사무원인 선화와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연모하는 마음을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귀여운 면모도 갖고 있다.
8. 봉선화 (20대 중후반, 여. 대영로펌 사무원)
‘변호사가 주인공인 영화도 안 봐요. 지긋지긋하거든요.’
여대법대를 졸업했지만 단 한 번의 사법고시에 실패하자 곧바로
포기하고 대영로펌에 사무원으로 입사했다.
로펌에서 일하면서 변호사라면 지긋지긋해진 탓에 변호사와는 절대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미모가 뛰어나고 섹시미가 있으며 나름 주당에다 가무에 능해 남자들은
그녀를 쉽게 보고 접근하지만 그건 착각,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또한 그녀는 보기와는 다르게 자기관리가 철저한 성격이다.
지각, 결근 절대 없고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해내는 그녀는 거절도
눈웃음을 잃지 않고 해 내는 재주가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해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첫인상만으로도
구별하는 능력이 출중하다.
태석을 삼유의 사나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려도 그녀만큼은 태석을
좋아한다. 이유는? 사람을 처음에 딱 보면 아니까.
사실은 그녀를 면접에서 합격시킨 것이 태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를 합격시킨 고마움도 있었지만 합격시킨 이유를 듣고 태석에게 신뢰가
생겼다. 면접에서 그녀의 솔직한 대답이 불합격을 초례했지만 태석은
그녀를 합격시켜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했다는 얘기를 우연히 알게 됐다.
나중에 태석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태석은 그 대답이 맘에 들었다고 했다.
‘법은 믿지 않지만 정의는 있다고 믿어요.’라는 그녀의 대답이.
태석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비밀을 정진과 공유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한 그녀는 태석의 인생을 건 재판을 위해 대영로펌 자료를
빼내는 불법(?)을 저지르며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변호사와는 연애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정진 앞에서는 흔들리는데
도무지 정진이 고백을 하지 않자 은근 속이 상하는 그녀는 정진과
태석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용기를 낸다.
9. 김제훈 (30세. 남. 대영로펌 어소시엣변호사)
연수원을 졸업한 뒤 곧바로 대영로펌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판사 검사보다는 대영로펌을 목표로 사법고시를 준비했을 만큼
꿈의 직장이었다. 출세에 대한 열망이 크다.
부동산으로 성공한 부모 밑에서 금전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란 8학군 출신.
교만함과 자존심을 혼동하고 주관 없음과 원만한 사회생활을 혼동한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비겁한 면모가 있으며 힘든 일을
부딪치기 보다는 피하고 보려는 유약함이 있다.
한정원 밑에서 정원이 맡은 변론을 도우며 파트너 변호사를 꿈꾼다.
입사동기인 정진과는 도무지 맞는 구석이 없으면서도 호시탐탐 정진이
맡은 사건이나 동태를 엿보는 일이 생활화 되어 있다.
클럽에 다니는 일이 일상이며 여자를 만나면 자신이 변호사라는 것을
과시한다. 선만 100번을 봤을 정도로 사랑도 계산적으로 하는 그이지만
이상하게 선화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진과 선화를 놓고 코믹한 삼각관계를 펼치면서도 태석에게 위태롭게
위협을 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배신을 하는 사람은
한정원이다.
10. 강유빈 (30대 중후반, 남. 검사)
사법고시 수석합격, 연수원수석졸업의 인재. 현직검사로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들을 맡으며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뚝심대로 밀어붙여
검사로서는 드물게 좌파검사라는 호칭을 듣고 있다.
수석이라는 수식이 달려있었던 초임검사 시절엔 검찰조직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지만 몇몇 시국사건을 해결하고 나서는 검찰조직의
미운오리새끼가 되었고 일에 치여 사는 형사사건 전담 검사로 8년째
지내고 있다. 그래도 불평불만은 없다. 오히려 검사의 꽃은 역시 형사
사건이라는 생각을 하는 그다.
차분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자신의 소신을 한발 한발 밀어붙이는 뚝심이
있는 반면 내성적이고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인해 출세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 대영로펌의 변호사들을 특히나 싫어하고 그 중에서도
TV에 태석이 나오면 TV화면을 돌릴 만큼 그를 싫어한다.
얼마 전 그가 맡았던 사건의 범인을 태석이 변론했고 그 재판에서 태석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었던 일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던 그였다.
헌데 태석이 자신이 오랫동안 좋아하고 연모하는 은선의 전남편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태석이 은선의 집을 찾아오는 일이 벌어지자 참지 못하고 화를
터트린다. 그러다 결국 태석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비밀을 공유하면서 서서히 태석의 우군으로 도움을 주는 인물로
자리 잡으며 태석과 남자대 남자로서의 우정을 쌓아간다.
11. 신영진 (30대 중후반, 남. 재벌3세)
대영로펌의 VVIP인 성진그룹 신화식회장의 둘째 아들로 미국유명대학
MBA를 졸업하고 현재 성진전자 부사장.
여성편력이 심한 부친, 신화식회장의 본처 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게
나돌고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선보이며 만년 이등이었던
신화전자를 일등의 자리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신화그룹 내에서는 공공연히 신화그룹의 맏아들을 제치고 그가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을 만큼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의 세련된 모습과 경영능력 이면에 충동적이고
잔인한 면모를 감추고 있다. 그의 폭력성향을 알고 있는 신회장이 그의
주변을 각별히 관리하고 있어 그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최근엔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아내와의 이혼소송을 진행했고 변론을 맡은
박태석의 도움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철저한 이기주의자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는 야누스적인
인물인 그는 15년 전 살인사건의 진범이다.
새삼 15년 전 사건을 다시 재조사한다고 해서 두려울 것도 겁날 것도 없다. 이미 증거는 소멸됐을 뿐 아니라 남아 있다 해도 지금껏 돈과 권력으로
해결 못한 일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에 대한 신회장의 잘못된 사랑방식은 결국 그를 괴물로
만들어 놓았다.
12. 신화식 (70대 초반, 남. 신영진의 부친, 성진그룹 총수)
여전히 청년 같은 열정으로 성진그룹을 주도하고 있다.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거칠 것 없는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유난히 자신을 닮은 영진을 아끼고 사랑한다.
15년 전 아들이 저지른 살인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과 돈을
동원했다. 그때는 아들, 영진이 한 번의 뼈아픈 실수를 저지른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떡해든 아들을 사지에서 구해내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들 대신 무고한 사람이 수감되는 것에 대한 죄의식조차
들지 않았다. 아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크고 작은 사건으로 아들에게 폭력성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 영진은 자신의 바람대로 경영자로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줬기에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헌데 느닷없이 15년 전 사건을 박태석이 재조사하겠다고 나서자 불안과
위기감을 느낀다. 결국 15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사건을 덮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적은 그가 보호하려 그토록 애썼던 아들 영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된다.
13. 권명수 (남. 19세, 34세)
15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고아로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 19살에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이면 폭주족으로 거리를 누볐다. 이미 그 당시 폭력전과가 있었던
만큼 십대시절을 그야말로 방황하며 보냈었다.
하지만 불우한 성장과정을 이겨내지 못해 벌어진 일일뿐 타고난 성정은
여리고 착하다. 폭력전과 역시 친구싸움을 말리다 덤터기 쓴 것이었다.
그 시절 우연히 목격한 살인사건 현장을 증언하게 되면서 도리어 용의자로
지목되어 지금껏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
아무도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없는 고아출신에 폭주족 그리고 폭력전과까지
있는 그의 말을 어느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국선변호사인 박태석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를 밞았을 뿐이다.
그야말로 운이 없어도 지독히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옥에서 절규뿐이었다. 모범수로 생활하면 가석방
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수감생활은 사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15년이라는 형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회에 나가 생활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주는 외할머니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인자로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자신의 삶은 감옥생활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헌데 느닷없이 박태석 변호사가 찾아와 자신의 무죄를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겠다고...용서를 빌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이제 와서..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박태석을 믿을 수도 없었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진심을 알게 됐다. 용서를 비는 그의 모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싸우겠노라는 태석을 다시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박태석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자신을 두 번 우롱하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미친 놈, 치매환자가 자신을 변론하겠다니..노망이 났구나’ 싶었다.
남은 시간 이대로 조용히 있다가 나가면 된다.
미친 인간한테 잠시 휘둘렸을 뿐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출감하면 도와주겠다는 선의의 독지가도 생겼다.
그나마 신이 자신에게 조금의 자비를 베푸는 것인가 싶었는데 치매환자
박태석이 끈질기게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알츠하이머를 선고 받은 사실과 현재
어느 정도 그의 병이 진행되고 있는지..그가 살아온 삶과 현재의 절망,
그리고 끝내 놓고 싶지 않은 희망까지...
그의 입에서 진실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진실...그토록 염원했던 진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인생이었지만 이번에 제대로 운을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외할머니에게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더 이상의 소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태석이 내민 손을 잡으며 마지막 운을 걸어볼 용기를 낸다.
14. 이승호 (20대 중반, 남. 이찬무의 아들)
로스쿨 재학 중. 대영로펌의 후계자.
조부와 부친의 뜻에 따라 당연하다는 듯 법대에 진학했고 로스쿨에
재학중지만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길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유력법조가문의 아들임을 내세우기 보다는 주변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숨기려고 노력하며 항상 검소한 생활태도와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의 환경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칭찬하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지울 수가 없다.
잠깐의 방황으로 힘들어했던 청소년 시절, 방탕한 친구와 술에 취해
자신이 저지른 뼈아픈 과오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술에 취한 채 부친의 승용차를 몰래 운전하다 갑자기 뛰어나온 아이를
치고 너무 두려운 마음에 도망을 쳤다.
죄책감에 괴로웠지만 자수를 할 용기는 끝내 내지 못했다.
그리고 부친이 뺑소니사건을 무마시켰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나
일 년을 보낸 뒤 한국에 돌아왔다.
그 사건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화점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 아이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많은 혜택들을 물리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신으로 인해 사망한 아이의 아버지가 대영로펌 변호사 박태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꾹꾹 눌러놓았던 죄책감이 다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그래도..진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태석의 주위를 맴돌며 그가
도전하는 사건들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태석의
진심어린 용서를 통해 구원 받는다.
15. 김순희 (여. 70대 초중반. 태석의 모친)
‘자식이 아기가 되면 내가 아기엄마가 되면 그뿐이야’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하다.
무능력한 남편을 만나 생활을 혼자 떠맡으며 남편 뒤치다꺼리를 하다
남편이 유부녀와 야반도주한 뒤 삼남매를 혼자 키워냈다.
자식들을 키워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으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새끼들이 무탈하게 자라주는 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고단한 삶속에서 누구보다 더 많고 깊은
인생의 지혜를 아는 사람이다.
태석이 출세했어도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은 끝내 마다하는 독립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어떤 불행도 담담하게 상대하는 내공이 있다.
자식들이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할 때조차 남편을 감싸 안았던
그녀지만 사실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편에 대한 여자로서의 원망과
미련이 남아있다.
TV에까지 출연하는 태석이 자랑스러워 은근슬쩍 주위사람들에게 아들
자랑을 늘어놓을 때도 많다.
하지만 태석이 성공을 하면 할수록 아들 얼굴을 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늘 자식이 보고 싶고 그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가끔 얼굴을 볼 때면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고 누나와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의 태석 같지가 않아 내내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였지만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탓이라고 이해했다.
태석은 그녀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기도 했지만 심장에 박힌 가시처럼
아픈 아들이었다.
초혼에 실패하고 어린자식까지 가슴에 묻은 큰아들...
그 마음이 오죽하랴 싶어 태석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하기만 하다.
그래도 좋은 여자 만나 성공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그걸로 됐다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언제나 무탈하기만을 기도했었다.
그런데...아들이 병에 걸렸단다.
그것도 죽을 날을 받아둔 노인네들이나 걸리는 줄 알았던 치매라니.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암이라면 다행이었을 것을..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암도 다
고친다는데...왜 하필 병에 걸려도 고칠 방법도 없는 그런 병이...
하늘을 원망했고, 심장이 녹아내려 몇 날, 몇일을 통곡했다.
그리고...눈물을 닦아내고 담담하게 아들을 마주한다.
아직 젊은 며느리의 인생을 병든 남편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다시 아이가 되면 자신은 다시 엄마로 돌아가면 된다고..
엄마가 새끼를 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녀는 오늘도 다시 아기엄마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16. 박철민 (70대 중반, 남. 태석의 부친)
평생을 무위도식하며 지냈다. 간간이 아파트 경비를 했지만 불같은
성격 탓에 그만두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고향에서 땅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부친이
죽고 땅을 물려받은 그는 사기꾼에게 걸려 그 많던 땅을 한순간에
빼앗겼다. 변호사비용으로 들어간 돈만해도 집 몇 채 값이다.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가 식당을 차렸지만 도와주기는커녕 지금껏
누리고 살아온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한량으로 세월을 보내다 유부녀와
바람이 나서 빚만 남겨둔 채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경비를 하면서도 성공한 변호사 박태석이 자신의 아들이라며 자랑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행복이다. 아직도 철이 덜 들어 여전히 사고뭉치인 그는
최근에 돈 문제가 생겨 아들을 찾아가 손을 벌리지만 아들은 냉정하기만
했다. 아무리 잘못한 아버지라도 아버지는 아버진데 나쁜 놈..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들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지금껏 자신이 잘못 살아온 벌을 아들이 받는
것만 같아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아버지와는 좋은 기억이 없다. 오히려 나쁜 기억뿐이니 잊는 편이 좋다’는
아들의 말에 섭섭함보다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지금부터라도 아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너무 늦은 것일까...
그는 아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아들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아들이 아파도 여전히 철없이 구는 듯 보이는 그이지만 실은 이제라도
아들에게 좋은 기억 하나쯤은 남겨주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17. 박정우 (남. 13세. 태석의 아들)
7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해 현재 중학교 1학년.
태석을 닮아 말수가 적지만 영주의 심성을 닮아 따뜻하고 온화한 성격.
사춘기를 겪으며 최근에 뚝뚝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중학교 입학할 때만해도 상위권을 달리던 성적이 최근에 중간이하로
떨어지자 성적표를 조작하는 일까지 저질렀다.
태석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알기에 아버지가 실망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워서 벌인 일이었다.
성적표를 조작한 일이 발각되자 태석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진심으로 뉘우쳤고 후회했지만 그날 이후 태석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신뢰하지 않고 불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을 불신하는 태석의 태도에 그가 받은 상처는
깊었다. 무엇보다 태석은 자신에게 성적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왜 물어보지 않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지? 뭐가 힘든지?’
태석은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따뜻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아들에 대한 실망감만 드러냈을 뿐이다.
친구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자신이 학교폭력의 대상이 된 그는
태석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고 나름의 방식으로 태석에게 신호도
보냈었다. 하지만 불신만을 드러낼 뿐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태석에게 이젠 그 스스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영주에게 의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유일한
존재인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엄마에게만큼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이상한 오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영주에게 말하면 태석에게 말할 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태석이 알면 태석은 분명 자신을 탓하고 더욱
한심하게만 볼 뿐 해결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태석이 그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이젠 태석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TV에 나와 청소년 범죄문제와 관련된 의견을 피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위선자처럼 보였다.
게다가 아들의 이름도 잊었는지 최근엔 자신을 ‘동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한테 난 그 정도의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매일매일 홀로 괴롭게
소리치던 그는 급기야 위험한 선택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지옥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태석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는다.
자신을 지옥에서 구출해내려는 태석의 투쟁은 그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진실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영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기억할 것이다.
자신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세상에서 가장 용감했던 아버지를,
자신을 감싸주었던 따뜻한 아버지를..진심으로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존경스러운 어른이었던 아버지를.
아버지가 기억을 잃어가는 그 순간까지 몇 번이고 말해주고 싶다.
평생 잊기 힘든 가슴 벅찬 최고의 기억을 아버지는 나에게 선물했다고.
18. 박서우 (8세, 여. 태석의 딸)
초등학교 1학년.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아이다운 천진함을 갖고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소원인 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엄마.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은 아빠다. 태석에게 유일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태석에겐 최고 갑인 상대.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아빠 태석이
TV에 나오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재밌다.
19. 주재민 (40대 중반, 남. 신경외과 의사 태석의 친구)
태석의 고등학교 동창이며 유일한 절친으로 신경외과 의사.
태석에게 영주를 소개시켜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작은 일에도 상처를 쉽게 받는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사랑도 많고 잔소리도 많다.
태석의 어려웠던 시절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태석의 속 깊은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로맨티스트다.
술은 잘 마시지 못하면서도 모든 술자리는 끝까지 남아있다.
20. 장미림 (60대 후반, 여. 영주의 친정엄마)
남편을 일찍 보내고 딸 둘을 혼자 키웠다.
밝고 긍정적이며 명랑해서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한 그녀는 주변에 친구도 많아 항상 바쁘다.
맏사위가 유명한 변호사라지만 맏딸이 이혼경력이 있는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맘이 편하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사위가 바빠서 딸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것 같아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그래도 유복하게 살고
있어서 안심이 됐다. 헌데 사위가 알츠하이머..그러니까 치매라니.
앞이 캄캄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딸의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막혔다.
사위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눈물이 났지만 딸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사위보다는 딸이 먼저인 건 인지상정이다.
사위가 이혼을 요구할 때 모른 척 딸이 이혼해주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지만
용감하게 절망적인 현실과 맞서는 딸의 모습에 그녀 역시 힘을 보탠다.
그 외.
태석의 친구, 신영진의 아내, 대영로펌의 직원들,
15년 전 사건의 얽힌 사람들, 그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