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8;31-41
오늘은 요세푸스라는 역사가가 전하는 유태인의 역사 한 토막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후 66년부터 시작한 유태전쟁은 로마군에 의해 70 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일단의 무리가
사해에서 서쪽으로 4㎞떨어진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해발 434m의 바위산인 마사다에서 항전합니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문득 치솟기를 멈추고, 단칼에 베인 듯이 평평해진 꼭대기 공간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 같은 모양으로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인 천혜의 요새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벤 야이르는 수백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로마최강 10 군단의 9000 명의 병력을 무려 7년동안 막아냅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와 패전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천하무적 로마군은 마사다 보다 더 높은 토성을 쌓고 공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공격을 받게 될 전 날 밤 벤 야이르는 남자들을 한군데에 불러놓고 비장한 연설을 합니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 없는 유태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8,000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이집트에서는 6만명이 살해되었습니다 .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자! 로마의 노예가 되어 개처럼 살지 말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수의를 입고 당당하게 죽읍시다. “ 벤 야이르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어른거렸고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깊이 절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껴안고, 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 다음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의 목을 일격에 베어냈다. 그들은 다시 한곳에 모여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처자들의 주검 옆에 눕자, 열 사람은 집집마다 다니며 그들의 심장에 칼을 꼬잤다. 살아남은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났고 뽑힌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죽였다. 마지막 생존자는 모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성안에 불을 놓고 나서 자신의 목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주후 73년 4월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자신들의 패배가 적들의 승리를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죽음에 실망하고, 경탄하도록 만들자“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다음 날 새벽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고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유태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은 예나 지금이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거룩한 명예입니다. 그 자존심이 인구 4억의 거대한 아랍 세력에 둘러있는 섬과 같은 인구 500만의 이스라엘이 정치,사회,군사,문화적으로 세계적인 강국이 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정말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읽은 본문 37 절에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
유태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의 상속자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주님은 분명히 부정적으로 보고 계십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유대인들은 분명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예언대로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히브리어로 메시야요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메시야가 그들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메시야가 그들 앞에 왔는데 그들은 그 메시야의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이 말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떻습니까 ? 진리의 말씀이 삶에서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30 년 전만 해도 서울 갔다 온 것이 큰 자랑인 때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 같은 시골 태생들은 어려서 서울 구경하는 것이 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학 끝나고 서울 갔다 온 애들한테 대공원이 어떻고 남산 타워가 어떻고 자랑하면 그것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저처럼 시골의 한 가족이 서울 구경을 갔다가 생애 처음으로 백화점에 들렀습니다. 이들은 촌티를 안내려고 한꺼번에 몰려다니지 않고 부자 따로 모녀 따로 흩어져 백화점 구석구석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여기 저기 구경을 다니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은 반들반들 빛나는 벽이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저게 뭐냐’고 묻자, “나도 모르겠다”고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엘리베이터입니다. 바로 그때, 바싹 늙은 할머니가 요술 벽 앞까지 걸어가더니 단추를 눌렀습니다. 벽이 열리고 할머니는 열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금속 벽이 닫히고 그 위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작은 단자마다 차례로 하나씩 불이 켜지다가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더니 아주 늘씬한 미인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게 아닙니까? 이걸 보고 놀란 아버지가 말했답니다. “야! 얼른 가서 네 엄마 데려오너라!”
혹시 여러분은 신앙을 이렇게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주일에 예배당이라는 이 공간에 들어왔다 나가기만 하면 새로워 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여러분은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사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속상한 것이 목사의 축복기도만 받으면 모든게 해결되는 축복이 마구 쏟아지는 줄 아는 겁니다. 아닙니다.
축복기도는 여러분의 신앙에 조금은 유익을 줄 수 있고 도와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축복의 결과는 아닙니다. 축복은 말씀이 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축복의 절대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만이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야고보서 1:22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어떤 신앙의 행위도 축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라 했지만 소용없습니다. 분명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그들은 세상의 힘을 원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물샐 틈 없이 세상 것에 점령 당해 있었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의 피는 물려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는 누구였습니까 ? 자기들을 만족시켜 주고 자기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메시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눅2:1절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 나실 때 로마의 황제가 가이사 아구스도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3:1절을 보면 요한이 세례활동을 시작 할 당시를 로마황제 디베료 가이사의 통치시기로 소개합니다. 왜 로마황제의 이름을 이렇게 세세히 소개할까요 ? 그 왕들이 예수님과 무슨 연관이 있길래 그들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일까요 ?
가이사라는 말은 율리리우 카이사르의 이름을 본 딴 것입니다. 영어로는 율리우스 씨이저입니다. 헬라어로는 가이사입니다. 울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공화정을 다시금 왕정으로 바꾼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전술가요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수백번의 전투를 치루면서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한 적이 없는 전쟁의 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때부터 로마의 명문 가문은 모두 카이사르를 자기들의 성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대권을 받은 사람이 바로 바로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아구스도입니다. 로마어로 옥타비아누스 황제입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 군대를 악티움에서 무찌르고 완전한 군주체계를 확립한 이 또한 뛰어난 왕입니다. 그 다음으로 디베료 황제인데 로마어로는 티베리우스로 그는 게르만인들을 라인강 너머 북쪽으로 몰아내고 길고 긴 게르마니아 장벽을 쌓아 로마의 국경을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한 왕입니다. 이 세 명의 불세출의 영웅들이 팍스 로마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이 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시대에 로마의 식민지 중의 하나였던 유대의 형편은 고통과 절망이었습니다. 독립투쟁을 버렸던 마카비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에돔 사람인 헤롯이라는 사람이 막대한 뇌물을 써서 유대의 왕이 되어 그들의 고혈을 빠는 로마의 개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마음과 신앙은 피폐할 때로 피폐했고 절망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이 처저린 고통 속에서도 유대의 희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뿌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온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 대망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모든 고통은 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면 율리우스 카이사르 보다 더 막강한 용력을 구사할 것이고 옥타비아누스보다 더 화려하게 적들을 제압하고 티베리우스보다 더 견고한 다윗 왕국의 찬란한 영광을 되찾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 천년을 기다리며 억압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왔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씀과 기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손 가락질 받는 세리들과 창기들의 친구가 되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와 성전을 청소한다고 설쳐댑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율리우스씨이저 같은 용력이나 지략도 없고 아구스도 같은 군사력도 없고 티베리우스같은 전공도 없습니다. 그는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집의 목수 출신입니다. 그에게는 막강한 힘이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이 그들을 찾아 오셨지만 그들은 아무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주장만 되풀이하다가 그를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한 것하고 하나님의 뜻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야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로마로부터의 자유와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하며 구원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계획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버리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이렇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아브라함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평범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다른 두 천사와 함께 아브람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한번은 사라에게 일년 후면 자식이 생길 것이라는 것과 또 한번은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겠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방문한 때는 햇볕이 너무 강렬해 손끝하나 움직이기 싫을 정도로 귀찮은 시간인 정오였습니다. 이 때는 모두 하던일을 멈추고 장막에서 낮잠을 자야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정성껏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귀찮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서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할 실 때는 귀를 귀울여 들었고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노력하고 기다렸음에도 얻지 못한 아들을 100 살에 주신다고 말하는 것도 믿었고 또 망하기는 너무나도 아까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다는 소식도 믿었습니다. 사람이 100살에 어떻게 아이를 낳고 하늘에서 어떻게 유황불이 내려옵니까 ?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다 믿었습니다. 나그네의 초라한 모습으로 온 주님의 말씀을 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에 있는 조카 롯이 구원 받도록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주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 오셔도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는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도움이 되는 것만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고 참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 열려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의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이라는 자들은 전혀 그렇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마치 굳게 닫친 철문과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뭐라 말씀 하셔도 듣지 않는 완고한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말씀에 대한 겸손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 육적으로는 유태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태인이 아니라고 로마서는 말씀합니다.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제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닙니다. 같은 유대인인 세례요한은 아주 치욕적인 말까지 합니다.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돌로도 아브람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답니다.
그럼 절망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축복을 상속 받을 자는 이제 누굽니까 ? 교회 일원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언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의 현 주소를 보며 비통해 하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값싼 복음에 농락당해 있습니다. 전도지 내용을 복창하기만 하면 모두 구원 받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훈련 코스를 거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제직으로 수십 년 봉사한 것이 천국 입성 자격증이 되지 않습니다. 은사 체험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내 아내가 믿고 애들이 믿는다고 나까지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집안이 4 대째 예수를 믿는다고 저절로 구원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님 한분이 금주에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씩씩 댑니다. 이유는 상주의 행동 때문입니다. 장남으로 아버님이 병중에 계실 때는 한 번도 오지 않고 돌아가시자 마련된 빈손에 늦게와서는 눈물은 커녕 슬픈 기색도 없더랍니다. 그가 거기 온 이유는 고급 공무원 신분으로 그 동안 뿌려 논 조의금 축의금 걷으러 왔던 것입니다. 한몫 잡으러 온 거지요. 이런 나쁜 사람이 그 집안에서 혼자만 교회 다닌답니다. 그것도 교회의 고급 직분자랍니다.
그래서 늦게 와 가지고 교회에서 목사님과 교인들 심방 온다고 기독교식으로 해야 한다고 제사상 치우라고 행패 부리더랍니다. 그 모습을 같은 크리스찬이 보고도 역겨울 정도였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욕했을까요? 그 분이 지금 이시간 교회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쩜 대표 기도도 했는지 모릅니다. 자기는 천국 갈 것이라 확신하며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라 확신하며 아마도 심방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감사헌금도 드렸을 것입니다. 정말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일까요 ? 그에게 정말 이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있나요 ? 정말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실까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파렴치한 크리스찬이 어디 이사람 뿐이겠습까 ? 지금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우리들도 그렇게 오만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양은 달라도 우리도 이런 죄인 아닌가요 ?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아픔이 되고 부담이 될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찔러야 겠습니다. 죄로 인해 썩어가는 우리의 무서운 환부에 반찬고 몇 개 발라주는 양심을 파는 목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썩어가는 환부는 말씀의 칼로 잘라 내야 합니다. 잘라내는 아픔을 겪은 후에야 새 살이 돋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 없고 회개없는 영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분명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만 구원 받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나를 부인하고 그 진리에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버린 크리스찬들에게 주님은 구원과 축복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날마다 삶에서 주님을 만나며 아브라함처럼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삽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를 여러분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 단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찾아 오셨기 때문에 못 보았을 뿐입니다. 저 같은 보잘 것 없는 설교자들을 통하여 , 또 약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를 수시로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요구하셨습니다.
마 25:31-40 절입니다. “ 이 소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 그러나 우리는 그 소자들을 다 쫏아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친절하고 그들을 돌보려면 내 생활 양식을 바꿔야 하고 내 가치관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약한 형제를 통하여 찾아온 주님을 여러번 거절해 버렸습니다. 주님 내게 오시려면 이런 모습으로 오시면 안됩니다.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 생각에 맞는 방식으로 오셔야 합니다. 저 돈 없을 때 오시면 어떡합니까 ? 사람이 피곤해서 졸릴 때 오시면 어떡합니까 ? 이렇게 정신 없이 바쁠 때 오면 어쩝니까 ? 내일 오십시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거절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하는 주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습니다. 능력있는 분으로 와야 하는데 기적을 가지신 분으로 오셔야 하는데 주님은 그렇게 오지를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못 알아봤습니다.
때로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늙으신 부모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편하자고 부모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편하자고 무시했습니다. 때로는 사업이 실패하고 병든 형제와 이웃과 친구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와 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면 버릇 나빠진다고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도 형제들과 담쌓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 너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목사입니다. 그 사람이 장로이고 권사고 집사입니다.
지금 시대는 무서운 시대입니다. 외형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무수히 증가하는데 참된 복을 받을 아브람의 자손은 적습니다. 현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늘의 상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욕망의 노예가 된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가치관이 여전히 세상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양심이 찔림도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마음이 화인 맞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이 괴롭다고요 왜 내 인생은 꼬이냐고요? 복과 은혜를 가지고 찾아오신 주님을 문전 박대 하지는 않았습니까 ? 정말 내가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 정말 우리가 복 받을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 맞습니까 ?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싶습니까 ? 그럼 아브라함처럼 행동하고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섬기고 언제나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거의 매일 예수님을 만납니다. 기도할때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1000원에서 2000 원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전철을 타면 항상 만납니다. 소경된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큰 가방을 들고 물건을 파는 아저씨로 분장한 우리 주님을 만납니다. 전철을 갈아 탈 때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전철을 타기 전에 항상 예수님을 만날 준비 부터 합니다. 그리고 제 왼쪽 주머니는 항상 예수님께 드릴 헌금을 준비하였다가 잽싸게 그것을 드립니다. 그럼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요즘 같으면 할머니로 분장한 분들이 동네 놀이터에 앉아 계십니다. 예전에는 아이스크림으로 예수님을 대접했는데 요즘은 너무 올라서 요구르트로 대접해 드립니다. 그럼 이빨 다 썩은 예수님이 씨익 웃으면서 고마워들 하십니다. 이 앞에 나가 보십시오 동네 어른들로 변장한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지나 다니는지 모릅니다. 그 예수님께 항상 인사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고 예배할 때만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래 고래 악을 쓰며“ 주여, 주여 ”소리 질러서만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필요할 때만 오는 분이 아니라 주님이 오고 싶을 때 오십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할 때 ,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오시는데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 때 우리가 준비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 그리고 그 복을 받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진짜 자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에 눈을 감지 마십시오 귀를 닫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이 부족한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을 찾아 오셨습니다. 곧 인생의 겨울이 닥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다가오는 인생의 겨울을 대비하십시오 허송세월 할 시간이 없습니다.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고 맙니다.
그 분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 분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그 분을 삶에서 만날 때 마다 대접하십시오 여러분이 싫어도 때로는 짜증 나더러도 분장한 예수님을 외면하지 마시고 친절과 성실로 대접하고 섬기십시오 이렇게 사는 순간부터 현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원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