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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 요 10:7~17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뉴질랜드에서 치유 기도를 부탁받은 데이비드 팸이라는 목사가 자신의 신장을 환자에게 기증해 그 신자의 남편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고 뉴질랜드 언론이 지난 3월 9일 보도했습니다. 뉴질랜드 북섬 페토니에 사는 퍼스파 랜초드라는 이 여성은 남편의 신장병이 나을 수 있도록 자신이 다니는 캘버리(갈보리) 교회의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남편, 마누 랜초드는 1주일에 3차례씩 5시간이나 투석치료를 받는 처지였는데 이제 건강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데이비드 팸 목사는 기도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장 하나를 직접 떼어줘 수술을 받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전부터 신장 기증을 위해 전문의와 접촉을 한 일이 있었던 팸 목사는 신자의 이야기에 선뜻 신장을 떼어 주기로 한 것입니다. 팸 목사는 자신의 신장 기증은 예수의 가르침, 특히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 11절 말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에...”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장 이식수술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팸 목사의 심장에 이상이 발견되어 수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심장 전문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술을 강행했다고 합니다. 수술 후 팸 목사는 2주 만에 달리기를 시작해 1주일에 40㎞를 뛰는 훈련을 소화해 내었으며 두 달 뒤 열린 하프 마라톤을 거뜬히 완주했다고 합니다. 팸 목사의 신장을 이식받아 새 생명을 얻은 마누 랜초드는 아내 퍼스파가 신도일 뿐 자신은 교회의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팸 목사와 죽을 때까지 끊어질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생활 33년째를 맞는 그의 아내는 자신도 2009년 신장을 기증받았는데 남편까지 이렇게 신장 이식수술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데이비드 팸 목사는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누군가에게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실 말씀과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타주의 인 데도 불구하고 이기주의적인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배웠지만 사실은 조금도 손해 보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말은 좋은 말을 잘하는데 행동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름으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자기교회밖에 모릅니다. 이제는 말로서 전도가 잘 안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자신에겐 엄격하면서도 남에게는 관대해야 합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하는데 오히려 교회가 세속화의 온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이 중시되고 명예와 권세가 자랑이 되다보니 도무지 세상과 다를 바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 전도에 앞서 [롬 1: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서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엡 4:24] 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히 12:14] 言,“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화평함과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신령과 진정,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로 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낙심하여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디베랴 호수 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들을 찾아가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저들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게 하심으로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아 올리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조반을 드신 후 시몬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3번씩이나 물으시며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요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씩이나 질문하셨습니다.
어린 양에 물을 먹이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요, 평안이요, 사랑입니다. 그분이 건네는 물을 받아 마시는 양은 곧 우리네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다 축 처진 어깨로 찾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쉴만한 물가로 이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목동도 양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목동은 양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양은 목동을 잘 따라야 합니다. 사무엘 상 17:34 言,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양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 : 눈이 나쁘다. 양은 시력이 나쁩니다. 그래서 눈앞에서 뭔가 보이고 그게 눈앞에서 움직이면 그걸 따라갑니다. 양을 치는 개들이 옆에서 뛰어다니면 그게 또 목자인줄 알고 쫓아다닌다고 합니다.
2 : 잘 속는다. 그러한 양 떼의 형편없는 분별력을 야생 개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야생 개들은 야생의 양 떼를 교묘히 유도하여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은 뒤 잡아먹곤 했다는데요. 인간들이 바로 그 점을 응용하여 양치기 개를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3 : 잘 넘어진다. 양의 다리는 단단하고 강하지 않아 재빠르질 못합니다. 그래서 늘 넘어질 때가 많고 뛰는 속도까지 느려 맹수가 가까이 쫓아오면 잡아먹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4 : 넘어지면 못 일어난다. 양은 일단 넘어지면 말 그대로 '벌러덩' 뒤집어 집니다. 완전히 뒤집혀져서 눕습니다. 그렇게 뒤집힌 양은 아무리 용을 써도 스스로 못 일어납니다. 그래서 목자가 와서 일으켜 세워 줄 때까지 그대로 누워 있다고 합니다.
5 : 중심을 금방 잘 못 잡는다. 뒤집혀 있던 양은 제대로 일으켜 세워줘도 금방은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일으켜 세워준 후, 목자는 양이 똑바로 걷도록 몇 초 동안 가만히 붙잡아 줘야 합니다.
6 : 이기적이고 멋 대로이다. 새끼 양들이 배가고파 어미로 보이는 양들에게 다가가서 우유를 얻으려 다가가면 양들은 매정히 뿌리치고 가버립니다. 양이 그저 온순한 것 같지만 실은 상당히 이기적이고 멋 대로인 면도 있다고 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각자 자기 먹이 찾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멋대로 가버립니다.
7 : 방향 감각이 없다. 양들은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시력이 너무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 숲이 있는지 낭떠러지가 있는지 조차도 구분 못하고 무조건 걸어 갑니다. 그래서 양은 반드시 목자나 양치기가 곁에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8 : 반드시 왔던 길로 다시 돌아온다. 양들은 반드시 한번 떠나 왔던 길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귀소본능이 강한 동물입니다.
9 : 방어력이 제로이다. 양은 자신을 방어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동물입니다. 잘 속고, 눈도 안 보이고, 뛰는 속도까지 느리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10 : 죽을 때가 되면 온순해진다. 염소나 돼지 등의 동물들은 죽음 직전 발버둥을 치는 반면, 양은 죽음 앞에서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온순해진다고 합니다.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듣습니다. 눈이 나쁘고, 잘 속고, 잘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 못 일어나며, 중심을 금방 못 잡고, 이기적이며 제멋대로이며, 방향 감각이 없고, 방어력이 제로인 양의 특징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렇기에 양은 목자의 음성을 목숨처럼 듣고 잘 따르는데, 우리는 양보다도 더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에게 시편 23편으로 양과 목자의 관계를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섬세함과 놀라운 설명력에, 친절하심에 새삼 감사함를 드립니다.
양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나....그렇기에 그러한 양의 특징들을 너무도 잘 아는 목자가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정말 내 발에 등이고, 내 길에 빛으로 알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시는 말씀들을 통해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렇게 주의 음성을 듣는 양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우리 모두는 이제 잃어버렸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교회는 금년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맞았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성취시켜나감으로서 각기 예비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며 간증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 G7 전도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요즈음의 전도방법은 전에처럼 그냥 교회에 갑시다. 라고 말로나 전단지를 가지고 전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짜여진 각본을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접근하여 상대의 관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감동을 줌으로서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교회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한 달에 100명 이상 접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주일에 다섯 번 이상 만나서 보고하고 점금하고 교육받고 해야 전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금산 금강교회의 예/ 이 영미집사)
그리고 지금 세계적으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미국 하이데저트 교회의 탐 머서 목사의 교회부흥 콘퍼런스를 인터넷으로 들었습니다. “가장 성경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전도방법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의 관심사항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 부흥전략을 듣는 콘퍼런스로서 ‘오이코스’ 관계전도의 세계적 권위자로 이 탐 머서 목사는 부임당시 출석성도 100명이었던 하이데저트교회를 1만2000명으로 성장시킨 탁월한 목회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혼구원’의 목회가 美 대형교회(Mega Church·초대형교회)로 키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영혼구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 대형 교회들은 갈수록 ‘영혼 구원’이라는 목적에 집중하고 있는데 교회 내에 있는 프로그램들을 단순화 시켜 모든 사역들이 전도와 관련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 교회들은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의 말씀(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을 바탕으로 교회 구조를 이웃과의 관계중심적인 형태로 바꿔 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건강한 대형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물질을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형 교회들은 다양한 소그룹 활동을 통해 대형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지역 사회와의 연계성을 매우 중시합니다. 점점 많은 대형 교회들이 1년에 한번 정도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지역민들과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미국방문 중 첫째 주일에 새들백교회를 찾았는데 예배를 드리지 않아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지역민과 함께하는 집회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안에서 모이는 교회’가 아닌 ‘밖에서 모이는 교회’로 변모하려는 노력이 강합니다. 영혼구원이라는 목표가 뚜렷한 미국의 대형교회는 이를 위해 섬기는 교회로 체질을 개선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지역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을 강조하는 대형교회로는 라스베이거스 커뮤니티교회, 새들백교회, 인터내셔널 락 교회, 하이데저트 교회 등이 있습니다. 이들 교회 모두 1만 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성도 가운데 50%이상이 복음을 처음 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하이데저트 교회야말로 한국 교회가 벤치마킹 할 수 있는 최적의 교회라고 판단합니다. 하이데저트 교회의 전반적 사역 철학과 방향이 한국교회를 전도 중심적인 교회로 변모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하이데저트는 인구 15만의 소도시입니다. 하이데저트 교회에는 매 주 1만2000여명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8%에 달하는 사람들이 한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성도의 60% 이상은 복음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교회 담임 탐 머서 목사는 ‘오이코스(Oikos·가족) 전도법’의 대가입니다. 오이코스란 말은 사적(私的) 생활단위로서의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친밀한 가정과 가족 같은 말로 셀 목회를 지향합니다. 그는 1984년 하이데저트교회에 부임한 이후 적극적으로 오이코스 전도법을 적용, 거의 명맥만 유지하던 전통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교회는 오직 오이코스 뿐이다. 오이코스는 우리가 교회에서 실행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며 우리 교회의 모든 것이다.” 그는 교회의 사명은 영혼구원이라고 확언한다. 이 영혼구원을 위해 그는 오이코스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남녀노소, 가진 자나 없는 자,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잘난 자나 못난 자 할 것 없이 문제 속에 살아갑니다. 문제가 없는 자는 공동묘지 있는 자들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이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이데저트 교회에서는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무려 8000여명이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나를 통하여 다른 누군가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서 목사가 말하는 오이코스는 목적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했습니다. 오이코스는 누가복음 19장10절의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것입니다.
머서 목사가 강조하는 점 가운데 하나는 파트너십(둘이 짝이 되어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 중심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나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오이코스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건강한 파트너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들의 영혼구원을 향한 열정, 이를 위해 지역에 다가가려는 절절한 노력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19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절 이하에서 言,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와 인도 남부 등 광범위한 지역에 살면서 초원을 질주하던 치타는 몇 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던 호랑이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유전적 변이가 적어서 급속한 환경 변화에 면역체계가 발달하지 못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은 환경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스스로의 변화와 변혁입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최소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익숙한 틀과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창조적 메커니즘으로, 새로운 블루오션의 세계를 개척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다가올 10년의 변화는 지난 50년의 변화속도를 압도할 것이라 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새로 생성된 정보량은 지난 5000년 동안 인류가 접했던 지식의 양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와 세상,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로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잃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진리를 사수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극도로 경계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만 고립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의 증인되라고 하셨습니다(마 28:18-20). 복음이라는 절대적 진리는 바뀔 수 없지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나 도구는 그 시대와 또한 그 세대의 문화코드를 스캔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진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하나님의 자녀들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본분을 굳게 지키면 이 세상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동안,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유보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4). 이 말씀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썩어 있고 어두운 곳이어서 소금과 빛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소금이 되고 빛이 돼야 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세상 풍조에 영향을 받고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도 한국교회 최대의 위기라고 말을 합니다.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세속화’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방식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와 세상 방식을 따라 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 시대의 주제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전통을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필요중심적인 변화가 절대적입니다. 복음은 ‘You’ 메시지가 아니라 ‘I’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고는 건강한 교회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변화는 교회를 변화시키고,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칼빈의 변화는 스위스를 변화시키고 장로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 체험은 변화된 120명으로 하여금 초대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철저하게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고정관념은 천적입니다. 변화되기 위해서는 나를 부수어야 하고 철저하게 깨트려야 합니다. 진통이 있을 것입니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가슴 뛰고 피가 끓는 변화를 갈망해야 합니다. 양적 목표가 아니라 질적 목표입니다. 하지만 단기 승부는 위험합니다. 건강한 교회로 비상(飛翔)하기 위해서는 교회체질이 변화되도록 뼛속까지 바꾸십시오. 변화가 사는 길입니다. 교회체질을 변화시키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교회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