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침략의 마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부터다.
이후 "일본인이 광상 및 지질연구를 위해 조선 국내를 순행하기를 요청할 때는
마땅히 그것을 허락할 것" 등을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우리는 물론 거절했지만, 애초부터 허락 맡아 하고자 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지질 및 광상(鑛床) 조사는 빈번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실시되었다.
(조선의 광산 개발권에 눈독을 들인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지질구조 방향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고 하는데, 독일의 Richthofen이 1881년 요동방향(遼東方向)을,
미국의 Pumpelly가 1866년 지나방향(支那方向)을,
일본의 고토 분지로가 1903년 조선방향(朝鮮方向)을 각각 명명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청일전쟁의 목적으로 1 : 200,000 조선전도를 제작하였고,
이듬해인 1895년 러시아에 대비하기 위해 1 : 50,000 지도 일부를 완성했으며,
다시 1900년까지 1 : 200,000 지도를 보완하였다.
그리고 강점 후 1910년부터 18년까지 9년 동안 대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나라 전체의 세밀한 지형도를 그렸다.
그러한 일련의 사업이 한국의 지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할 것도 없이 광산 개발과 관련된 이권, 즉 수탈이 목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서 특히 욕심을 낸 것은 쌀과 금 두 가지였다.
쌀을 빼가기 위해 비축기지를 새로 만들고 수송도로를 냈으며, 금을 캐가기 위해 지질조사에 광분했다.
그 와중에 묻어 들어온 사람이 고토 분지로라는 지리학자다.
그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4개월 동안 실시한 광물탐사사업의 학술 책임자 자격으로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했다.
그 조사를 토대로 <조선 남부의 지세(1901년)>, <조선 북부의 지세(1902년)>를 발표했고,
두 논문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조선의 산악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1 : 200,000)>를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했다.
그게 1903년이었다.
그 때부터 조선 땅에 '산맥(山脈)' 이라는 용어가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토의 논문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 체계와 확연히 다른 것이며, 당시 유행하던 지질학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산맥분류의 시초가 되었고 체계와 명칭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 전공의 야쓰쇼에이(矢津昌永)가 <한국지리(韓國地理)>를 펴냈다.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그 책의 산맥편에 나오는 산맥지형도는 고토의 연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거미줄처럼 얽힌 고토의 산맥들을 단순화시켜 오늘날의 산맥 계통도와 유사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1905년 조선이 통감부 체제로 들어가자 교과서의 내용도 제재를 받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8년 당시의 지리 교과서였던 <고등소학대한지지(高等小學大韓地誌)>에
'신식' 지질개념이 전래의 산줄기 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산지(山地)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의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일본의 전문 대가인 야쓰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고등소학대한지지>에 실린 산맥도는 야쓰쇼에이의 것이다.
따라서 고토의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의 <실업실찬지리(實業實撰地理 1906년)>를 보면 야쓰쇼에이의 그림보다 훨씬 단순한,
즉 요즈음의 산맥도와 거의 비슷한 산맥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그것으로써 백두대간으로 대표되는 전통 지리학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 날 이후 이 땅에 돌아다니는 소리는 '태백, 소백, 산맥, 산맥...'뿐이다.
그런 역사바꿈을 위해 조선 전역의 땅속 구조를 살피는 데 고토가 쓴 시간은 단 14개월,
교통 수단도 변변찮았을 1900년대 초의 일이다.
그 날 이후 오늘까지 이 나라가 산맥체계의 정립을 위해 쓴 힘은 하나도 없다.
오늘날 쓰이는 산맥명칭 중 13개가 이미 고토 때 명명된 것이고,
3년 후 <실업실찬지리>에서 함경산맥이 추가됨으로써 1910년대 이전에
오늘날의 산맥 분류체계 및 명칭이 사실상 확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질조사가 추가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야쓰쇼에이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고토의 그림에서 산맥선을 넣고 빼고 했을까?
<실업실찬지리>는 또 어떤 근거에서 거미줄처럼 너절하게 얽힌 고토의 산맥선들을 추스려 오늘날의 그림을 만들어 냈을까?
단군 이래 이 땅의 산들이 이리저리 옮겨다닌 적 없었는데, 산맥은 그리는 사람 뜻 따라 합종연횡(合縱連橫)을 거듭했다.
그래야 될 특별한 근거나 조사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채, 합쳐지고 탈락하고 구부러지고 펴지기를 거듭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이 땅의 산들은 궁금하다.
강조하건대 문제는 고토의 논문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 있다.
고토의 산맥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 아니 쓰고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게으름에 있다.
고토만큼이라도 이 땅을 돌아다니며 체계적인 조사를 한 적 없는 우리의 무신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