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용 시인님께
지난 26일 뵈올까 했는데 오시지 않아 문안 겸 선생님의 제2시집 독후감 한 줄 보내 드립니다. 선생님의 제2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을이 떨어지는데>라는 제목의 시 말미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관한 주석에서 몇 가지 의문이 있어 여쭈어 봅니다.
첫째,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선언한 해는 1517년인데 1576년으로 기록된 이유는?
둘째, 카톨릭 신자들이 분파주의자로 치부하고 있는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해 성당을 짓는데 성금을 냈다는 기록에 대해 자세한 해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 요약)
위의 글은 지금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나서 조용히 서재에 묻혀 글만 쓰고 있는 대학 동문인 김중위 사형(詞兄)이 지난 7월 26일자로 내게 보낸 e메일 내용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메일을 접하는 순간, '내 시집을 열심히 읽어 주어 고맙다.'라는 생각 이외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왜냐 하면,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관한 주석은 작년 아내하고 고희(古稀) 기념으로 서부 유럽 관광 여행시 참고했었던 대관광 회사인 '롯데 관광'에서 발행한 관광 안내 책자 「서유럽 여행 안내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된 내용에서 발췌(拔萃)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1576년 종교개혁을 위한 95개 반박 선언을 한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해서 1871년 보불전쟁 이후 카톨릭 신자들의 의한 헌금 모금과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서 1876년 건축을 시작하여 1914년에 완공되었다. 테르트르 광장 옆에 서 잇는 3개의 흰색 돔이 매우 인상적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에펠탑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관을 헤친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반대가 거세었다. (후략)
나는 이내 '정말 연대와 기록상의 오류가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관한 여러 문헌들을 여기저기서 꺼내 뒤져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마르틴 루터가 교황의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비롯한 각종 부패를 규탄한 「95개조의 논제(論題)」를 비텐베르그성 교회문에 부착함으로 해서 발단된 종교 개혁 운동이 전개된 시기가 1517년 10월 31일이 아닌가? 또한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출생해서 1546년에 사망했는데 1576년이라는 연대는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연대인가?
우리나라 굴지(屈指)의 대관광 회사에서 이런 과오를 범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롯테 관광에서 발행한 「서유럽 여행 안내서」의 기록 내용을 심층적으로 확인도 고증도 하지 않은 채, 2005년 겨울호 「해동문학」지에 발표한 바 있고, 또한 2006년 6월 20일에 출간한 제2시집「내 마음의 봄은」에 수록한 바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을이 떨어지는데>라는 제목의 시 말미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관한 주석을 다는 데 참고 자료로 삼았던 나의 무책임한 행동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부 먹다가 이 빠진다.'라 했던가? 대학 졸업 후 한때 출판사 편집장까지 지냈고, 40년 이상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답지 않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오판(誤判)이요 대실수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하지 못했던 경솔한 행동을 반복해서 자책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서 김중위 사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e메일을 써서 보냈다.
김중위 사형에게
졸시집을 정독(精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관한 주석의 오류 지적 감사합니다. 참고 자료에 관한 철저한 검증을 하지 않은 채 무심코 참고한 저의 경솔함을 자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당과 마르틴 루터와의 관계 유무에 관해서는 좀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 성당을 지을 때, 과연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해서 지었는지에 관해서 좀더 확실한 자료를 얻기 위해 불문과의 S교수, K교수, 독문과의 C교수에게 전화로 자료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고, 또한 나는 나대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지식 정보(솔직히 말해서 나는 인터넷 지식 정보는 오류가 너무 많아 불신하는 편이지만)에 무슨 새로운 정보가 있나 해서 열심히 탐색해 보았고, 건국대 도서관과 교보문고에 가서 프랑스사, 서양건축사, 종교사 등 각종 문헌을 뒤적거려 보았다.
그 결과 네이버 인터넷 지식 정보(추측컨대 나처럼 롯데 관광 안내 책자를 보고 일반인이 옮긴 것 같음)에서만 위에서 소개한 롯데 관광 안내 책자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뿐, 기타 서양사, 프랑스사, 서양건축사 등의 여러 문헌에는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지을 때,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해서 지었다.'는 기록은 아무리 크게 괄목(刮目)하고 보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사실 1520년 6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95개조의 논제」를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교서(敎書)를 받고도 이를 불태워 버림으로써 결국 1521년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까지 당한 바 있었던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한 성당을 지었다는 기록을 찾는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격의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지을 때,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롯데 관광회사에서 만든 안내 책자의 기록은 허무맹랑한 엉터리 기록이었으며,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관한 안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정정(訂正)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성심(聖心)성당, Basilique de Sacr -Coeur)
. '순교자들의 산(Montagne des Martyrs)'(272년 성(聖) 드니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한 바 있음)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에 있는 성당. 이 언덕은 1860년 파리에 편입된 후 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어 인상파, 입체파 등의 발상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서쪽 테르트르 광장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무명화가들이 운집해 있고, 남쪽 기슭의 피테르 광장, 블랑슈 광장 일대는 물랭루즈, 카페 등이 들어선 환락가를 이루고 있고, 부근 몽마르트르 묘지에는 하이네, 스탕달, 베를리오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묻혀 있다.
1870-1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보불(普佛)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의 온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부호(富豪) A. 르장티와 H. R. de 플레리는 전쟁의 패인이 정치적이기보다는 정신적인 원인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참회와 속죄의 뜻에서 '예수의 성스러운 가슴(sacr -coeur)에 바치는 성당'을 짓기를 서원(誓願)하였고, 1872년 파리 대주교 기베르 추기경은 이 서원을 받아들여 몽마르트르 언덕을 성당 건축의 적합한 지역으로 선정하였고, 건축가 P. 아바디와 6명의 건축가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1873년 국민의회의 동의를 얻어(찬성 382명, 반대 138명) 1875년 시작해서 1914년 완공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10월 16일 봉헌(奉獻 ; 성당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일)되었다.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비잔틴식으로 고딕 양식의 파리의 노틀담 성당(1163-1240)과 중세 성당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양식은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나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공사비의 대부분은 카톨릭 신자들의 성금으로 충당되었고, 19톤의 거대한 종을 129미터의 언덕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28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높이 83미터의 흰색 돔으로 유명하다. 내부는 예수가 흰옷을 입고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의 세계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475평방 미터)가 있고, 그 밑에는 '속죄하고 감사하며 열렬한 프랑스가 예수의 성스러운 가슴에'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다. 파리에서 1898년에 세워진 에펠탑 다음으로 높은 해발 200미터의 건축물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며 신중하게 인생길을 걸어 왔던 내가 뜻하지 않게 일시적인 판단 착오로 대실수를 범한 사실을 이에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며, 아울러 시 주석상의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해 준 김중위 사형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끝으로, 안자(晏子)가 '성인에게도 많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과실이 있느니라.(聖人千慮必有一失)'라고 한 말과 '사람은 실수로 배운다.'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속담에 다소의 위안을 삼고자 하며, 비록 이 번 일은 '시'라는 이름의 숲을 노래하는 데서 발생한 나무 끝가지가 부러진 한 작은 사건이긴 하지만, 앞으로 김중위 사형과 같은 날카로운 독자의 눈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시 번득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책잡히지 않을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2006년 8월 16일)
첫댓글 '성인에게도 많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과실이 있느니라.(聖人千慮必有一失)우리는 인간이기에 다시 고치며 ,반성하며 사는 인간입니다. 용기를 내어 더 좋은 글을 부탁합니다.
의양, 고맙소. 순간적인 방심의 실수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아프오. 모든 게 내 탓으로 생각하면서 회한의 글을 써서 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