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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32) 내놓으면서도 기뻤습니다 역대상 29:1-9
다윗은 어린 아들 앞에서 영락없는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으로부터 넘겨받은 감당할 수 없는 설계도를 받아들고 걱정 가득한 솔로몬을 위해 모든 준비를 다 해두었음을, 하나님이 너를 택하셨고 함께 하심으로 도우실 것을 가르쳐주지요. 그 뿐이었나요? 다윗은 솔로몬 너가 성전건축의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모든 일을 다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전의 모든 공사를 도울 사람들과 모든 공사에 유능한 기술자들이 세워져 있고, 너를 돕고 함께 할 지휘관들과 방백들이 세워져 있음 또한 알려줍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 인생 길을 먼저 걸어갔던 아버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말해주고, 보여주고, 응원하는 사랑법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직도 어리고 미숙한 솔로몬이 담대하게 성전 건축에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준비해두고, 아들에게 위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드렸지요? 네! 사람도 아들을 위해 이렇게 준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에는, 더 크고 많은 것을 준비하시고 사랑해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그냥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용기를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고, 사람을 물질을 힘을 다 예비하시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함께 해주시는 것이지요? 누구에게? 네, 오늘 그 명령에 충성되이 순종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용기있는 당신의 자녀, 당신의 백성에게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말씀대로 순종하기 시작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기대와 역사를 이루는 복된 종들, 특별히 아버지의 소원과 꿈을 이루어드리는 주의 종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이제 온 회중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합니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29:1) 그러니 그 어떤 사람을 바라보며 일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전 건축에 동참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요. 나를 위한 것도 아니고, 그 누군가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성전건축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일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오늘 분문에는 “~을 위하여”와 “기뻐하다”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분명 자신의 것을 내놓아야 하는데, 다윗도 기뻐하고, 온 회중도 기뻐합니다. 아니, 누가 나에게 무엇을 주어야 기쁜 것이 아닙니까? 이들은 어찌하여 그래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 가진 것이 줄어들고 내게 손해가 될 텐데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저녁에는 그 이유, 내 놓아도 기쁜 이유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래서 받을 때만 기쁜 우리 말고, 내놓으면서도 기쁜 사람들, 하나님의 복된 종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먼저, 다윗이 내놓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기록이 됩니다. 1절,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는 기쁘게 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드려야 한다, 머리로 애써 동의하고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드리기가 쉬울 것입니다. 부담으로 느끼지만 이것이 도리이기 때문에 드리게 되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요. 사실이요. 도리이고, 책임과 의무로 드리는 것은 어쩌면 기쁨이 없는 드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떠했다고요? 하나님을 위한 것인데, 어떤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3절이 기록하지요?
“내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2절, 준비한 모든 것 금은동철 나무와 마노와 검은보석 채석 다른모든 보석, 옥돌을 드립니다. 그뿐인가요 거기에 3절, 자신이 사유한 금은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단 하나, 내가 사모하는 하나님, 내가 사모하는 성전이기에, 이것은 도리요, 책임과 의무를 넘어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지난 여름에 연합성회 문자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강사님 식사 대접 할 교회와 목사님들, 신청해 달라고 말이지요. 이 문자가 집회 전날까지 왔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식사하셨다고 하는데, 식사대접조차 책임과 의무로, 도리로 해야했고, 기쁨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냉큼 만나서 기도받고 싶은 강사님,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받은 은혜가 크고 감사했다면, 그렇게 강사님을 좋아하고 사모했으면 이내 식사대접 신청이 마감되지 않았을까요? 큰 교회에서 하시겠지, 지방회 임원되시는 분들이 학교 안배하고 잘 조정해서 하시겠지 하면서 우리 교회가 섬긴다고 하면 주제넘는 일일거다 하면서 서로 눈치보던 일이 그래 이렇게 민낯이 드러나는 모습이 되었지 싶습니다.
역시 우리는 받는 것, 그저 말씀 듣는 것만 좋아했지, 드리는 것, 헌금하는 것이나 식사대접하는 것은 불편하고 쉽지않은, 인색하고 이기적인 우리임이 드러난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니, 저 강사님이 한 끼 밥 사주기가 아까운 그런 분이셨기 때문일까요? 그래 저 강사님은 밥 한끼를 수백 만원짜리를 드시는 분이셨기 때문일까요? 식사 한번 잘못 대접했다고 마음에 담아두고 두고두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일까요?
만일 우리 교회에서 “서설원 목사 밥 사주실 분 연락주세요.” 문자가 우리 성도님들께 보내진다면 어떨까요? 우리 성도님들께 저는, 말씀 듣는 것도 버겁고, 밥 사주기도 마음이 안내키는 그런 저는 아닐까요?
우리 성도님들의 과분한 사랑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몸무게가 줄 지를 않고 늘고만 있습니다. 기도해주시고 염려해주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소머리 국밥 사다주시고, 반찬에 밥까지 해다주시고, 꽃게도 잔뜩 사다주시고, 매운탕도 끓여주시고, 염소탕도 사주시고, 이 재미에 감기가 안낫나도 싶습니다.
그래요. 못난 저를 이토록 사랑해주시듯, 서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관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만큼은, 의무와 책임, 도리를 감당하는 수준을 넘어, 사랑하고 아끼기에, 귀하고 소중하기에, 뭐라도 하나 주고 싶기에, 내 것을, 그것도 좋은 것을 내어주는 것이 기쁜 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자꾸만 뭐라도 주고 싶은 것처럼 말이지요. 부모는 자녀에게 주고 주고 또 주지만 아깝지 않습니다. 주고 주고 또 주었지만 준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못 해준 것만 생각나는 것이지요. 반대도 그렇지요? 그토록 속만 썩이다가 이제사 철이든 자녀들이 부모님께 자꾸만 무엇을 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드리고 드리지만 드린 것이 아깝지 않은 것이지요. 근데 어때요? 드린 것을 잘 드시지도 못하고, 드린 것을 잘 입지도 못하고, 드린 것을 잘 쓰지도 못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드릴 수 없는, 살아계실 제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속상한 자녀들이 많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랑의 대상이, 의무와 도리, 책임감을 넘어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있습니까? 누구에게라면!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까요?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것으로 높이고 섬겨 드려야 할 분이 누구일까요?
많은 분들이 여러분의 마음과 관계들 속에 계시겠지만,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분이요, 가장 우선이 우리 하나님이시길 축복합니다. 그분은 받고 입씻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저 역시도 내내 받아놓고 입을 싸악 씻고 언제 주셨냐고 말할 수 있는 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것을 받으시면 여러분이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갚으십니다. 아니, 이미 주셨고, 더 주십니다.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 받은 복을 세어보는 사람, 우리의 구원의 가치를 따져본 사람, 그는 하나님께는 물론, 사람에게도 인색하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에 유대백성들의 고백을 살펴보셨습니다. 말씀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되고, 그로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고 나니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느9:33)
우리가 행한 일들을 알지 못한 채, 우리의 저울이 얼마나 기울어져있는지 모른 채, 하나님을 향해서만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우스꽝스럽고 바라볼수록 계면쩍어지는 우리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런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오늘도 감사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살펴보신 은혜, 그 공격적인 용서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하나님으로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 하나님을, 그분의 성전을 사모하는 분들이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다윗에게만 있었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하여 자기가 사유한 금은을 놋철과 나무와 보석들을 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자신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릴 사람들을 초청하지요? 그러고도남을 사람들이었기에 초청하는 것이지요? 5절 하반절 입니다.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Now, who is willing to consecrate himself today to the LORD?
그랬더니, 오늘 많은 사람들이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드리지요? 6절을 읽어볼까요?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다윗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문의 지도자들, 지파의 지도자들, 천부장, 백부장, 사무관들이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듯, 막 앞다투어 경쟁하듯 드린 것 같아서, 못난 저는, 앞에 있는 다윗은 물론 이제 막 왕이 될 솔로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가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이다’ 알리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보다 우쭐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이 정도다, 보고 있냐?’ 하면서 드린 사람도 혹여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뭐라고 이야기하죠? 이들이 다 “즐거이” 드렸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자신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 베푸신 구원과 승리의 경험을 생생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9절은 지도자들 다음, 나머지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도 기록이 되는데 여긴 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9절입니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기뻐하니라”
뭐라고 읽히시지요?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이 성심으로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기뻐했습니다.
이 글을 언뜻 보면, 백성들은 자원하여 성심으로 드리고, 저 지도자들을 비롯한 이들은 자원하지 않고 성심으로 드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영어성경으로 읽으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The people rejoiced at the willing response of their leaders” 그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응답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니 뭐죠? 오늘 본문 한글 성경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적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고 ‘자원하여’ 사이에, “지도자들이”가 들어가야 합니다. 백성들은 지도자들이 즐거이 자원하여 드리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곧 그들이”, 여기 있는 그들도 백성들이 아닙니다. “곧 지도자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기에, 오늘 저 다윗도 기뻐했노라고 본문 9절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백성들은 왕과 지도자와 방백들이 오늘 하나님을 향하여 자원하여 성심으로 사모하여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던 것이지요. 여기에 사심이 들어가거나 경쟁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백성들도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윗도 기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를 보시는 하나님도 기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17절, 다윗의 고백처럼, 이들은 정말 자원하여 성심으로 보는 모든 이가 기뻐하도록 드렸던 것이지요? 17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29:17)
그래요. 사람을 위하여(사람보라고) 아닙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 앞에서, 정직을 기뻐하시는 분 앞에서, 가식없이 꾸밈없이 그분을 사랑하고 성전을 사모하여 즐거이 드리고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모두를 기쁘게 즐겁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 2024년 교회 표어와도 닿아있습니다. 읽어볼까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 앞에서, 순전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복잡하게 꾸미고 가장하고 포장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 눈치보고 상황을 살피면서 이래 저래 미사여구를 덧붙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으니, 마음이 정직하고 순전하니, 모두가 기쁜 것입니다. 드리는 이도 기쁘고 보는 이도 기쁜 것입니다. 그래요.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안 내놓으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저 놈도 이정도는 하는데 하는 경쟁심에서, 이래야 합당하고 마땅한 도리여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다윗과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기쁨의 축제를 벌이듯 성전건축 재료를 내어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먼저, 사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요. 왕이 리더들이 먼저 진심으로 이 일을 기뻐하며 본을 보였기 때문이고, 그로 말미암아 모두가 강제가 아닌 자원함과 성심으로 즐거이 이 일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에 많은 이들이 있지만, 바로 우리가 이렇게 성심으로 즐거움으로 자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계산이 앞서고 모두가 힘을 내어 마음을 모으고 있는 하나님의 일에도 주저주저하게 되는 우리는 여전히 갈 길이 멀지요. 하루하루 더욱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을 경험하면서, 말씀을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시면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축복을 누리면서, 더욱 우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기쁨이 감사가 헌신이 넘치는 우리 모두로 서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내 것을 다 드려도 열두 광주리를 남게 해주시는 것이지요. 아끼고 아껴서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이 아니라,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풍성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아버지를 믿으시면서 오늘도 하나님께, 주변의 이웃들에게, 우리의 것을 베풀고 나누시는 복된 분들,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성전을 짓는 일은 저 지어질 건물만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기에 오늘도 성전된, 모퉁이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된 우리의 모든 성도들, 지체들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말로만 혀로만 열정과 마음으로만 세울 수 없습니다. 그 일 위하여 성심으로 자원함으로 우리의 물질을 우리의 힘을 우리의 생명과 시간을 기쁨으로 내어놓는 주의 종들이 되시고, 무엇보다 예배와 복음전도, 찬양과 기도에 우리의 것을 기쁨으로 내어놓는, 한 그릇 소금을 더 담아 드려보시는 주의 종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드린 작은 오병이어를, 열두 광주리로 채워 돌려주실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께서, 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분이, 오늘도 시공을 뚫고 오셔서 우리에게 거룩한 목적을, 거룩한 비전을 주실 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지도자와 백성들이 더욱 한 마음이 되어 자원하는, 정직함을 기뻐하시는 그분 앞에서 행하고 보여드린 우리의 순종, 우리의 준비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심을 목도하시는, 복된 교회 우리 하일교회가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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