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의 1백년 동안 차는 전 유럽에 소개되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도 상륙하였다. 임진·정유, 두 차례의 왜란으로 조선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때였다.
유럽과 미국에 소개된 차는 대체로 중국산이거나 일본산이었다. 포르투갈이 중국(明) 관군을 도와 해적토벌에 참가한 대가로 마카오( 閣廟)에 거주할 권한을 얻어 동아시아 무역기지를 삼은 것이 1557년, 이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진출한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해당하는 1570년 전후였다. 포르투갈이 진출하는 곳엔 네델란드와 영국이 따라붙었다. 포르투갈은 철저하게 선교사를 앞세웠지만 네델란드나 영국인들은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무역에만 열중하는 특징을 보였다. 임진왜란때 막강한 화력을 발휘했던 포르투갈 조총이 일본에 수입된 시기도 이때였다.
바꿔 말하면 유럽인의 대항해(大航海) 시대였다. 동양의 차를 말이나 글로 전한 이는 16세기에 더러 있었다. 이탈리아인으로서 동양의 차를 처음 모국에 소개한 이는 람지오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항해기집성(航海記集成1545)"에서 "가사이(支那: 중국의 옛이름)에서는 어디서나 차가 팔리고 누구나 마시고 있다. 공복에 한두잔 마시면 열병, 두통, 위통 등의 고통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특히 통풍에 효과가 있는데 일상에서는 과식을 하였을 때도 차를 마심으로써 소화를 돕고 있다"고 했다. 또 1560년 포
르투갈의 선교사 타 구르스튼은 "가사이(支那)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반드시 차라고 하는 음료를 대접하는데 맛은 쓰고 색은 붉다. 차는 때로 약이 되는 음료라고 한다"고 동양의 차를 본국에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차(茶) 자의 발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은 차를 "다"라고도 부르고 "차"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글학회는 이에 대해 "다"는 차(茶)의 글자 음(音)이요, "차"는 뜻으로 본 관용음(慣用音)이라면서, 예외적인 경우가 있겠지만 대체로 차(茶)자가 앞에 올 때는 "다"로, 뒤에 붙을 때는 "차"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는 정의를 내렸다. (이에 근거하여 이 글에서도 차와 다를 형편에 맞게 혼용하고 있다) 또 하나 명(茗)이라고 널리
사용하였는 데, 이는 한자문화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방언이 심한 중국에서도 차는 "차(Cha)" 또는 "테(Te or Toe)"로 불렸다. 복건성 발음이 차, 광동성 발음이 테 또는 떼였다. 차를 일걷는 발음은 이 네가지가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이 네가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중 지구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테"발음이다. "테"에서 변형 "티(Tea)"가 생겨나 테 다음으로 많이 발음하게 되었다. 폴란드 등 동유럽이나 시베리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또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서남아시아에 널리 보편화된 발음이 이 "테"인 반면 "티"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조금 세련된 선진국들의 발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티(Tea)"로 발음하는 인구와 "테"로 발음하는 인구를 합하면 세계인의 약 70%는 될 것으로 짐작된다.
동양에서는 일찌기 발효차(醱酵茶) 만드는 제법이 발달하였고, 그 우린 물이 붉다하여 홍차(紅茶)라 이름하였는데, 유럽인들이 이 홍차에 블랙티(Black Tea)란 이름을 붙이게 된 데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기록상으로 유럽에 실물(實物)의 차(茶)를 최초로 싣고간 배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으로 1609년 히라도항(平戶港)에서였다. 내용물은 홍차가 아닌 녹차, 즉 그린티(Green Tea) 였다.
그런데, 당시의 뱃길이란 적도(赤道)를 지나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希望峰)을 돌고, 다시 적도를 지나 본국으로 가는 정도였다. 태양열 뜨거운 지대를 지나는 긴 항해에서, 배에 실려진 동양의 진귀한 나뭇잎은 그만 자연적으로 다 발효되어 하역할 때쯤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이게 무슨 그린 티인가. 이건 블랙 티가 아닌가"
상인들은 차가 다 썪었다면서 아깝지만 버리려고 하였다. 그 때 한 사람이 버릴 때 버리더라도 뜨거운 물에 우려나 보자고 나섰다. 실험하니 빨갛게 우러나는 것이 맛은 약간 떫었지만 향기도 좋고 뒷맛의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레몬을 타니 떫은 맛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버리려던 차를 얼른 거두어 들였고 이 붉은 물이 우러나는 차에 "블랙 티"란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하여 네델란드 상선은 새카만 차를 모국에 전했는데, 그러나 마시는 분위기는 일본의 와비차(陀の茶) 그대로였다.
…차라고 하는 기묘한 음료는 마시는 절차부터 까다로운 의례를 요구한다. 종교적인 신비성과 사회적인 윤리성이 숨어 있음에 한결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한 잔을 마시는 데도 특별히 만들어진 다실을 이용하고 차를 만들어낼 때는 반드시 무쇠솥이나 도자기를 이용했다. 유럽인들이 다이아몬드나 루비같은 보석에 비싼 값을 치르며 소중히 하듯, 그들은 좋은 다기 (茶器) 다구(茶具)를 보물처럼 애중히 다뤘다…
일본인들의 다회하는 풍경을 전하자 동양문화에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네델란드인들은 이를 즉각 흉내냈다. 홍차로써 다도(茶道)에 열중했던 것이다. 1701년 암스텔담에서 공연된 희극 "데(Toe)에 참석한 부인들"은 당시 네델란드 귀부인들의 다회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역시 일본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다회는 2시, 초대받은 손님들이 오면 여주인은 정중한 인사로써 맞이한다. 손님이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여주인은 여러개의 자기그릇, 은그릇에 각각 다른 차를 담아 보여주며 "어떤 차를 원하십니까?" 라고 공손히 묻는다. 선택은 대개 여주인에게 일임한다. 이윽고 여주인은 그 중의 하나로 정성껏 차를 만들어 작은 잔에 조심조심 따른다…
네델란드 귀부인들간에 유행한 이러한 방식의 다회는 점점 호화로워지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부인들의 외출이 잦아지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남편들은 술집으로 흘렀고, 그래서 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혼란이 차 때문에 빚어졌던 것이다. 수입된 차에는 엄청나게 비싼 값이 매겨졌지만 네델란드 상류사회는 이 차를 구하지 못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때까지 유럽에는 주류(酒類)와 밀크 정도가 있었을 뿐 뜨거운 음료라는 것은 전연 없었던 것이다.
아라비아의 커피가 유럽에 소개된 것도 같은 시기였다. 네델란드 상인들이 상선을 이용한 것과는 달리, 이슬람권의 커피는 아라비아 메카를 발원지로 하여 이스탄불을 경유 오스만제국의 세력확장과 더불어 유럽전역으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그 양이 수요를 충족시킬만큼은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뜨거운 음료에 심한 갈증을 느끼던 무렵 실크로드 - 동양에서는 이를 비단과 차의 통상로라 하여 사차지로(絲茶之路)라고 불렀다 - 를 통하여 중국의 홍차가 폴란드에 전해졌다. 당시 동양은 녹차(抹茶) 중심이어서 홍차는 큰 인기가 없었다. 대량의 홍차를 싼값에 사간 폴란드 상인들은, 우선 폴란드 궁정에 진상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높인 후, 포르투갈과 영국에 수출했다. 홍차는 금세 귀족사회의 인기를 차지했다. 모든 정치 이야기는 티하우스에서 이루어졌고, 법률가·문학가·의사·성직자 등이 모두, 짙은 향기를 내뿜는 붉은빛 음료에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차를 맛본 것은 1650년 경으로 유럽에서는 가장 늦었다. 북아메리카의 네델란드 식민지 뉴암스텔담(현재의 뉴욕) 주민들에게 차가 소개된 것과 같은 시기였다. 값이 비싼데도 인기가 높아지자 런던에는 차를 파는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러나 영국왕실에 차마시는 풍습을 전한 사람은 포르투갈인이었다.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루투갈 브라간자가(家) 출신의 캐서린 왕후로,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간 것은 1662년이다.
늦게 알았지만 영국인들은 홍차에 남다른 눈독을 들였다. "재빠른 영국인들"이라는 별명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들은 홍차를 보자마자 이것의 상권이 유럽의 정치 경제사회에 미칠 강대한 영향을 간파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상인들이 영국에 차를 전한 것은 실수가 되었다. 소량의 수출이 영국의 동양진출을 보다 본격화하게 만들어준 결과가 되었다. 유럽에 진출한 차는 이렇게 유럽 각국을 파고들며 식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고, 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논쟁의 요지는 네델란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인들이 차를 지나치게 애호하여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메소지도스교회는 신도들에게 "차는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않고 도덕적으로도 유해한 것인만큼 마시지않는 것이 좋다"고 공개적으로 차를 반대했다. 또 스코틀랜드의 한 의사는 1730년 발표한 논문에서 "차의 효용에 환상적인 신뢰를 품어서는 안된다"면서 "알려진 것과 반대로 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든가 심한 불쾌증을 품게하는 유해로운 음료이다"라고 하여, 음차를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탄하는 내용까지를 담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 기 파텡은 차를 가리켜 "금세기 가장 엉뚱한 물건의 하나"라고 매도
했고, 영국의 헤일스 목사는 차는 해로운 것이라며 돼지새끼의 꼬리를 뜨거운 찻잔에 담그면 털이 죄다 빠져버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예찬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영어사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닥터 존슨은 "디텔러리 매거진"에 쓴 "건강하고 처세에 부끄러움 없는 남자의 선언"에서 "나는 지난 몇 년동안 오로지 가장 사랑하는 식물을 끓여 우린 물로 빵을 부드럽게 해서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나의 포트는 식은 예가 없다. 홍차로 저녁을 즐기고, 홍차로 한밤을 위로 받고, 홍차로 아침을 맞이한다"고 당당하게 노래했다.
이에 대하여 여행기로 유명한 죠나스 항웨이라는 작가는 "차에 관한 에세이"에서 "홍차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나라를 가난하게 만드는 산업이다. 그리고 홍차는 국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 호텔의 여종업원까지 홍차를 마시는데 건강한 얼굴색을 잃게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고 반박했다.
영국인끼리의 홍차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코크레이·렛솜의 논문 "차의 의학적 성질과 끽다의 효과에 관한 고찰"이었다. 렛솜은 이 논문에서 "홍차는 너무 뜨거운 것을 마시거나 벌떡벌떡 마시지만 않는다면, 달여마시는 다른 어떤 식물보다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원기를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의 홍차에 대한 애정은 그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월등하게 좋은 맛과 향기, 효과가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이 온건한 의견이 대세의 지지를 얻으면서 홍차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없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영국에서처럼 널리 보급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역사에 뚜렷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을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차였기 때문이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톤 시민들은 차에 대한 무거운 세금에 항의하여 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상선들을 습격, 차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 사건이 미국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차는 또 미국인들이 만든 쾌속범선들의 명성을 전세계에 떨치게 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 배들은 차를 중국에서 런던의 부두로 실어 나르는 데 있어서 언제나 선두를 달렸다. 그중의 한 척인 라이트닝(번개)호는 24시간에 436해리를 항해하여 범선으로서는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차는, 가장 미국적인 제도 중의 하나인 수퍼마켓의 발달에도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수퍼마켓의 원조인 대서양태평양차회사(The Great Atlatic & Pacific Tea Company)는 차·커피·향료 등의 주요 품목을 대량으로 구입함으로써 거기서 얻어지는 이익의 일부를 소비자에게 돌려줄 수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1869년 설립된 회사였다. 이 A&P 연쇄점의 초기 사진들을 보면, 정면 입구 앞 인도 윗쪽에 T자 모양의 거대한 간판이 반드시 걸려있는데 이것은 곧 차(Tea)를 뜻하는 것이었다.
아편전쟁(阿片戰爭1840∼42)은 차 소비가 늘어나, 은과 모직물만으로는 그 대금을 치룰 수 없게 되자, 인도산의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한 데서 빚어진 또 하나 차로 인한 전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유럽사회가 이렇게 차 문제로 갑론을박하면서도 차나무는 동아시아의 고유한 식물로서 다른 곳에서는 생육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점이다. 그것은 중국이 차산업의 노하우를 지키기 위하여 차나무 종자나 묘목의 반출을 법으로 금지하고 재배기술이나 제차법(製茶法)에 대해서도 극단의 비밀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엄중한 경계(?)를 뚫고 중국에서 차나무 종자와 재배기술을 빼내는 데 성공한 것은 네델란드인 야곱센이었다. 1828년부터 33년까지 중국에 잠입하기를 다섯차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차나무 재배에 필요한 정보 일습을 빼낸 그는 자바(Java)에 다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다원에서 차가 생산되기 전인 1823년, 영국의 탐험가 부루스가 미얀마의 오지에서 신품종의 차나무를 발견하는 바람에 야곱센의 자바다원은 빛을 보지 못했다. 아샘종(Assam種)이라 명명된 신품종은 차잎의 크기가 3배쯤 되고 열대 기후에 잘 견딜뿐 아니라 홍차로 가공했을 때 종래의 중국 홍차와는 비교가 안 되는, 뛰어난 맛과 향을 내는 우수한 것이었다.
차는 그렇게 아샘종의 발견으로부터 남방지역의 홍차와 동북지방의 녹차가 뚜렷한 구별을 갖게되는 데, 이 아샘종 차나무가 대량 번식되기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스리랑카를 비롯, 미얀마·인도 일대에 최대산업으로 군림하던 커피나무들이 돌연 발생한 병해로 절멸해 버리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세계가 이렇게 좁아지면서, 동양은 서양의 영향을 받고, 서양은 동양의 영향을 받아, 사상과 생활 풍습에 일대 변혁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시기, 조선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아니 역사에 드물게 중국과 일본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진왜란(1592)의 상처를 미처 치유하기 이전에 터진 병자호란(1636)은 조선의 기개를 꺾어놓다시피 하였다. 일부 지식층에 열린생각이 있었다 해도 중국과 일본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이라하여 서양인의 출입이 전연 없지는 않았다. 기록만을 근거해도 선조15년(1582년) 3월에 서양인 마리이( 里伊)가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곧 중국으로 압송했다 했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따라 선교사들이 들어왔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할 당시 기독교도를 받아들였었다. 서양인들은 어디라 예외없이 선교사를 앞세워 상륙을 시도했고, 상륙 후 판단에 따라 무역을 하던가 식민지를 만들었다. 나가사끼가 개항된 후 제일 먼저 들어선 것도 교회였다. 선교사를 받아들여야만 총기나 화약류 수입이 가능했다.
다두(茶頭) 센리큐(千利休)의 죽음 이후 나타나는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서불안 현상은 조선 땅에서 사상 유례없는 살상을 저질렀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지만, 가까스로 철군한 직후 돌변하여 기독교 금지령을 내리고, 나가사끼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인 선교사를 포함 600여명을 처형한 데서도 나타난다. 조선을 기습(奇襲)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국에는 패퇴하고 만 화풀이를 이들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총이면 모든 것을 굴복 시킬 수 있다고 했던 포르투갈인 무역상에 대한 분풀이이기도 했다.
후일 이들이 죽임을 당한 곳은 순교의 언덕으로 성지(聖地)가 되었고, 이때 순교(殉敎)한 교인 중 26명은 1862년 로마 법황에 의해 성인(聖人)의 명단에 올랐다.
세 번째로 조선땅을 밟은 서양인은 박연(朴燕)이다. 인조6년(1628)에 동료 두 사람과 함께 표류하던 중 먹을 물을 구하러 상륙했다가 경주에서 붙잡힌 그는 본명이 존 웰테브레였고,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조선은 그를 왜인(倭人:日本)에게 인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분위기가 바뀌어 그를 인수할만한 나라가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조선에 머물게 되면서 그는 박연(朴燕)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그에 의해 조선이 서양에 알려질 법도 하였지만 조선은 오히려 그가 나라의 기밀을 누설할끼봐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네 번째 나타난 서양인이 1653년의 헨드릭 하멜 일행(네델란드)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조선은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 되었으니 1668년 첫 간행된 "하멜표류기(漂流記)"가 그것이다. 하멜은 표류기 후미에 14년 동안 조선 땅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일들을 모아 조선왕국견문기라고 이름붙여 덧붙였는 데, 그 관찰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흥미롭다.
…코레아인은 온순하고 관대하며, 성질이 좋고 동정심(同情心)이 많다. 그리고 법률을 잘 지켜 나라 땅 어디를 가도 안전하다. 신앙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의사에 따른다. 네델란드인들이 우상(偶像)을 노골적으로 싫어해도 문제삼는 일이 없다.
…코레아인은 청결하고 깨끗한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붓으로 글을 쓰는 데 매우 잘 쓴다. 타르타리아(女眞)의 사절이 궁정에 체재하고 있을 때에 "왕국은 무엇에 의하여 수호되고 지배되는가" 물은 즉, 국왕은 "붓(筆)에 의거한다"고 답하였다.
…남해안(南海岸)에는 양항(良港)이 있다. 그곳에는 많은 노예가 있는데, 모두 같은 나라 사람들이다. 그곳에서는 차(茶)가 굉장히 많이 산출된다. 그것을 가루를 내어 뜨거운 물을 부어서 탁(濁)하게 하여 마신다. 해안에는 바다 속에 진주(珍珠)가 있어 채취(採取)가 행해진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 거리로는 항해(航海)를 하지 않고, 또 배도 가벼워 그런 항해에 적합하지 않다.
…백성들은 월식(月食)이 일어나는 것을 달과 뱀이 싸우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월식이 계속되는 동안 나팔과 피리를 불며 요란하게 소리를 낸다. 이상한 것은 수학(數學)이 유럽만큼 발달하지 못했는데도 월식이 일어나는 때를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도자기가 매우 훌륭하게 만들어진다. 일본이 특히 그들의 도자기를 귀중하게 여기는 데 수요도 많다. 그 훌륭함은 일본제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 왕국은 온갖 과일이 매우 풍부하고 갖가지 곡식이 모두 산출되며, 특히 쌀을 많이 생산한다. 쌀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밀과 기타 모든 곡식이 다 그렇다.
…요약컨대 이 왕국은 모든 점에서 매우 유명하고 또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모두 풍부하다.
하멜 일행은 이외에도 조선의 산물 - 특히 진생(人蔘)과 같은 자연산물 - 과 화폐제도를 논하고, 군신 관계, 형벌제도 국민정신 등을 보고 느낀대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한창 시달리는 모습이었고, 그래서 중국과 일본 양 쪽에 다 조공을 바친다는 따위 기술이 곳곳에 들어있게 되었다. 차 산출은 많다고 했으나 백성들이 차를 즐겨 마신다는 표현은 없다. 차생활 풍속 역시 깊히 숨어버린 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