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은 죽재 서남동 목사께서 돌아가신지 27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전반적인 위기 앞에서 그분을 다시 기억하고자 한다. 그분이 남긴 신학적 유산을 교회가 잇고자 일어선다면,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다시 한 번 민족의 영혼을 사로잡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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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동 목사 |
1984년 5월, 67세의 서남동은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모교가 있는 캐나다 토론토를 향하게 된다. 그는 출발 직전 스승 김재준 목사에게 자신의 아호를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뒤늦게 발견된 췌장암 때문에 귀국하자마자 병상에 눕게 된 서남동은 마지막 정신을 이어가는 가운데 동료 정대위 박사를 통해 아호를 전달 받는다. 오랜 스승이 준 아호를 통해 나타난 서남동은 다음과 같다.
“그의 용모와 뜻이 맑고 깨끗하며, 그의 지조와 마음은 곧고 비어 있다. 그의 학문은 넓고 사귐은 공경할 만하다. 고난을 받되 태연하고, 안정하여 학문에 힘쓰니 널리 그의 풍문이 들리는구나. 이에 그의 덕을 기리며 84세의 장공이 호를 지어 들어내노니 ‘竹齋’라.”1)
죽재 서남동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아가며 민중신학이라는 실천적 기독교 사상을 탄생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처절한 극단의 삶을 살았다기보다는, 그의 아호가 가리키듯이 대나무처럼 올곧게 “진리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로 살았다. 그는 자신이 지어 이룬 것에 머물지 않고 늘 진리를 향해 새롭게 도약하는 영혼을 가진 이였다.2)
1918년 7월 5일, 죽재는 목포에서 서북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자은도(현재 신안군 자은면 유천리 272번지)라는 섬에서 부친 서응렬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죽재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섬에 대한 영상은 어둡지 않다. 소학교 5학년 때 목포로 유학 간 죽재는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이때 성경을 통해서 배운 기독교 신앙은 나중에 ‘민중’에 대해서 눈뜨고 깨닫게 된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즈음, 성경에 나온 지역(地域)이 지구 위에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니 죽재의 삶과 사상의 시작은 평온하고 순박했다고 할 수 있다.
소학교를 마친 죽재는 전주로 옮겨 신흥학교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다. 이 학교는 호남지역을 주무대로 삼고 활동했던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가 1900년에 세운 곳으로서, 한강 이남에 있던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다. 죽재가 수학하던 그때까지 5대째 미국 선교사가 줄곧 교장을 맡고 있었음을 미뤄보아, 전주신흥학교는 아마도 식민지 시대 청소년에게 굴욕과 분노를 심어주기보다는 상식과 희망을 허용하는 좋은 공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죽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7년에 이 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되고 해방 이후에야 복교가 되었으니, 죽재 역시 조선 인민 모두에게 부과된 역사의 짐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마친 죽재는 1936년에 일본 교토에 있는 유서 깊은 동지사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이어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게 된다.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한 이 대학은 추상적 관념이나 전통의 왜곡된 권위에 맞서 진리를 증언코자 하는 지적 정직성에서 탁월했던 죽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3) 1941년 3월, 24살의 청년이 되어 귀국한 죽재는 평양에 있는 요한성경학교 교사로 1년 남짓 재직한다. 그리고 대구에 내려가 대구제일교회, 범어교회, 동문교회 등에서 십 년간 목회자로 활동한다. 목회를 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열정을 식지 않았다. 그는 당대를 선도했던 국내외 신학자들의 사상을 섭렵하는 일에 남달랐다. 이점이 그 당시 신학적 차이로 인해 교단분열의 길을 걷고 있던 장로교단 가운데, 진보적인 노선을 고수하며 새롭게 출발하던 한국신학대학(현재 한신대학교)의 교수로 발탁된 이유였을 것이다.
35세에 교수가 된 죽재는 아직 사상적으로 무르익지 않았다. 교수진의 수준향상을 위해 장려되었던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3년 동안 그가 쓴 글은 짧은 논문 한 편에 불과했다.4) 그러나 1955년 가을부터 2년 동안 토론토에 위치한 빅토리아대학교의 임마누엘대학에서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복교한 이후부터 죽재는 자신의 신학을 체계화시켜가기 시작한다. 1961년 9월에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이직하여 종합대학이라는 보다 풍요로운 학문적 분위기에서 연구하며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주로 강의했던 현대신학과 역사철학의 세계적 동향에 누구보다 민감했기 때문에 “현대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현대신학의 세계적인 흐름과 함께 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원 시절부터 붙들고 있었던 자신의 학문의 주제인 ‘역사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심화 확대시켜 갔다.
죽재는 15년 동안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 교목실장, 신과대학 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학문에서는 치열했지만, 직접적인 사회적 실천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대학원장으로 있던 1969년 말,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삼선개헌반대투쟁으로 일어섰을 때에도 그는 “비교적 냉담했다”고 한다.5) 어쩌면 이때 죽재는 과학철학과 유기체사상을 통해 그 정신의 지평을 우주론으로까지 넓혀감으로써 마침내 있을 창조적인 분출을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죽재를 한국역사의 한복판으로 끌어낼만한 상황은 사실상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대부분의 개신교회가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에 편승하여 성장주의로 무장한 채 내달리기 시작했을 때, 선각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고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고난 받는 민중현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죽재 역시 이러한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1970년 11월 13일, 23살의 청년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이제 생명과 평화를 설파하는 모든 종교사상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절 죽재는 자신 시대를 앞서서 생태환경과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새로운 유기체적 비전을 완료해가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직접적인 부름에 대해서도 무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72년 10월 박정희에 의해서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한국사회는 말이 법이지 실상은 무법천지의 광폭한 정치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어둠의 세상이 되었다. 이즈음 세계교회가 주목한 사건이 한국에서 벌어진다. 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을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표방한 이 선언을 죽재가 주도했는데, 그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의 主님, 메시아 예수는 유대 땅에서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멸시받는 자들의 사이에 계셨고, 그들과 함께 살으셨다. 그는 로마 帝國의 대표자 본디오 빌라도 앞에 담대하게 서시었다. 그리고 진리를 증거하시는 도상에서 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일어나 變化의 能力을 전해주셨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을 결의한다. 그리하여 주님처럼 疏外당한 동포들과 함께 살면서 정치적인 압박에 저항하고 역사의 개조에 참여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한국 땅에서 메시아의 나라를 선포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선언 이후 얼마가지 않아 ‘민중신학’이라고 불리게 될 한국 고유의 신학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죽재는 항상 맨 앞을 지키고 있었다.
1974년으로 접어들면서, 죽재의 민중신학적 구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간다. 그해 연세대학교 교수퇴수회에서 “예수와 민중”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후, 여러 곳에서 동일한 주제로 강연을 하고 그것을 가다듬어 1975년 2월에 “예수ㆍ교회사ㆍ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그것이 죽재 민중신학의 시발이 되는 논문이었다.6) 같은 시기에 동료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민중ㆍ민족ㆍ교회”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내한하여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는 등, 바야흐로 한국에 민중신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 죽재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세계로 완전히 진입하게 만든 한 일화가 있다. 그 사건은 아마 1975년 초에 생겼던 것 같다.7) 죽재는 그해 11월 말에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리게 될 세계교회협의회(WCC) 제5차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신앙과 직제, Faith and Order> 분과의 사전 모임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정치신학이,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북미에서는 흑인신학이 활발해지던 이 시기에, 이 총회는 직접적으로 “해방과 공동체,” “해방을 위한 투쟁과 불의한 구조들” 등의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이었다. 준비모임에 참석한 죽재는 참가자들로부터 한국의 상황과 정치적 억압의 상징이 된 김지하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다. 아뿔싸! 저항시인으로 세계가 주목하고 또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까지 언도받은 그 사람과 그의 사상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다니. 서남동은 자기 신학의 관념성에 스스로 충격을 받고, 귀국 즉시 김지하 관련 자료를 모두 수집해서 읽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한국 민중의 한(恨)과 희망에 관한 시인의 감수성은 죽재신학에 그대로 흡수된다. “신(神)과 혁명의 통일”이라는 지하의 사상이 서남동 신학의 토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제 죽재는 책상머리의 서생의 아니라, 한국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따라 민중신학의 이상을 실천을 통해서 실현해가는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춘다. 1974년 11월 27일, 62명의 한국의 진보인사들이 발표한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한 이유로 정부로부터 경고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내에서는 구속학생과 교수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고, 밖으로는 정치집회의 강연자로 활동하면서, 이듬해 3월, 8개교단의 성직자들이 결성한 “기독교정의구현전국성직자단”에도 적극 참여한다. 결국 그해 5월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8) 안병무, 문동환, 이계준 교수 등과 함께 교수직 해임을 권고 받고, 6월 2일 사직하게 된다.
학교에서 쫓겨난 죽재는 그야말로 “방외의 신학자”가 되었다. 이제 그의 신학은 서재에서보다 거리에서, 머리와 손으로가 아니라 가슴과 발로 써진다. 한편으로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를 통해 활동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에 신학적 정당성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동환, 안병무 등 해직교수들과 그 가족 및 해직기자 등과 함께 “갈릴리 교회”를 설립하여 고난 받는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세워갔다. 그러는 와중에 민중신학자로서 어쩌면 피하기 힘든 시련의 시기를 맞는다. 1976년 3월 1일, “3ㆍ1민주구국선언 (일명, 명동사건)”에 서명함으로써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등과 함께 정부전복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1977년 12월 31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기까지 22개월간 수형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석방된 지 두 달 후, 죽재는 감옥에서 구상했던 민중신학을 체계화시킬 수 있는 안정된 자리를 얻게 된다. 예전에 교수로 있었던 한국신학대학의 소속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즈음 그의 정신세계를 가늠케 하는 한 장면이 있다. 죽재는 자신의 집무실 벽에 기라성 같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사진이 아니라 처형장으로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 장군의 사진만을 걸어놓았다고 한다.9) 이제 ‘한국의’ 신학자로서 한국 민중의 영혼에 새겨진 고난과 희망을 신학적 언어로 풀어가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을까? 어찌됐든, 1979년에는 죽재 민중신학의 핵심사상이 담긴 “두 이야기의 합류,” “恨의 사제,” “恨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등의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용된 신학적 방법론은 더욱 구체화되어 이어지는 4년 동안 민중신학을 이어갈 후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준 10여 편의 논문으로 구체화된다.
죽재의 마지막 5년 동안의 삶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지닌 고난의 숨결을 종교사상으로 형상화한 탁월한 시기였지만, 그 고난은 또한 바로 자기 자신의 고난이었기에 학문적 언어 역시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전통신학의 언어를 배격하고, 한국의 문화적 실재와 정치사회적 현실을 직접 증언하는 신학방법론을 사용하면서, 자신은 이를 가리켜 “탈(脫)신학” 또는 “반(反)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그의 삶 역시 반듯한 학문적 공간 안에서의 삶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상태에서 1980년 2월 교수로 복직되지만, 전두환의 5ㆍ17비상조치로 인해 또 다시 구속되어 해직된다. 죽재는 5월 17일 제주도의 한 교회에서 강연하던 도중에,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정권의 정치조작에 연루되어 잡혀간 것이다. 그리고 군법회의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5개월여의 옥살이 끝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한다. 역사와 세계 속으로 생생하게 화육(incarnation)한 신의 현존을 증언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이라면, 죽재는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역사의 흐름에 붙들어 매고 몸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간 것이다.
죽재의 삶과 신학은 진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구도의 길이었고, 그 길에서 발견한 것은 ‘민중’이었다. 겉으로는 억압과 고난을 당하는 약자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가는 실체로서의 민중, 약탈과 갈등으로 이어진 역사의 사슬 마디마디에 생겨난 한(恨)과 증오를 도리어 창조적 생산과정에 품고 녹여내면서 타락한 역사를 구원시키는 민중, 그래서 진화하는 우주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어딘지 또 그 우주에서 섭리하는 신의 활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지표가 되는 민중, 바로 그것을 증언하고 언어에 담아 형상화시키는 것이 죽재의 신학적 목표였다. 바로 이 정신으로 인해 한국에 민중신학이라고 하는 세계가 주목한 신학사상이 생겨났고, 죽재 개인으로 보면 모교인 빅토리아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죽재가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 낼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죽재가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펼친 기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과 수많은 활동에서 오는 피로로 인해, 죽재는 67세의 나이로 1984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모든 육체적 죽음이 미완을 남긴다면, 죽재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민중’이라는 말이 역사의 활력을 상징하는 말로 살아있는 한 죽재 역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그 상징이 죽을 때 죽재가 남긴 사상적 교훈도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죽재가 다음 세대에게 남긴 분부는 분명하다. 그것은 민중의 눈으로 세계를 읽고, 민중의 편에서 사상을 전개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동료 민중신학자였던 안병무의 말로 죽재가 삶으로 쓴 신학이 무엇인지를 대신한다.
[기독교 신학은] 교회의 전통적 유산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해명하라는 요구가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서남동의 눈에는 교회가 무얼 요구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민중이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였고 그것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겁니다. 한 마디로 그는 場을 옮겼던 겁니다. 교회도, 신학이라는 것도 그의 장이 아닙니다. 민중이 장이었습니다.10)
미주) 1) 김재준, “삼대 목사와 서남동의 민중신학,” 『김재준전집』제17권,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편 (한신대학 출판부, 1992), 168. 원문은 다음과 같다. “敬祝 徐南同敎授 學位受領, 謹呈 雅號曰 竹齊” 竹濟 其貌淨 其志潔 其操直 其心虛 其學博 其交敬 受難而泰 居安而學 普天之下 聞其風而 慕其德 故 八四 ? 長空 呈號曰 竹齊如是. 2) 김경재, “죽재 서남동의 신학사상,”「신학사상」46집 (1984년 가을), 513. 3) 서남동, 『전환시대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76), 7. 서남동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학예과를 마치고 신학과 1학년에 들어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학문의 엄격성을 배웠고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내 마음에 역력하다.” 4) 50년사 편찬위원회, 『한신대학 50년사 : 1940~90』(한신대학출판부, 1990), 83. 5) 김재준, “삼대 목사와 서남동의 민중신학,” 164. 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29. 「기독교사상」 201호(1975년 2월)에 발표된 이 논문에 대해서 김형효 교수가 「문학사상」4월호에서 “혼미한 시대의 진리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자, 죽재는 「기독교사상」203호(1975년 4월)에서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답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민중의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7) 채희동, 『민중ㆍ성령ㆍ생명 : 죽재 서남동의 생애와 사상』(한들, 1996), 40. 이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재의 연세대학교 동료였던 김찬국 교수의 회고를 통해 볼 때 75년 2월경으로 추정된다. 8) 박정희가 1975년 5월 13일에 대통령령으로 발표한 <긴급조치 9호>는 저항하는 시민들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서, 이 조치를 위반한 사람은 “영장 없이 구금, 압수, 수색”을 받게 되지만 (8항), 이 조치를 실행한 주무부서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13항) 근대 시민사회의 기본정신마저 위배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박정희가 죽고 난 이후에야 해제되었다. 9) 김경재,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동학사상,” 『종교다원시대의 기독교 영성』(다산글방, 1992), 325-26. 10) 안병무 등, “서남동 박사와 민중신학,” 「신학사상」46집 (1984년 가을), 534.
<기사제휴/에큐메니안 2011년 7월 19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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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2일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에서
죽재 서남동의 사상과 삶을 재조명하다
[인터뷰]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글쓴이 전동규 기자-에큐메니안
인터뷰 진행 김희헌 한신대 외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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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김재준 선생이 그에게 '죽재'로 호를 지어 준 것은, 대나무가 사시사철 올곧고 그 선이 명료하듯이,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 '신학', '은혜',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슬쩍 넘어가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유와 은사를 최선을 다해 발휘함으로써 지성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하는 신학의 내용을 100% 이해하며 이야기하는 분입니다"
전 세계 신학계로부터 한국의 대표신학으로서 인정 받는 민중신학. 이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죽재 서남동'이다. 지난달 28일, 죽재 서남동 선생 서거 27주기를 맞아 그의 제자이자 본지 고문이기도 한 숨밭 김경재 선생(한신대 명예교수)을 찾았다.
김경재 선생과 그 제자인 김희헌 본지 편집위원장(한신대 외래교수), 그리고 필자는 거실 한켠 책으로 둘러 쌓인 작은 좌식 책상 앞에 둘러 앉아 민중신학의 거목 죽재 서남동 선생을 추억했다.
이번 인터뷰는 김희헌 에큐메니안 편집위원장이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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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하는 김희헌 편집위원장과 숨밭 김경재 선생(좌측부터). ⓒ 에큐메니안 전동균 |
1. 저는 서남동 선생님을 책으로만 봤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분에 대한 선생님의 직접적인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서남동 선생님과 나는 직접적인 사제지간이었습니다. 내가 1959년도에 한신대학교에 입학해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했는데, 재학 중에 '독신학독습'이라는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서남동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수업시간에 에밀 브룬너의 책을 함께 읽곤 했는데,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이지만 바르트보다 브룬너를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바르트의 위대성에 대해서도 잘 아셨겠지만, 서남동 선생님은 지나친 계시 중심주의가 계시 실증주의 신학으로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을 가진다는 점을 보신거죠. 서남동 선생님은 철학적 신학, 이성, 삶의 실존에 기초한 조금 더 리얼한 신학을 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브룬너의 입장을 더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신학 논쟁에 있어서도 브룬너의 입장을 옹호하신 것이라 볼 수 있고요. 수업에서 브룬너의 책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서남동 선생님의 신학적 경향성이 드러난 거죠.
서 선생님은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을 무너뜨린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까지의 신학적 흐름을 이해할 때,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의 실존이 용서받고 새롭게 응답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봤습니다.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허구성, 자기기만적인 요소를 폭로한 바르트의 공을 높이 보지만, 말씀이 인간에게 부딪히는 길이 뭐냐는 것을 물을 때 그는 불트만에게서 가장 첨예한 신학적 패러다임을 본거죠. 그러니까 말씀 앞에서 제대로 응답할 때, 인간은 예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난다는 겁니다. 말씀 사건으로서의 계시 체험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그 점에 있어 바르트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이해하지 않으셨던 것 같네요. 마치 헤겔의 제자들이 헤겔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구조에 대해서 도리어 쉽게 싫증을 내듯이, 바르트의 거대한 교회교의학적 구조에 대해 큰 매력을 못 느끼신 것 같습니다.
폴 틸리히에 대한 강의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도 틸리히 이야기를 많이 하셨기 때문에 서남동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그분은 새로운 신학을 단지 ‘소개’하는 신학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이론을 소화시켜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후 그것을 알려주곤 했죠. “서양 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에서 단순히 ‘안테나’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자신이 먼저 완벽히 이해한 뒤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니까요. 그래서 현대 신학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을 그분을 통해 배울 수 있었지요.
선생님이 나오신 일본 동지사 대학이라는 곳은 종교사학이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그곳 출신들 가운데 문화종교학 분야에 집중하신 분들이 많은데, 서 선생님은 문화종교학을 배우고 졸업했으면서도, 계속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계속 추구했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서남동 선생님이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그런 현실추구의 정치적 성향이 있으셨나요? 당시 한국기독교 전반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물론, 선생님의 정치적 현실 추구는 그 당시에는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정치적 문제의식이 없었고, 한국교회가 이에 눈을 뜬 것은 1960년 4.19, 5.16 사건을 통해 충격을 받으면서부터니까요.
연세대 신학대학원에서도 서남동 선생님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내가 68년에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는데, 조직신학 교수셨던 박봉랑 선생님이 건국대로 가시는 바람에 한국신학대학에는 조직신학 교수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또 나 스스로도 서남동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보고 싶었기에 연세대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서남동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죠. 그 때 위르겐 몰트만을 처음으로 소개 받았습니다. 당시는 몰트만에 몰입을 하셨고 그 다음에 판넨베르크에 관심하셨고요. 그 후에 “3.1민주구국선언”에 참가했기 때문에 76년에 감옥에 수감되셨지요. 이미 그 전에 연세대에서는 해직되셨고, 교수로서 강의를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 서남동 선생님의 평소 성품과 학문하는 자세는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차가운 분은 아니었고, 다정다감한 분이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장공 김재준 선생이 서남동에게 '죽재'로 호를 지어 준 것은, 대나무가 사시사철 올곧고 그 선이 명료하듯이,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 '신학', '은혜',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슬쩍 넘어가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유와 은사를 최선을 다해 발휘함으로써 지성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하는 신학의 내용을 100% 이해하며 이야기하는 분입니다. 일반 다른 학문계에서도 서남동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게토'에서 나오는 말들을 하기에 다른 학문세계에서는 이해하지 못했죠. 그런 점에서 철학적 신학자로서 신학적 사유와 사고를 명료하게 채우려 했고, 현실적 삶에 뿌리를 두는 방식으로 학문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서남동 선생님은 가사에 충실한 분은 아니셨던 걸로 기억됩니다. 사모님께서 도저히 못살겠다고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웃음). 박봉랑, 문익환, 서남동, 김재준 선생님 모두 다 세상을 잘 모르고 산 사람들이죠. 그때는 한신대 교수가 근처에 있는 신일중학교 교사 봉급보다 더 적을 때였으니까요.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지만, 당시 서남동 선생님은 어떻게 '안테나' 역할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 책을 구입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죠.
사실 그 안테나라는 별명은 연세대에 계실 때 붙여진 거죠. 연대는 당시만 해도 한신대에 비해 연구비 조달 등이 훨씬 수월했으니까요. 그리고 세계의 여러 연구지를 구독하시고, 세계 학계의 새로운 지식의 물꼬가 어디로 흐르는 가를 직접 노력하며 찾아 다니셨죠. 물론 연대에 가시면서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3. 서남동 선생님이 서구현대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듯이, 그분이 가진 신학사상의 서구적 측면은 그 동안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분이 지닌 한국사상적인 면모, 즉 함석헌, 김재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서남동 선생을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스카우트하셨고, 서남동 선생님은 장공 목사님을 거의 스승으로 모셨죠. 그러니 두 분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함석헌 선생님과는 실질적으로 민중신학을 하면서 씨알사상과 깊은 상호관계를 가졌고 대담도 많이 했습니다. 씨알사상과 민중신학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준 사람들이 함석헌과 서남동인데, 조직신학자인 서남동 선생님이 그 점에서는 더 뚜렷했죠.
함석헌은 개체로서의 씨알의 완성에 중점을 뒀습니다. 그러나 서남동은 민중이 당하는 물적, 사회 정치적 피해와, 사회사적인, 실제적인 대안과 분석을 씨알에만 맡겨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즉, 보다 더 사회과학적 분석에 책임을 진 민중신학을 하려고 하셨지요.
사실 서남동 선생님은 유신체제 이전부터 이미 함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꾸준했어요. 그분 입장에서는 함석헌이나 김재준은 선생님이었죠. 그러나 서남동 선생은 아주 구체적인 신학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면 한쪽으로 치우친 발언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 시대에는 그 말을 했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저는 씨알 사상이 민중신학의 태반이 되었다고 봅니다만, 당시로서는 씨알사상이 사회분석적 측면에 조금 소홀하다는 걱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남동 선생님이 캐나다에서 57년에 귀국하신 후 민중신학을 전개하시던 때까지의 흐름을 고려할 때, 그것을 단절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학문적 여정을 거치면서 그 맥락을 이어간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유학기간 동안 이미 역사적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고민들이 있었죠. 구체적 삶, 삶의 리얼리티 등 말입니다. 서남동 선생님을 민중신학자로만 본다면, 저항신학자로서의 한 부분만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역사적 실재’를 항상 물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현실의 핵심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끊임없이 외쳐온 것입니다. 그가 여러 학문을 접하고 관심했던 것도, 단지 다른 아류 학문들을 흥미로 접한 것이 아니라, 리얼한 삶 자체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정이었던 거죠. 신학의 생동감을 위해 이리저리 몰입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서남동 선생님이 남긴 자료들 보면 통계자료 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저도 배울 때 개인적으로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웃음). 당시 저는 신학적인 언어를 더 고민하고 영성적인 연구를 하기를 바랬는데 통계수치 같은 것들을 계속 말해주니 힘들었죠.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그분의 신학을 돌이켜보면, '역사적 실재,'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가 되는 것인데, 신학도 거기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2, 3대의 민중신학 다음 세대들이 서남동 선생님의 역사적 실제에 대한 본래 화두, 즉 본래적인 관심의 동기를 놓쳐버리고 방법론적인 결과만 보니까 이상해진 것이라 봅니다.
서남동 신학의 특징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석이 많은데요. 선생님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쩌면 그분이 80년대 초반에 가졌던 관심사를 오늘날에는 재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서남동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꼽으라면, 첫째는 '역사적 실재란 무엇인가'인데, 그것을 배운 후에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니 훨씬 이해가 잘 되더군요. 둘째는, 서남동 선생님은 소위 '성서적 종교'의 맥을 가장 정확하게 이어온 분이라는 점입니다. 성서의 맥락에서 '하느님을 어디에서 만나는가?'하고 묻는다면, 자연 속에서 또는 심층심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도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고난 당하는 생명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해가 아니겠어요?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싶으면, 바로 그 고난 당하는 생명현실 속에서 만나라는 겁니다. 이런 성서적 메시지를 정확하게 던져준 진정한 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민중이 대중이 되고 다수가 되었음에도 지구상에는 민중이 아직도 있죠. 민중신학이 바라는 이상향은 민중신학이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민중신학은 앞으로도 주류신학이 될 생각을 한다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변두리, 혹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받으면서도 그 정체성을 지켜가야 하는 거죠. 지금 하나님은 한진중공업, 비정규직의 눈물, 청년실업의 신음속에 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는 곳에 민중신학이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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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은 앞으로도 주류신학이 될 생각을 한다면 안 된다. 그것은 변두리, 혹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받으면서도 그 정체성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라 말하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 에큐메니안 전동균 |
4. 70, 80년대 민중현실에 집중해서 그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하고자 하셨던 서남동 선생님께서 ‘탈신학’ 또는 ‘반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전통신학의 방법론을 유예하고자 하셨는데요. 오늘의 민중신학에서도 여전히 그런 입장이 지켜져야만 하는 것인가요? 만약 그런 모라토리엄이 끝난 시대라면, 그래서 현재 서남동 선생님이 살아계시다면 과연 신학을 어떻게 전개하셨을까요?
아마, 압도적으로 소위 ‘생태, 생명신학’일 겁니다. 당시에 선생님이 민중신학의 흐름에 쏠리지 않았다면 그 일을 더 깊이 했을 것이라는 말씀도 직접 하셨고요.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서남동 신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의 신학'입니다. 한국의 성령론자들은 서남동 선생님을 정반대로 보지만, 서남동의 신학은 '성령의 신학,' 성령중심적인 역동적인 신학이죠. 그렇기에 바람처럼 잘 안 잡힙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발전시켜야 할 과제입니다.
물론 전통신학이 바라보는 성령에 대한 이해와는 분명히 다르지만, 민중신학에서 성령에 대한 자체적인 이해가 발전되어오지 못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분의 ‘성령론적 공시적 방법론’에 담긴 신학적인 의의를 새롭게 드러내는 작업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신학을 되짚어보면, 역사적으로 소위 삼위일체적인 구도에서 삼위가 균형적으로 유지된 적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봅니다. 크게 보면, 중세기는 성부 중심적 신학이고, 종교개혁은 성자 중심적 신학이라 볼 수 있죠. 그런데 지금 개신교 신학의 해체와 더불어 새 시대를 맞이해서 우리가 불트만과 몰트만과 본회퍼를 넘어서 그리스도교적 신학의 전통을 이어오면서도 현대인들의 열정을 끌어 안을 수 있는 구조는 성령신학이라 봅니다. 그런데 성령 중심 신학이 전통적 삼위구조에 너무나 매여 있어서 우리는 얼른 납득이 안 되는데, 성령신학도 소위 범재신론적인 신학, 신론의 재정립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범재신론은 하느님의 영적 현존이 만물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 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장소에 대한 탐구가 아닙니다. 이런 범재신론을 성령론적으로 재구성을 해가야 한다고 봅니다. 서남동 선생님도 말년에 굳이 자신이 신론을 말해야 한다면 범재신론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학문적 방법론에서 볼 때, 오늘날 서남동 신학을 계승한다는 것은 그분이 69년부터 74년까지 즉 세속화 신학 이후부터 생태, 자연, 과학과 종교를 전체적으로 사유하려고 하셨던 때의 관심사를 넓은 지평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탈신학’이나 ‘반신학’이라는 말로는 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좋지 않은 표현입니다. 그 말은 당시에 서남동 선생이 자기의 처지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용어에 불과했습니다. 신학이 교계를 떠나서 별도의 학문적 지성놀음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신학이 기독교 안에서 학문할 것이라면, 반신학과 탈신학 등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죠. 그것과는 다른, 비판적이면서도 건설적인 용어정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 시대의 특수성이었던 것이고 이제는 아닌 겁니다.
서남동 신학도 그렇고 함석헌의 사상도 마찬가지인데, 과거의 유산을 정확하게 재해석해서 되살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머무르면 안되고 새로운 영역으로 걸어나가는 민중신학을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서남동 선생님의 시대에는 사회과학자들의 목소리에 훨씬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듯이, 지금은 자연과학자들의 방법에 더욱 귀를 더 기울일 때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서남동 시절에 민중의 리얼한 현실을 파악하고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화과학자들에게 배웠어야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사회과학적 방법만 가지고는 안되고, 자연과학에도 귀를 귀 기울여야 합니다. 과학과 예술과 종교, 신학의 공명이 이루어지는 그 길을 모색해가야 하는 시대인 것이지요.
과거 틸리히나 바르트, 불트만 같은 대 학자들도 과학은 사실(fact), 신학은 의미(meaning)의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서로 평행선이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그분들이 아무리 거대한 스승이라도 그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이분법으로 갈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민중신학이 한국 ‘기독교사상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종교사상사’라는 관점에서도 재평가 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신학과 지역교회와의 관계문제인데요, 그 동안 지역교회가 ‘성장’을 추구해오면서 민중신학을 도외시하는 경향을 보였고, 민중신학도 지역교회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사실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배척관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더욱 더 민중신학과 지역교회가 더욱 깊이 연결되어야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종교사상사적 의미와 ‘교회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모습을 평가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민중신학은 한국 종교사의 맥락에서 짚어보면, 불교에서 보자면 선종 라인에 해당하고, 유교에서는 주기론적인 흐름으로서 실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 안에서는 교종과 선종을 둘 다 엮어야 한다고 말하듯이, 기독교에서도 민중신학은 정통적인 신학을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소금의 역할로 공존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민중신학을 도구로 해서 교회 부흥을 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것까진 기대하지 않습니다 (웃음). 그러나 제대로 목회적 안목을 여는 목회자는 자기들이 하는 목회가 바알숭배적 종교로 전락하지 않고 성서적 신앙공동체로서의 건강함과 역동성을 유지하려면 민중신학적 요소를 반드시 같이 가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성공적으로 목회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주의 OOO 목사 같은 분은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신학적인 정신을 받아들이면서도 소위 말하는 뜨거운 성령론적, 교회부흥적인 모습을 갖춰 원주지역의 지성인들을 민중들과 함께 끌어 모아 원주에서 제일 큰 교회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민중신학을 목회자가 받아들이면 목회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민중신학을 전혀 모르던지, 그 교회를 영원히 하나의 부르주아적 집단으로 현상유지나 하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중신학적 입장에서도 제도교회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주일마다 모이는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어떻게든 공헌을 하고 그들을 보다 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구성원으로 이끌려면 거기에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부분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외과 의사가 치료 할 때, 치료할 수 있는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는 잘라내야 할 것과 치료할 수 있는 것이 공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받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거죠.
실례로, ‘한기총 해체’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기총 해체운동'이 이렇게 그냥 잦아들면 안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중에 한기총 구성원들의 일부가 다시 새롭게 목소리를 내거나 한국기독교의 대표성에 참여를 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역사적 심판으로서 지금의 한기총은 해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나와서 둘이 화해하고 '이제 됐다'하는 식으로 가면 민중신학이 그것까지 포용하며 나갈 수가 없는 거죠. 그것은 분명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준비해 간 대화가 끝난 후에도 김경재 선생과 김희헌 편집위원장은 다과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스승과 제자의 대화, 그 시대에 꼭 필요한 목소리를 만들어 낸 죽재 서남동과 그에 귀를 기울였던 그의 제자 김경재 선생의 모습도 이와 같았을지 모른다. 죽재 서남동의 신학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추억하는 이들을 통해 이어지고 새 생명을 얻는 셈이다. '답습'이 아닌 재해석과 재창조의 의미를 담은 '재조명'이야 말로 '민중이 대중이 되어 버린 시대'에 그의 이름을 다시 말하며 행하는 도리(道理)가 아닐까.
<기사제휴/에큐메니안 2011년 07월 19일 전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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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올려 주셔서 긴시간 읽어야만 했습니다.^ㅎ^
김희헌님의 서남동님의 삶의 기억과, 김경재님의 서남동님 사상과 삶의 재조명 기사 감사합니다
네, 저도 읽는 데 시간이 걸리더군요. 대신 김희헌 교수 글과 김경재 목사(현재) 대담 기사는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더군요. 한창 젊었던 70년대 초 처음 들어봤던 민중신학(그땐 기독교 신자 아니었음). 내용이고 뭐고 우리나라 신학자가 우리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흥분해서 책을 샀더랬죠. 박제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건, 그 사건을 이끄는 힘이 바로 민중이라는 안병무, 서남동 선생님들한테 얼마나 감동했었던지요. 그러다가 그후 사실 이 '자생 사상'을 저 자신 더 깊이 사랑해보지도 않았고 흐지부지 돼버렸죠. 향강 신부님께선 며칠 전 민중신학과 관련하여 '일어서보지도 못하고 스러진 신학'이라고 촌평을 하셨죠.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 김경재, 김희헌 교수도 그렇지만 민중신학의 '3세대'로 불리는 김진호 목사도 있지요. 민중신학은 이미 세계적으로 Minjung Theology로 고유명사가 됐지요. 이후에도 진행 중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또 설령 민중 이름 자체마저 바뀌고 새로운 이름을 얻더라도 사상의 샘물은 휭하니 증발하는 게 아니고 이어진다고 봅니다. 김희헌 교수 이름은 처음 들어봤는데, 저는 평소 김진호 목사님 글은 열심히 찾아 보는 편입니다. 세련, 날카롭게 글 잘 쓰시더군요. 꼭 문명비평가 같은 느낌을 많이 주시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민중신학이 쇠퇴했다는 말은 민중신학을 많이 연구하고 추종했던 학자분의 말..그 분은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요. 서남동교수는 1983년에 '민중신학의 탐구'라는 책을 출판, 나도 읽었고요. 서교수는 내가 보내준 남미해방신학 doing theology in revolutionary situation을 처음 읽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내가 서교수에게 직접 우송한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요. 안병무 교수는 저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심사 세분 교수중의 한분,신약성서 신학자입니다. (3분 심사위원들이 모두 A를 주어 그 해 논문들중에 저의 논문이 최고점).
한국의 신학수립이라는 점에서 또 주목해햐 할 것은 김정준(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장역임) 박사님의 恨의 신학...이 아닐까 새각해 봅니다. 민중신학이나 한의 신학이나 20세기의 새로운 신학동향(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등)의 영향을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시도한 연구입니다. 신학은 현실적 상황도 중요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체계와 방법론이 있어야지요. 사람마다 생각과 판단이 많이 다릅니다. 민중신학에 대한 입장도 같을 수는 없어요.
향강 신부님의 댓글 고맙습니다. 또 댓글을 볼 때마다 배우게 되니 더욱 좋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접근하고 싶습니다. 세상 어느 사상이든지 홀로 태어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성하면서 끊임없이 현실(실재)과 대화하여야만 엄밀성과 함께 실천성을 담을 수 있겠죠. 민중신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민중신학자들의 사상/학문의 모태가 된 배경도 그러하고 그 분들이 품었던 이상도 한국이란 특수에 매몰되기를 경계하셨을 줄 압니다. 또한 학문 체계와 실천론에 대한 비판에도 낯설지 않습니다. 이 점 이미 위 본문이나 대담문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든(예:김정준 박사의 한의 신학) 안병무의 민중에는 조선사람의 한이 녹아들어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자생 신학'이라고 해서 "생각과 판단이 많이 다른" 분들까지 이끌어들일 수는 없겠지요. "쇠퇴"했다는 말씀도 옳습니다. 다만 생각하여야 할 점이 있다면 두 가지. 1. "진행 중"이라고 볼 근거는 없는가. 2. 우리 신학자, 목회자들이 과연 지적 정직성(진리의 정합성, 방법론)에서 민중신학을 외면해왔는가. 이름만 열거해도 좋이 쉬흔 명은 넘을 화려한(?), 서구의 신학자들(저도 감동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담긴 지적 고뇌와 정수는 과연 얼마나 '내것'으로 체화해왔는가. 그런 생각에서 마침 좋은 기사를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