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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회 논란 일었던 카타리파와 왈도파, 무엇이 달랐나?
▲왈도파가 신학교로 사용하던 건물, 이탈리아 북부 피드몬트 산악지대. |
로마가톨릭교회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6월 22일 12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의 왈도파 교회를 찾았다. 교회의 무자비한 핍박을 받은 자들의 후손들에게나마 용서를 구할 목적이었다.
교황은 로마 교회가 피터 왈도(Waldo of Lyons, 1140-1205)와 왈도파 신앙인들을 이단자로 정죄하고 괴롭히고 처형한 과거사를 사과했다. 교회가 행한 비기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태도와 행위 그리고 부당한 처사에 유감을 표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가르침에 따라 경건하게 살면서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을 했다. 로마교회에 대한 저항이나 반대운동을 하지 않았다. 분파주의 운동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왈도와 왈도파 신앙인들을 가장 위협적인 이단으로 여겨 혐오했다.
서양의 중세는 가난한 시대였다. 서민 대중은 허기진 배를 거머쥐고 살았다. 봉건제도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살게 했다. 도시의 활발한 교역과 화폐경제의 발달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빈부의 격차를 증대시켰다.
권세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했다. 행패를 부렸다. 사회정의와 도덕성의 불꽃 심지는 극도로 낮았다. 유럽의 종교―기독교는 자기 시대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자각을 가진 자들은 교회가 영적 대책을 세워야 함을 깊이 인식했다.
그 무렵 등장한 왈도와 그 추종자들은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찾으려 했다. 재산과 명예를 포기하고 걸식(乞食)하며 유럽 전역으로 다니며 복음 진리를 설교했다.
그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노동을 제공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가난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가르쳐주었다. 가난한 자로 살면서, 복음서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사도적인 청빈의 삶을 살도록 권장했다.
왜 교회는 왈도와 왈도파를 적대시하고 이단이라 단죄했는가? 왈도파 신앙운동의 장점들이 기존 교회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체제 붕괴의 위기를 가져와서 기득권 유지 구도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의 교회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생명력이 없었고, 복음서에 부합하는 경건을 상실했다.
당시의 교회에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적 설교가 없었다. 반면, 교회는 정치권력과 성례의식, 그리고 미신적 교리에 집착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던 때, 성직자들은 사치와 방종에 빠져 시대의 요청에 역행하고 있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보여준 모습과 달랐다. 교회는 의무감 때문에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고백성사를 받아주었지만, 왈도파는 찾아가서 설교-복음 전도를 하고 죄 고백을 들어주었다. 성직자들보다 더 경건하게 살았고,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성인 숭배, 성직 제도, 성례 집행과 관련된 배타적인 태도, 감독의 배타적 사도권 주장,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성직자들의 부패, 탐욕, 말씀 빈곤 등 로마교회의 모순들을 지적하고 그것들에 항거했다.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한 까닭에 신적 영감을 중시했던 프란치스코. 그가 받은 영감이 대단히 강렬해서 새들도 그의 설교에 감화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1. 탁발 수도 운동
서방교회의 십자군 원정이 가져다 준 진취적인 분위기는 부패한 권력자들, 교황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경건한 신자들의 맥박을 고동치게 했다. 서양 세계는 11세기 말부터 긴 지적 동면에서 깨어났다. 새로운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독특한 형태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단순한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을 했다. 바로 탁발 수도사들의 등장이다. 탁발(托鉢)이란 수도사나 승려가 경문(經文)을 외우면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구걸함을 뜻한다.
탁발 전도자들의 등장과 이들이 보여준 복음전도의 열성은 교황좌를 두고 연출되는 유혈극과 성직자들의 사리사욕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 절대 다수인 시대에 거대한 부(富)를 소유했고,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했다. 성직자들은 높은 지위를 누렸다.
이러한 풍토에서 창의적 신앙의 표현들이 만개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걸맞는 형태의 수도 운동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이들을 주목하고 추종했다.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이 흐름에 이단 사조들까지 끼어들어 덩달아 기승을 부렸다.
교회의 변두리에는 복음전도와 수도사적 이상을 가진 기독인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설교와 복음전도로 이단자들을 깨우쳐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어 숲 속, 여울목, 강가에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면서 살아가기도 했다. 여행객들을 도울 수 있는 곳에 살면서 헌신 봉사했다. 성직자 세계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행동을 보여주면서 부자, 빈자, 고통받는 자들의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탁발 설교자들과 수도사들은 가난한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전도와 봉사 활동에 나섰다. 중세 봉건사회의 발전이 가져온 모순에 맞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복음전도, 청빈한 삶, 봉사, 명상을 기독인의 표지로 삼았다.
이 시대의 예술과 문학 작품은 탁발 전도자들을 단장 짚고 맨발에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실망하면서, 복음전도와 봉사활동을 하는 그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망했다.
베네딕트 수도단, 클루니 수도단, 시토 수도단은 웅장한 교회당과 화려한 수도원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갈망하던 영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교황청은 사치와 허영에 빠져 있었다.
대중이 탁발 수도사들을 환영하자, 교회와 교황청은 불안과 위기를 느끼고 탁발 전도자단, 탁발 수도사단을 각각 독립된 수도단으로 인정해 사회적 갈증을 해소시켰다. 불안 요소를 역이용했다.
▲중세 로마교회는 초대교회와 많이 달라졌다. |
중세기 기독교 수도단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제1수도단(The First Order)은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고전적 수도단이다. 제2수도단(The Second Order)은 소유를 포기하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설교를 하는 탁발 수도단이다. 제3수도단(The Third Order)은 가정에서 수도사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수도단이다.
12세기와 13세기는 탁발 수도사들의 시대였다. 걸식 수도사들은 빈곤의 삶을 살면서 구걸 활동으로 불평등하고 부도덕한 세상에 항거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막 10:25)”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굶주리고 소외되고 짓밟히는 사람들에게 빈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일을 돕고, 노동을 제공하면서 복음을 설교했고, 잠자리와 음식만 제공받았다.
탁발 설교자단, 탁발 수도단들이 생겨난 때는 봉건제도, 인구이동, 도시 교역의 확대, 화폐 경제의 발전, 산업화가 가져온 부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가난한 자들이 급증하고, 도덕적 타락이 도처에 만연하며, 성직자들이 거룩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할 때였다.
한편에서는 이단이 출현하여 기독인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영적 갈망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신앙운동의 출현을 기대, 예견하고 있었다.
왈도와 리용의 빈자들과 롬바르디의 빈자들을 뒤따라 설립된 삼위일체 수도단, 프랜시스 수도단, 도미니크 수도단, 갈멜 수도단, 어거스틴 수도단은 교황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자적으로 선교, 학문, 봉사활동을 하는 탁발 수도단들이다.
수도단은 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수도사들이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노동을 제공하고, 이단자들을 개종시키려고 설교한 것이다. 탁발 수도 운동은 용사들의 시대가 낳은 새로운 형태의 신앙고백이었다. 기존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다.
▲독일 보름스 루터 기념공원 속 피터 왈도의 동상. |
2. 피터 왈도
프랑스 남부 리용 출신 왈도는 ‘피터 왈도’라고도 불린다. 사후 150년 정도 지난 1368년경, 학자들이 혼동을 피하려고 왈도라는 이름 앞에 ‘피터’를 붙였다. 유럽인들은 ‘발도’ 또는 ‘발두스’라고 발음한다.
왈도는 도매업자로 알려진 부유한 상인이었다. 한때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요한 교회행정 직책을 맡았으며, 상당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지역사회 봉사와 교회활동을 했다.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있었다. 출생과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173년 초 어느 일요일에, 왈도는 한 음유(吟遊) 시인에게서 가난하게 살았던 수도사 알렉시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렉시스는 5세기 로마에 살았던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강했다. 결혼식 날 밤에 신부와 동침하지 않고 성지순례의 길을 떠날 정도였다.
가난이 주는 고통을 몸으로 겪으며 경건하게 살았다. 얼마 뒤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무명인으로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그의 고귀한 삶의 진가가 알려지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알렉시스의 이야기는 노래로 만들어져 애창되었다.
왈도는 알렉시스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친구이며 신학자인 어느 사제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하나님께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 신학자는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조언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하고 나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들려주었다.
왈도는 이 가르침이 자기를 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 빈곤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왈도의 친구 한 명이 갑자기 죽었다. 충격을 받은 왈도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깊은 영적 고뇌에 빠졌다.
왈도는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려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리대금 피해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돌려주었고, 재산의 일부는 딸들이 어느 수도회에 정착하는데 사용했다. 재산의 나머지 일부는 아내에게 남겨주었다.
그 무렵, 기근이 닥쳤다. 왈도는 자기의 양식과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결국 부자 왈도는 구걸하는 신세의 빈자가 되었다. 그런 왈도가 순회 설교자 사역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뒤따랐다.
왈도에게는 라틴어 해독 능력이 없었다. 왈도의 초기 사역에서 특별한 것은 성경 일부를 번역하게 한 일이다.
복음서들과 바울서신들, 그리고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시우스, 그레고리 1세의 신학 작품들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스테파누스 안사와 버나드두스 이드로스에게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달라고 했다.
왈도의 시대는 라틴어판 성경이 아닌 다른 자국어 번역 성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할 뿐 아니라 자국어 성경을 공공장소에서 읽고 강해하고 설교를 한 것은 급진적인 변화였다. 당시 교회의 방침에 역행하는 과감한 도전이었다.
왈도의 설교를 들은 많은 남녀 기독인들이 그를 존경하면서 추종했다. 1177년, 왈도의 삶을 모범삼아 따르는 무리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발적으로 복음전도자, 설교자, 봉사자로 나섰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생활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애독했다.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실천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맹세를 하지 않았다.
왈도파 신앙운동이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설교자들, 복음전도자들이 소박하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경건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왈도파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비밀리에 예배 드렸던, 알프스 계곡의 굴. ⓒ크투 DB |
자국어 성경을 가진 왈도는 곧바로 공개적인 복음전도와 설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메시지 핵심 내용은 세 가지였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성직자들이 복음 설교를 하지 않을 때, 왈도의 복음 설교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당시의 교회는 이단자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도,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둘째, 사도적인 청빈의 삶이었다. 왈도의 설교는 성직주의와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셋째, 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지적이었다.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배타적 사도권, 성직주의, 성례주의, 성인 숭배가 옳지 않다고 했다.
왈도와 추종자들이 전개한 복음적 개혁신앙 운동은 교회의 무기력함과 그릇된 유혹과 사제주의에 대한 강한 항의였다. 타락한 사제들은 자신들이 베푸는 성례와 종교적 봉사가 자신들의 삶의 행태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신행(信行) 불일치를 정당화하는 그럴듯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개발했다. “성례는 그것을 주관하는 성직자들의 공과(功過)와 상관없이 성직자들을 깨끗하게 한다.” “장미는 황제의 손에서 빛나는 것과 같이 타락한 여인의 손에서도 그러하다.”
“진주는 왕의 손에 있을 때나 농부의 손에 있을 때나 모두 아름답다.” “나의 시종이 마구간을 청소할 때 녹슨 쇠스랑을 이용하는 것은 금과 보석이 박혀 있는 갈퀴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발상은 어거스틴이 한 말의 일방적 오용이었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성직과 세례의 효용성이 개인의 순수성에 달려 있지 않고 감독 직임과 안수 예식, 곧 교회의 권위에 달려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의 성례 효용성에 대한 가르침은 정당한가? 목사이면서도 조직폭력배와 마약밀거래의 두목으로 활약하는 자가 거행하는 목사 안수례가 효용성을 지니는가?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선언한 여성 목사가 집례하는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거리낌 없이 받아먹고 마셔도 무방한가?
왈도 연구가들은 그의 삶이 사도들의 청빈한 삶과 비슷하다는 데 동의한다. 사치스런 성직자들의 삶은 빈자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성직자들에 대한 대중적 저항감은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전개한 복음전도 운동의 확산에 이바지했다.
어느 교회사가는 왈도의 설교 초점이 사도적 청빈에 맞추어져 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고 지적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의 기원을 긍정적으로 기록한다. 그들의 특징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재물 소유 포기, 성경읽기와 연구, 설교와 복음전도, 설교와 철저한 봉사의 삶이라고 한다.
왈도는 자신이 가진 프랑스어 성경을 읽고 혼신을 다해 마음으로 배웠고, 그것들을 설교했다. 대중에게 쏟아냈다.
왈도의 설교가 오늘날의 진보계 목회자들이 매진하는 ‘하나님의 선교’ 곧 인간화, 연대투쟁, 환경오염, 종교 간의 대화 같은 것들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가 이해한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좋은 소식(막 1:1)이 복음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요 3:16).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마 16:1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집에서나 성전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했다(행 5:42).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화해자이다(요 16:4; 딤전 2:4-6). 왈도가 이신칭의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왈도는 식솔을 거느리고서도 자발적 금욕생활을 하면서 설교-복음전도에 매진했다. 사도적 청빈에 대한 외침과 자발적인 실천은 대중의 환영을 끌어냈다. 그의 복음전도는 명료했고, 설득력이 있었다.
교회가 성직주의와 의식과 사제의 권위에 집착하고 있었을 때, 왈도의 복음전도 설교는 인기를 끌었다. 왈도의 설교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의 중요성,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제시한 기독인의 삶, 그리고 점차 공적, 사적으로 자신의 죄와 타인의 죄와 성직자들의 죄에 대한 비판을 함께 담아냈다.
왈도의 이례적인 열망과 활동이 교회에 당장 위협을 주지는 않았다. 갈등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평신도’의 설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교활동을 중단하라고 했다. 교회의 설교금지 압력이 강해지자, 왈도는 교회 당국의 승인을 받아 복음전도 활동을 계속하려고 시도했다.
왈도는 로마에서 열린 제3차 라테란공의회(1179)에 두 명의 대표자를 보냈다.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자신들의 전도활동과 생활방식 요청을 승인해 달라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전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교황에게 자신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선사했다.
이 공의회는 제권(帝權)에 대한 교권(敎權)의 우위성, 곧 교황 그레고리 7세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이단에게 교회 권력의 강력함을 보여주고, 성행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진멸하려고 하던 때였다.
공의회는 왈도의 요청을 거절했다. 평신도의 설교가 성직주의, 교회 계급제도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왈도는 하나님의 소명, 곧 설교와 복음전도 사역이 교회의 규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왈도는 교회의 권력과 통제와 맞섰다. 왈도 자신은 그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안인지,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건드린 것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 자료에 따르면, 왈도는 1170년 또는 1180년까지 수련기 또는 보호관찰 중에 있었다. 그가 교회가 규정한 일정한 수련을 받으면 사제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로마교회의 신자 왈도는 교황교회 조직의 우리 안에 있었다. 1368년,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왈도가 성직자라고 생각했다. 사도들 사역의 직통 계승자라고 믿었다.
▲왈도파들이 비밀리에 예배 처소로 삼았던 천연 동굴 입구. ⓒ크투 DB |
왈도가 몰고 온 복음전도와 설교활동으로 말미암아 사태가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지자, 교회는 신앙고백을 요구했다. 왈도가 서명하여 리용 공의회(1180-1181)에 제출한 ‘신앙고백문’에 나타난 왈도의 신앙고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고백하는 전통적인 교리들을 믿는다. 둘째, 생활 방식에서 ‘세상을 버렸으며’ 소유한 재산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부(富)를 멀리하며, 최소한의 양식과 의복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 것도 받지 않는다. 셋째, ‘복음서의 가르침’을 삶의 규율로 준수한다. 사도적 청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모든 조언들을 문자적으로 따른다. 넷째, 이단 카타리파 교리를 배척하고, 이단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개종시킨다.
왈도는 그 밖에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육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세례요한의 신적 소명,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육식(肉食)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내세 심판을 믿는다.
올바르게 살고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는 그 행위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 구제, 희생, 자선, 선행이 천국 입성을 돕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성모 마리아를 믿는다. “유일한 가톨릭교회,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왈도는 자신이 카타리파와 무관하며 로마교회의 일원임을 밝혔다.
위 신앙고백문은 흥미롭게도 왈도의 설교―복음전도 활동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까지도 로마교회가 평신도의 설교나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설교 행위를 강력히 금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리용 공의회를 주도한 대감독 기차드와 추기경 앙리 드 마르시가 순진하게 왈도가 이 정도 내용의 신앙고백문에 서명하면 스스로 설교―복음전도 활동은 그만두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리용의 대감독 기차드가 사망(1181/1182)하자, 로마교회와 왈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새로 부임한 대감독 캔터버리의 존은 1183년경 왈도와 추종자들을 냉대하고 리용 지역에서 내쫓았다. 교회 개혁을 압박하는 새로운 신앙 운동을 걱정하는 기득권을 가진 성직자들의 불만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왈도와 추종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설교-복음전도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회라는 조직기구의 통제 밖에서 그 일을 수행했다. 그들의 활동은 성직주의를 와해시키고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앗아갈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왈도의 결단은 중세 사회를 유지하는 종교 체제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다. 로마교회는 교계(敎階)를 절대시하고, ‘베드로의 천국 열쇠’를 앞세워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주도한 베로나공의회(1184)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단정죄 근거는 왈도와 추종자들이 로마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로마교회가 배타적인 사도적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성모독 집단이라고 비판한다는 것이었다.
왈도와 왈도파 무리가 설교, 복음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에 연연하여, 이를 금하는 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한다고 했다.
베로나 공의회의 칙서 ‘폐쇄(ad abolendam)’는 “자신들을 낮은 자(humiliati) 또는 리용의 빈자라고 일컫는 자들을 파문하며, 스스로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 교황이나 주교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 규정을 위반하는 자, 허락 없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설교를 하는 자들을 모두 단죄한다”고 했다.
이단 정죄는 소수 그룹과 다수집단 사이의 힘겨루기인 경우가 있다. 새로운 신앙운동이 기존 세력, 기존 구도에 위기를 가져 오면서 점차 확산되자, 교회의 신학자들과 사제들은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외침을 억누르려고 했다. 자신들의 그릇됨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에 대한 교회의 이단 정죄는 자신의 불의, 결함,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공교하게 구축한 비굴한 자기방어기제를 발동시킨 결과였다.
교회는 소수 집단의 가르침의 사소한 차이와 허물을 꼬집었다. 로마교회의 왈도와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는 교회가 불순한 의도로 순수한 기독인들을 박해해 온 그릇된 행습의 대표적인 예다.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에 대한 교회의 이단정죄와 파문 결정은 여러 가지 신학적 질문을 남겼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야 하는가? 교회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은 교회라는 조직체의 통제 안에서만 수행해야 하는가?
기독인의 신앙과 행위의 최종 권위는 성경인가? 아니면 교회라는 조직체의 결정인가? ‘평신도’의 설교-복음전도 활동은 불법인가? 사도적 임무 수행은 로마교회의 사제만이 할 수 있는가?
중세 후기의 교회개혁 운동,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근세기의 복음전도 운동, 세계선교 운동은 위 질문들에 대한 일련의 역사적, 신학적 답을 제공한다.
▲부시코 마스터(Boucicaut Master)가 1405년 그린 ‘1209년 카르카손에서 추방되고 있는 카타리 신자들’. |
3. 카타리파와 이원론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은 이단 카타리파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 ‘용사들의 시대’는 비평적 사고를 자극했다. 새로운 목소리를 높이고, 옛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로셀린, 피터 아벨라르, 브레시아의 아놀드와 같은 지식인들은 로마인들을 선동하여 교황권에 대항하게 했다. 샹파뉴의 농민 뢰타르는 베르튀의 주민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비정통적인 ‘복음’을 설교했다. 이탈리아의 몽포르트 지역과 밀라노에서는 도시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된 새로운 이단이 등장했다.
아벨라르의 제자인 브레시아의 아놀드와 그 추종자들이 벌인 신앙운동은 특별하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은 유럽 내륙에 견주어 봉건화가 늦게 이루어졌다. 이 지역 시민들은 봉건 영주에 대항하여 특별한 권리를 주장했다.
아놀드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토지소유를 반대했다. 토지를 소유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부와 권력으로 구성된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은 이러한 거짓 교회로부터 성례를 받지 않아야 한다.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선량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놀드는 프랑스 전역으로 다니면서 자신의 비판적 생각을 널리 보급했다. 로마로 돌아와서 교황에 대항하는 반란에 참여했다. 그의 투쟁은 40년 동안 계속되었다. 1155년에 체포되어 이단자로 정죄되고 화형 당했다.
프랑스 남부 알비젠스 지방에는 카타리파가 번성했다. 카타리파의 교리는 마니교 신념과 비슷하다. 카타리파는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토대를 둔 이단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먼저 등장한 바울당원주의(Paulicians)와 불가리아에서 유행한 보고밀주의(Bogomiles)와도 비슷하다. 페르시아 지역에서 성행한 이단 사상이 육로를 따라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중부 유럽으로 광범위하게 흘러든 것으로 보인다.
카타리파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이원론 사상에 따라, 물질을 악한 것으로 여겼다. 지상 세계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은 악신(惡神)의 작품이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영원한 힘과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양자는 모두 시간을 초월하므로 어느 한 쪽도 다른 것에 비해 우선적이지 않다. 어느 한쪽이 물리적인 힘이나 정복에 의해 기울어지지 않는다. 우월한 생명의 질에 따라 결정된다. 선을 택하는 것이 선하게 되는 길이다.
구원은 육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혼합된 상태이다. 이 상태는 악이 가져다주었다. 정경은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예언서 일부분이다.
성경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유령의 몸을 가진 천사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부활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카타리파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로마교회는 신약성경의 우화적 해석을 거절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하는 악하고 부패한 집단이다. 성례, 지옥, 연옥, 몸의 부활 교리는 그릇된 가르침이다.
카타리파는 성적인 표현을 삼갔다. 이성 간의 육체적 접촉을 피하려고 아내나 남편이 죽으면 배우자가 그 시체에 손을 대는 것조차 거부했다.
결혼을 금하고, 육류, 우유, 계란, 버터, 치즈 등 동물들의 소산들을 멀리했다. 이는 성적인 관계를 거쳐 생성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는 채식을 했다. 생선은 먹었다. 물고기가 성적인 관계를 통하지 않고 번식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는 엄격한 금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깊은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영적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철저한 윤리생활과 엄격한 자기부정의 삶을 유지했다. 그들의 거룩한 삶과 성결성은 수도사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카타리파는 신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카타리파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완전자와 아직 진리를 배우는 상태의 보통 신자로 이원화했다. 계율과 가르침이 다수 신자들에게 너무 엄격하다는 불평에 대한 조치였다.
완전자는 머리에 손을 얻고 ‘성령세례’를 받았다. 완전자는 도덕적 규율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보통 신자는 죽음에 임박한 경우에만 완전자가 지키는 계율을 지켜도 무방하다고 했다.
카타리파의 세력이 강해지고 번창하자, 여러 가지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결혼생활을 하지 않으나 함께 모여 등불을 끄고 집단 난교를 행하고, 썩은 고기를 태운 것을 성찬식에 사용하며, 이것을 먹으면 정신을 잃게 된다는 루머가 횡행했다.
카타리파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가졌다. ‘완전자들’ 조직이 감독과 사제를 뽑았다. 전통적 교회 의식이 아닌, 새로운 종교 의식을 가졌다. 성찬식은 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주기도문을 크게 낭송하는 동안 빵을 나누는 방식으로 시행했다.
카타리파는 로마교회를 거부했다. 교회 출석과 세례가 국민의 의무사항이던 시대에 살면서도,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들은 기존 체제를 약화시키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로마교회를 악의 집단으로 여기고서 세속권력과 봉건사회, 그리고 그 권력과 사회를 지도하는 교황청에 맞서 투쟁했다. 카타리파는 12세기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가까이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멀리 영국에도 퍼졌다.
이 와중에 왈도와 왈도파 신앙 운동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교회는 신종 이단들의 세력이 커지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단자들을 정죄했다. 교회가 규정하는 공식 교리를 불신하며, 교회제도를 파괴하며,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왈도와 추종자들이 교회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지 못하고 극심한 수난을 당한 까닭은, 교회가 그들을 이단 카타리파와 동일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카타리파 처형에 열성을 다했다. 십자군을 동원하여 그들을 정벌했다. 그의 노력은 지나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단박멸 과정에서 죄인, 순수한 신앙을 가진 자, 무죄한 자를 가리지 않았다. 대량 살육을 감행했다.
교회는 기존 체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는 모든 새로운 신앙운동과 사상에 과잉반응을 보였다. 이단에 대한 과잉 징벌은 인노센트의 치세가 끝난 뒤에도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카타리파가 번성하던 지역의 알비젠스인들은 왈도파 운동과 카타리파와 같은 맥락에서 희생을 당했다. 카타르인이 왈도파로 개종되어 수용된 경우도 없지 않다.
왈도파 사람들의 지속적인 전도와 가르침으로 많은 알비젠스인들이 이원론을 버리고 성경적 신앙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위그노파 후손들인 18-19세기 프랑스 개혁교회가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신앙의 선조로 수용한다고 한다.
▲종교재판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에게 화형을 집행하고 있는 그림. |
4. 종교재판의 덫
중세기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은 카타리파를 징치(懲治)하고 축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교황은 이단을 제거하고 정통신앙을 수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교구마다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세속 군주들은 교회 회의의 결정에 따라 무력을 사용하여 이단자들을 처단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는 세속군주들로 하여금 무력을 동원하여 이단자들을 탄압하도록 결정했다.
교회의 종교재판법은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제정(1184)했다. 모든 교구가 최소한 한 해에 한 번 이상 교인들을 조사하여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를 색출하게 했다. 정통신앙 고백을 의무화한 것이다. 이단자를 보호하는 사람은 불고지죄(不告知罪)의 책임을 물어 이단자와 동일한 처벌을 받게 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이단자 진멸을 결정했다. 모든 수도사들도 감독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도록 했다. 그 무렵, 로마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교회의 권력을 인정하고, 통제를 받아들이며, 교황의 정책을 영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수용함을 의미했다.
성직주의와 교황권력에 항거하는 사람은 교인이 될 수 없었다. 로마교회의 교인이 아니고서는 그 사회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서방교회는 이단자를 징벌하려고 십자군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간 십자군이 이교도들을 진멸한 것처럼, 새로운 발상을 하고 새로운 신앙형태를 가진 자국 백성들을 징치했다. 그들을 교수형, 화형에 처하거나, 팔다리를 찢었다. 불태우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다.
교회는 새로운 사상의 씨까지도 말리려고 했다. 수도사 버나드는 이단색출 정책을 강경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이단자 처형의 잔인무도함을 보고 “이단자들은 칼이 아니라 설복(說服)으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의 이단 징치 과정에서 나타난 잔혹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말해 준다.
교회의 이단박멸 시도는 강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회는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자신의 그릇된 제도와 실천을 개혁하지 않고,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교권과 힘으로 이단을 징치하려 했다.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단박멸 정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카타리파로 개종했다.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맑은 물을 찾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회는 영적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당시 교회는 살인집단이었다. 교회 자체의 모순과 이단의 급속한 확산은 교황이 통치하는 교회에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왜 교회의 이단처벌은 그토록 잔인했는가? 기독인들의 잔혹성은 도를 넘었다. 교회는 교회개혁과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타깃이 필요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흑사병마저 창궐하고 대중의 불안감이 증폭되자, 대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은 손쉬운 대중 통제 방법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사상을 말하는 남자나 이상하게 보이는 여자를 모조리 잡아다 고문했다.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확실한 증거나 근거도 없이, 개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성토했다. 사람들을 잔인하게 징치했다.
맺음말: 기득권, 힘의 논리
왈도는 창의적으로 사도 시대의 기독교를 복원하는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자기 시대의 필요를 채운 ‘위대한 이단자’였다. 복음 진리를 간파했고, 사도들처럼 소박한 삶을 살면서 이웃에게 헌신했다.
왈도의 성경 사랑과 사도적 교회 회복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시원(始原)이다. 왈도파와 카타리파의 기원과 교리는 다르다. 전자는 역사적 기독교의 후예다. 후자는 플라톤주의 이원론 사상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접목시킨 이단이다.
중세 후기 로마교회는 어리석었다. 정통과 이단 두 그룹을 하나의 목록에 함께 올렸다. 진짜 이단과 가짜 이단을 구분하지 못했다.
제도화되고 변질된 교회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소중한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영적 어두움에 빠진 성직자들은 보석과 돌덩이들을 싸잡아 이단으로 정죄했다.
교회는 상을 주어야 할 자에게 벌을 주었다. 다수의 횡포에 맞서는 소수 정통신앙 그룹을 분리주의 집단으로 매도했다. 정통과 이단은 기득권과 힘의 논리로 결정되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첫댓글 오늘은 도와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즘엔 먹을것도 살 수 없는 형편이군요
후원이 없습니다 카페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공과금도 못내고 지병인 당뇨합병증 치료받으러 병원도 가지도 못해요
후원 참여가 없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셔서 용기를 주십시요...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공과금으로
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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