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족인 의성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아들 김 석(金 錫)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 고려개국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8世 상서복야(尙書僕射) 김공우(金公祐)의 아들대(代)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9世 용비(龍庇)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내고 추성보절공신(推誠保節功臣)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고 의성군 백성들이 公의 공덕을 기리는 진민사(鎭民祠)를 세워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봉행하였다가 그후 본손(本孫)들이 인수하여 오토산(五土山) 묘하(墓下)에 묘우와 재사를 건립하여 항례하고 있는 의성김씨의 중조(中祖)이다. 2)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3) 막내 용주(龍珠)는 4대 왕조에 걸쳐 벼슬을 지냈는데 여진(女眞)의 난을 평정하여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녹훈되고 개성부사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후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으로써 명성을 날렸는데 이들 형제대인 9世에서 세계(世系)가 갈린다. 4) 고려조에서 의성김문(義城金門)을 빛낸 인물로는 9世 성단(成丹)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흥(興)이 선략장군(宣略將軍)를 지냈으며, 용비공(龍庇公)의 맏이 의(宜)가 상장군(上將軍)을, 굉(紘)이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지내고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英)이 전객시(典客寺) 판사(判事) 및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5) 또한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낸 춘(椿),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연(衍), 정의대부(正議大夫) 좌사의(左司議) 옥(玉), 영(英)의 장손(長孫)으로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지낸 광부(光富), 광부(光富) 의 아우인 이조참판 수덕(修德), 자헌대부(資憲大夫)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경복(慶復), 좌사윤(左司尹) 태권(台權),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간본(重刊本)의 발문(跋文)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던 13世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조선조에서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거익(居翼) 등이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6)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의성김씨는 조선조에 와서도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 부지기수였다.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고려조 전서(典書)를 지내고 조선조에는 좌찬성을 지낸후 우의정으로 증직되어 학림서원·옥산서원·신천서원 등에 봉향되어 있다. 내성재(內省齋) 용초(用超)는 수덕(修德)의 자(子)로서 고려조 밀직부사를 거쳐 조선조에는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았으며,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때 병조참의(兵曺參議)를 거쳐 형조·예조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의 문신으로 국운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煩里)라 불렀다고 한다. 그 외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미(湄)와 숙검(叔儉), 판교(判校)를 지낸 양중 (養中), 고려조에 판도판서를 지내고 조선때 자헌대부·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남보(南寶), 대사간(大司諫) 축(軸), 전라도관찰사·대사간·대사성 등을 두루 역임한 경조(敬祖), 안동부사를 지낸 자한(自漢), 통훈대부와 이조참의를 지낸 사언(士彦), 사헌부 집의와 군수를 지낸 세우(世瑀), 성균관 사성(司成)과 사옹원 정(正)을 역임한 익령(益齡) 등 의성김문(義城金門)을 드높인 인물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가 힘들 정도이다. 8) 조선중기에 명문(名門) 의성김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은 1478년(성종9) 참봉(參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사 학문을 닦고, 예조참의(禮曺參議) 등을 지내고 경상도·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권장하고 "벽온방", "창진방"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대사헌·대제학·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가훈(慕齋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사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하고 오산서원·임강서원·기천서원·빙계서원·설봉서원에 제향되었다. 9) 안국(安國)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글을읽고, 1509년(중종4)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관찰사로 나아가서는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고, 병조·예조·형조의 참판을 지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서절요’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문목(文穆)이라 시호하고 오산서원·임강서원·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10) 김관석(金關石)은 호(號)가 사우당(四友堂)으로 부(父)는 장사랑(將仕郞) 윤적(允迪)이다. 사우당은 효성스러운 천성과 덕망을 갖추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경향(京鄕)에 칭송되었고 사후에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는데 처음으로 성주군 수륜면 윤동(倫洞)에 터를 잡았다. 김제민(金齊閔)은 호(號)가 오봉(鰲峯)이며 당대의 명신(名臣)이었던 이 항(李 恒)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군수와 승지를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강(忠剛)의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1) 또한 청계(靑溪) 진(璡)은 사마시에 합격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을 길렀는데 아들 5형제가 모두 당대의 거유(巨儒)인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이 극일(克一)과 넷째 성일(誠一) 그리고 막내 복일(復一)은 대과에, 둘째 수일(守一)과 셋째 명일(明一)은 소과에 합격하여 세칭 5룡(五龍)집으로 칭송받았으며 진(璡)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극일(克一)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수일(守一)은 찰방(察訪),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 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고, 성일(誠一)은 호당(湖堂)에 뽑혔고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뒤 부제학(副提學)·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고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임란때는 초유사(招諭使)로 참전하여 의병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병사했다. 학봉은 사후에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임천서원·호계서원·사빈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복일(復一)은 전라도어사(全羅道御使)와 울산군수·풍기군수·창원부사 등을 지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에 제향되었 한편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칠봉(七峯) 희삼(希參)은 아들 넷 중 우홍(宇弘), 우굉(宇宏), ‘우옹’ 3형제(三兄弟)가 문과에 올라 4부자(四父子) 모두가 대과에 오른 유일한 의심김씨 집안이다. 이계(伊溪) 우홍(宇弘)은 목사(牧使)를, 개암(開巖) 우굉(宇宏)은 대사성과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상주의 속수서원에 제향되었다. 특히 동강(東岡) ‘우옹’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문하의 대유학자로 전라감사·안동부사·이조참판·병조참판·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한 청백리(淸白吏)였는데 사후에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대가면 옥화리에 동강신도비가 있으며 청천서원·회령서원에 배향되었다. 서계(西溪) 담수(聃壽)는 사마시에 합격한 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은 유학자였으며 이에 조정에서 ‘황계처사’를 내렸고 사후에 청천서원·낙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충강공 제민(齊閔)의 손자인 지수(地粹)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고매한 인품으로 명망을 얻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며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수찬(修撰)을 지낸 여건(汝鍵), 대사간과 대사성을 지낸 방걸(邦杰), 군수·부사·목사·병조참의를 역임하고 임호서원에 배향된 용(涌), 동강(東岡)의 손자로 군수·도호부사를 지낸 사월당(沙月堂) 욱(頊), 외직으로 부사·목사를 내직으로 도승지·참판 등 4朝에서 참판을 지낸 의성김씨의 대표적 관료였던 ‘빈’ 강원도관찰사·대사성을 지내고 후손에서 문과급제자 19명이 배출된 팔오헌(八吾軒) 성구(聲久), 승지·호조참판을 역임한 택수(宅洙), 관찰사를 지낸 한동(翰東), 경상도사를 지낸 직(直), 부사·병조참판 희주(熙周), 임진왜란시 의병장이었던 사봉(沙峯) 천택(天澤) 등도 의성김문을 더욱 빛낸 인물들이였으며, 동학의 3장두였던 김도삼 역시 의성김씨의 기개를 드높인 인물이다. 13) 한말(韓末)에 영수(永銖)는 군수와 경주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로 재임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때 “북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상(國文學上)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진형(鎭衡) 및 예조참판 사굉(士宏)과, 동강(東岡)의 12대손으로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우옹-이진상-곽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하였고 50여년동안 1,000여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였으며 2000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건립된 도양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는 중재(重齋) 황(榥) 등이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의성김씨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지사·열사·의사는 단일성씨 중에서 가장 많았다.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인 서산(西山) 흥락(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과 학문에만 전력하여 707명의 문인을 배출했으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을 총지휘한 애국지사로 후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도화(道和)는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을미사변에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제천의 유인석·서상설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과 싸웠고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해운당(海雲堂) 하락(河洛)은 의병대장으로 위훈을 세우고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또한 항일애국활동으로 기개를 떨쳤던 원식(元植)은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일송(一松) 동삼(東三)은 경술국치후 이상룡(李相龍)과 더불어 만주에서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척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을 역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으며 해방 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특히 심산(心山) 창숙(昌淑)은 동강(東岡)의 13대 주손인데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사도실) 출생으로 한국의 대유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후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수감생활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대만의 ‘손 문’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7년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전국유도회(全國儒道會)를 조직하여 회장 및 성균관장을 지냈으며,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고 그 뒤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냈다. 6·25전쟁 후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 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卒한후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는 한편 성주군청 바로 옆 심산기념관을 세워 공덕을 되새기고 있다. 의성김씨에서는 조선조에 96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김씨씨족 중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광산김씨(光山金氏)·연안김씨(延安金氏)·김해김씨(金海金氏)·청풍김씨(淸風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이며, 봉군(封君)이 7명, 시호(諡號)를 받은 이가 13명, 문형(文衡)과 호당(湖堂)이 각 5명, 청백리(淸白吏)가 3명으로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렸다. 15) 첨사공파(詹事公派)는 김용비(金龍庇)의 아들로서 상장군을 지내고 복야(僕射)로 추봉된 10世 의(宜)의 후손이 복야공파(僕射公派)로 불리는데 고령과 안동을 비롯해 영천·포항·군위·김해·부여·청원·청양·보령·고창·정읍·수원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으며, 그 후손중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송암(松菴) 김 면(金 沔)장군이 충절(忠節)으로 가문을 빛냈다. 의(宜)의 아우로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에 봉해진 굉(紘)의 후손은 부원군파(府院君派)로 불리는데 장성·강진·해남·광주·충주 등 각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수사공(守司空) 김용필(金龍弼)의 아들인 윤관(允寬)의 후손들은 주로 북쪽에 많이 살고 있으며, 충의공(忠毅公) 김용주(金龍珠)의 후손들은 개성(開城)에서 살다가 충북 옥천 등지로 옮겨와 세거하고 있다. 김성단(金成丹)의 후손인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는 선대부터 세거해온 의성에 많이 살고 있고, 김 흥(金 興)의 후손인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는 합천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의성김씨의 지파(支派)는 수십개로 나누어지는데 경북지역 특히 성주지역에 거주하는 후손들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첨사(諂事)를 지낸 9世 내성재(內省齋) 용비(龍庇)의 아들이자 찬성사를 지낸 영(英)의 후손인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는 일부가 13世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의 대(代)부터 성주군 대가면(안터)에 입향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수륜면 수륜리(윤동), 대가면 옥성리(안터) 및 칠봉리(사도실), 초전면 자양리(내동), 용암면 마월리(마천)과 덕평리(위동), 성주읍 용산리(조지뫼)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선무랑 군자감주부(宣務郞 軍資監主簿)을 지낸 천설(天渫)의 후손은 계봉공파(溪峯公派)로 대가면 용성리(안터)를 중심으로 거주하는데 계봉공(溪峯公)의 증손(曾孫)인 중남(重南)은 대과합격후 지방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중남(重南)의 아들인 원명(遠鳴)역시 대과급제후 지리학박사(地理學博士) 등을 역임했다. 사우당(四友堂)의 차자(次子)인 19世 담년(聃年)은 호(號)가 계와(溪窩)이며 장사랑(將仕郞)를 지냈다. 계와(溪窩)의 아들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신헌(新軒) 천흡(天洽)으로서 그 후손들은 수륜면(윤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신헌공파(新軒公派)로 불린다. 17) 사우당(四友堂)의 삼자(三子)인 담수(聃壽)는 사마시에 합격한 학자로 청천서원·낙암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호(號)는 서계(西溪)이다. 서계(西溪)는 아들 사형제를 두었는데, 이조정랑을 지낸 장자(長子) 정용(廷龍)의 후손이 월담공파(月潭公派)로 상주시에 살고 있고, 차자(次子) 정헌(廷獻)의 후손이 동원공파(東園公派)로 역시 상주시에 살며, 통덕랑을 지낸 삼자(三子) 정계(廷契)의 후손은 낙청공파(洛淸公派)로 수륜면(윤동)과 상주에 거주하며, 성균관 생원을 지낸 사자(四子) 정견(廷堅)의 후손은 국원공파(菊園公派)로 상주시에 살고 있다. 사우당(四友堂)의 사자(四子)인 담기(聃祺)는 호(號)가 서암(西庵)으로 성균생원을 지낸 거유(巨儒)였다. 서암(西庵)의 아들로 학자였던 정직(廷稷)의 후손들은 수륜면(윤동)과 김천시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원암공파(圓庵公派)로 불리운다. 또한 16世 교위(副尉) 계손(季孫)은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그의 증손(曾孫)인 칠봉(七峯) 희삼(希參)은 사자(四子)를 두었는데, 장자(長子)로 목사를 역임한 이계(伊溪) 우홍(宇弘)의 후손은 밀양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이계공파(伊溪公派)라고 불린다. 한편 계손(季孫)의 현손(玄孫)인 우영(宇英)의 후손들은 회산공파(晦山公派) 또는 성암공파(省庵公派)라고 불리우는데 성주군 초전면 자양리(내동)에 살고 있으며, 우철(宇哲)의 후손들은 통정공파(通政公派)라고 하는데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위동)에 거주하고 있다. 이외 16世 부사직(副司直) 중손(仲孫)의 후손들은 영천시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백암공파(栢巖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통정공파(通政公派) 등으로 나눠진다. 윤손(允孫)의 후손들은 김천시에 주로 세거하고 있는데 관란제파(觀瀾齊派) 등으로 불린다. 한편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는 이자(二子)를 두었는데, 장자(長子)인 화(和)는 생원·진사를 지냈고, 수사(水使)를 지낸 차자(次子) 감(鑑)은 그 후손들이 성주군(성주읍·용암면)과 고령군 일대, 달성군 현풍군 및 칠곡군 석적면 등에 많이 살고 있으며 수사공파(水使公派)로 불리운다. 18) 의성김씨 대종회 회장은 중앙정보부장·국회의원·무임소장관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씨이며, 성주군 종친회장은 김기대(金基大) 현 경상북도 도의원이다. 현대에서도 국회의원을 역임한 창환(昌煥)·종학(鍾學)·길홍(吉弘)·화남(和男)·충수(忠洙)·명윤(命潤) 등과 전 환경부장관 중위(重緯), 전 문화부차관 도현(道鉉), 전 현대건설회장으로 문화일보 사장인 정국(正國), 전 포항공대총장 호길(浩吉), 전 대구시의회의장으로 금복그룹 회장인 홍식(泓殖), 삼보컴퓨터 부회장 종길(鍾吉), 국회의원 희선(希宣), 청와대비서실 정책실장 병준(秉準),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용대(龍大) 등이 의성김씨를 명문임을 다시한번 각인시켜 놓았다. ※ 엮은이 : 이 재 필 1) 시조공 김 석(金 錫)은 김알지의 28대손이다. 시조공은 경순왕의 4子설과 5子설이 있다.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의성김씨 세보(世譜)인 병신보(丙申譜, 1656)이후 수차의 족보간행시에 문중의 석학거유가 한결같이 4子설을 따랐으며 또 경주김씨 계림군파 창세보·언양김씨 정해보·선산김씨 기축보 등에서도 4子설을 따랐으니 이를 부정할 명확한 증거가 없어 선조의 뜻을 따르고 있다. 즉 경순왕은 9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마의타자로 무후(無後)했으며 나머지 8子는 각 지역에 봉군(封君)되어 관향의 시조가 되었는데 사자(四子)인 석(錫)은 의성군(義城君)으로 의성김씨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 시조공의 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인 신란공주 일명 낙랑공주이다. / 의성(義城)은 경북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는 소문국(召文國)이었다. 그후 신라때 문소군(聞韶郡)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의성부(義城府)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895년 의성군(義城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2) 상서복야는 나라안의 온갖 정무를 나누어 맡은 육부를 총괄하는 관청의 정2품직으로 현대의 국무조정실장급 / 금자광록대부는 종2품직으로 차관보급 / 태자첨사는 왕세자의 일을 담당하는 관청의 3품직으로 관리관급 3) 은자광록대부는 정3품 관리관급 / 수사공은 고려조 삼공(三公)의 하나인 정1품으로 총리급 4) 개성부사는 관리관급 이상 / 평장사란 문하부의 정2품직인 장관급으로 내사시랑평장사-문하시랑평장사-첨의시랑찬성사-첨의찬성사-문하시랑찬성사-문하찬성사 라고도 한다. / 9世 용주가 개성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개성으로 써왔으나 1865년(고종2)에 특령으로 일부가 의성김씨로 환본되었다. 5) 선략장군은 종4품 무관직으로 영관급 장교 / 상장군은 정3품 장성급으로 대장군 바로 위 / 전객시는 예빈시-예빈성이라고도 한다. 왕손을 가르치는 일 또는 외국사신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판사는 전객시의 우두머리인 정3품직 / 삼중대광은 정1품직으로 국무총리급 6) 문하시중은 종1품으로 정승-도첨의시중 등으로도 불리었다. / 정의대부는 정3품이며, 좌사의는 중서문하성의 3∼4품의 관리관급 / 자헌대부는 정2품 장관급 / 유수는 개성·강화·수원·광주 등 서울을 지키는데 유리한 4곳에 두었던 정3품직이다. 유수는 한곳에 정원이 2명으로 하나는 경기도 관찰사가 겸임한다. 개성과 강화유수는 종2품 차관급 / 도순문사는 정3품직으로 전주·광주·평양·의주·경주·함흥 등 6곳에 두고 그 도의 우두머리가 겸임하는데 절제사라고도 한다. / 좌사윤은 고려조 왕비나 궁주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의 정3품직 / 전서는 상서 -판서로도 불리운 장관급 / 정당문학은 문하부의 2품직인 장·차관급 7) 대사간은 정3품으로 현대의 관리관∼차관보급 / 대제학은 홍문관·예문관의 2품직으로 장·차관급 / 좌찬성은 의정부에 속한 종1품직으로 부총리급 / 밀직부사는 추밀원부사라고도 하는데 궁궐의 호위와 군사기무를 맡은 관청의 종2품으로 청와대 경호실장과 기무사령관에 비유 / 참의는 관리관∼차관보급 / 참판은 장·차관급 / 대사헌은 검찰총장 및 감사원장급 / 목사는 관리관∼차관보급 / 판결사는 노비문서와 노비문제에 대한 소송을 맡은 관청인 장례원의 우두머리인 정3품으로 현대의 법원지원장 또는 지법원장에 비유 / 청송부사는 이사관∼관리관급 / 홍문관교리는 정5품으로 서기관급 이상 / 대사성은 유학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3품직 8) 직제학은 예문관의 정3품직으로 관리관급 / 판교는 외교관계에 관한 문서를 맡았던 승문원의 차관급 / 판도판서는 고려조 정3품직이지만 현대의 장·차관급 / 전라도관찰사는 전라도지사에 해당 / 통훈대부는 정3품직의 관리관급 / 사헌부집의는 종3품으로 현대의 법무부 검찰국장 이상에 비유 / 군수는 현대의 부이사관급 / 성균관 사성은 종3품으로 현대의 서울시부교육감에 비유 / 사옹원정은 궁궐의 식료품을 맡은 관청인 사옹원의 정3품으로 관리관급∼차관보급 9) 벽온방은 의관 김순몽·유영정·박세거 등이 엮은 의서이며, 창진방은 세조때 임원준이 쓴 전염병을 논한 의약서이다. 10) 호당은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을 말하는데 그 당시 문신들에겐 대단한 영광과 명예였다. 11) 장사랑은 현대의 서기보에 해당 / 이 항은 조선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성주이며 호는 일재(一齋)이다. 군수로 나갔다가 사퇴하고 그 후 학문강론에만 힘쓴 성리학의 대가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안산서원에 배향한다. / 승지는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가 있으며 정3품직이지만 현대의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12) 내자시정은 궁궐의 식료품과 천 등을 관할하는 관청의 정3품직 우두머리 / 찰방은 현대의 왜관역장급 정도 / 정언은 사무관∼서기관급 / 서장관이란 외국에 나가는 사신 가운데서 일체의 문서기록 및 그 처리에 관한 일을 맡는다. / 초유사는 나라의 난리가 났을때 이를 평정하고자 백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된 벼슬 / 학봉 김성일은 사헌부장령으로 일하면서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고, ‘풍신수길’이 보낸 현소·평의지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등과 일본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의견대립을 보였는데, 학봉은 풍신수길은 일본의 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학봉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왜란초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즉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후손들에 의해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13) 수찬은 홍문관의 5품직 서기관급 / 경상도사는 5품직으로 관찰사 다음가는 벼슬 / 김도삼은 갑오농민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893년 11월에 전봉준·정익서 등과 함께 조세감면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했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구속하고 형벌에 처해져 옥고를 치르니 3장두라 하였다. 14) 유치명은 조선후기 문신·학자로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정재(定齋)이다. 대사간·병조참판·가의대부를 역임하였고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 성리학의 거두이다. / 의금부도사는 처음에는 5품이었으나 이후 그 아랫품계를 10여명 더 두었다. 15) 의성김씨 문중에서 봉군(封君)된 이는 석(錫), 용비(龍庇), 용필(龍弼), 용주(龍珠), 굉(紘), 영렬(英烈), 광부(光富)이다. / 시호(諡號)를 받은 이는 용주(龍珠)-충의공(忠毅公), 영렬(英烈)-양소공(襄昭公), 용초(用超)-문절공(文節公), 원(源)-문원공(文元公), 남보(南寶)-문민공(文敏公), 제민(齊閔)-문강공(忠剛公), 안국(安國)-문경공(文敬公), 정국(正國)-문목공(文穆公), 성일(誠一)-문충공(文忠公), 우옹-문정공(文貞公), 지수(地粹)-정민공(貞敏公), 덕선(德善)-문민공(文敏公), 응택(應澤)-문절공(文節公)이다. 16) 부사직은 오위에 소속된 종5품직으로 서기관급 / 부위는 위관급 장교 / 사봉 김천택은 윤동출생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가야산 북쪽 기슭에 사봉정사를 세워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란시에는 아버지를 두 아들에게 의탁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홍의장군 곽재우와 더불어 화왕산성을 지키다 전사했다. 그의 유명한 시조 한수가 있다. “잘가노라 닫지말며 못가노라 쉬지마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곧하면 아니감만 못하니라” / 선무랑 군자감주부는 6품으로 사무관급 / 계봉공(溪峯公)의 증손(曾孫)인 중남(重南)은 광주인(廣州人)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의 사위이다. 석담은 대유학자로서 경북 문화재자료 제117호인 사양서당 경회당(景晦堂)에 제향되어 있다. / 좌부장은 오위 또는 포도청의 6품직인 위관급 장교 17) 통덕랑은 5품직으로 서기관급 18) 수사는 2품직으로 수군절도사라고도 하는데 현대의 해군중장급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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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쪼구랑별 원문보기 글쓴이: 金度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