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70주년특집 9부작
박경석
한국전쟁문학협회 회장
국제PEN 한국본부 고문
제2부. 국군 수뇌부의 결정적 실책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극동에 형성될 국제간의 역학관계를 미국 나름대로 전망한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미국은 전후 동북아시아에 등장할 세력을 통일된 중국과 대일 참전의 대가로 많은 이권을 확보하게 된 소련 그리고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여 이를 거점으로 한 미국 등 3대국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같이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어디까지나 강대국 내지는 국제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한반도를 독점하려는 소련의 전략적 음모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미국은 동북 아시아 지역을 하나의 정책 대상으로 하되 한반도 문제는 부차적 정책으로 뒤로하고 그 주변 열강들의 이해와 역학관계만을 고려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따라서 한반도는 미국의 정책상 결정적 비중을 두는 주요지역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의 부차적 고려사항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중국 대륙이 모택동의 공산정권에 의하여 통일된 이후 미국은 한반도를 안 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일본 열도만을 의식하는 전략으로 바꾸면서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기에 이르렀다.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이후,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남한과 북한간의 군사적인 불균형과 현저한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증강과 군사 원조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미국은 당시 불확실한 정세와 부정확한 정부판단으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군을 증강하면 북진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워싱턴 당국자가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하여 신성모 국방 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쳐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자충수(自充手)를 두고 있는 꼴이었다. 미국은 이리하여 도전적 한국정부의 돌발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공군기는 물론 전차나 야포 등 주요 군사장비를 일체 제공 하지않았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의 대륙장악 이후 미국은 동북 아시아에 있어서 소련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문제에 대한 불간섭원칙을 견지하고 조속히 대 일본 강화를 실현시켜 유리한 대 소련관계를 확보함으로써 일본열도를 미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하여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와같이 중국문제에 대한 불간섭과 일본열도의 확보라는 전략개념하에 설정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마침내 1950년 1월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에 의한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선언에 의하여 윤곽이 드러났다.
이 선언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으로 밀려나자,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3자의 야합은 급속도로 성숙되어 갔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군부의 수뇌들은 그 사태에 적극 대처하지 않고 향락, 부정부패,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돈을 자초하고 있었다.
1950년 초부터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여러 요로에서 포착되었다. 북한 당국이 남파한 무장간첩들이 체포되고 인민군 귀순병에 의해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더 확실해 졌지만, 미국 정부나 극동 미군사령부조차도 그 정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측의 엄살이거나 북침 준비를 위한 음모쯤으로 평가절하하였다.
전쟁발발 보름 전에 현장 확인차 특사 자격으로 미 국무성 고문 덜레스가 방한하였다. 그는 전선을 돌아보고 한국군 수뇌와의 회담을 마친 다음, 한반도에서의 "전쟁의 징후는 없다" 고 결론을 내린 뒤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물론 덜레스 특사는 본국에 돌아가 "전쟁의 징후는 없다" 고 보고하는 한편, 한술 더 떠 "한국군의 방어태세는 완벽하다" 고 덧붙였다.
5월10일,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신기자와의 회견석상에서 "지금 항간에는 5, 6월 위기설이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군은 실지회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즉각 북진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덜레스는 신성모의 말을 확인한 결과가 된 것이다. 외신기자들은 즉각 본국에 타전하여 "한국군 북진준비 완료" 를 알렸다. 그리하여 북한 정보에 캄캄했던 미 극동군 사령부나 워싱턴 당국은 북한군의 남침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군의 북진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 해프닝 외에도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얼마던지 있었다. 남북 교역 명태사건으로 파면되었던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이 1950년 4월10일에 다시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부임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군의 동태에 대한 정보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북한에서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마지막 작전회의를 개최하는 6월10일에 전방부대 주요 지휘관과 육군본부 참모진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전방에 배치한 제1사단, 제7사단, 제6사단, 제8사단 가운데 제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을 제외한 3개사단장이 경질되었다. 또한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자인 강문봉 작전국장을 대기 발령하고 장창국 대령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 일련의 인사이동은 실로 큰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6월13일부터 20일 사이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전방 사단의 2개 연대를 예속 변경했다. 이런 실책 외에도 부대 이동에 앞선 3월에는 노후화된 차량을 정비한다는 구실로 총 보유차량의 35%에 해당하는 526대를 회수하여 사용할 수 없게 한강이북에 묶어두었다. 이어서 M1소총을 제외하고 공용화기 일체를 정비한다는 구실로 각 전투부대 보유 공용화기의 약 30%를 부평 병기창에 입고 시켰다. 6월18일에는 전쟁 발발시 소총중대와 보병대대에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5만분지 1 축척의 전술지도 전량이 무조건 회수되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조치는 이적행위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이적 행위가 우연한 사무착오에 따른 것이었을까. 더욱 의구심은 증폭된다. 6월 위기설에 대비하여 4월 중순부터 계속된 경계 및 비상사태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북한군 공격개시 불과 28시간전인 6월23일 24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농번기 휴가로 부대가 병력이 부족하여 썰렁한 마당에 육군본부는 다시 6월24일 토요일을 기하여 외출 외박 실시를 지시했다.
이날밤, 육군본부에서는 장교구락부 개설 축하 파티를 열어 군 수뇌와 미 고문관이 자정이 넘도록 댄스파티를 열어 주연에 빠져 있었다. 불과 몇시간 후면 들이닥칠 사상 미증유의 국난에 직면할 이 위급한 시긴에 군 수뇌와 이들을 지원할 미 고문관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을 시작했는데도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오전 11시까지 연락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개성 북방의 제1사단은 불과 5시간만에 개성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고 후퇴중이었지만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열거한 일련의 이적행위를 잘 살핀다면, 누구인가 적과 내통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즉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그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두 장본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지금의 남북 대치상황에서는 이 의문을 풀 수 없다. 그러나 먼 훗날 남북이 통일된다면, 그때 북한 당국과의 내통여부가 밝혀질 것이다.
북쪽 깊숙한 비밀 금고에는 그것들 외에 더 깜짝 놀랄 만한 비밀문서가 쌓여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놀라운 사실이 전쟁이 끝난 뒤 근대에 와서도 이어졌다. 그것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라는 대한민국 국군사를 편찬하는 공식기구에서 벌어진 것이다.
채병덕과 친근한 관계인 일본의 괴뢰국 만주군 출신 백선엽 예비역 장군이 국방장관에게 자청 스스로 그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란 직제에도 없는 자리에 앉아 대대적인 6.25전쟁사를 다시 편찬하고 있는데 채병덕과 관계되는 민감한 부분은 모두 빼버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백선엽 자문위원장은 채병덕의 최 측근이었던 일본군 항공병 출신인 손희선 예비역 소장과 야합하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공식 간행물인 [채병덕 장군 평전]을 간행했다.
그 평전에는 위에서 지적한 채병덕의 이적행위 하나하나를 변명하거나 감싸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6.25전쟁사를 간행할 당시 필자는 백선엽 자문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오찬에 참석한 바 있었는데 가장 민감한 부분인 6.25전쟁사 1권과 2권에 '박경석 전우신문 회장' '박경석 군사평론가협회 회장' 의 직함으로 자문위원이라고 전쟁사 말미에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자문을 의뢰 받은바 없었으며 1권과 2권 내용과 무관함을 이 글에서 밝힌다.
왜 백선엽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은 채병덕을 비롯한 당사자의 이적행위를 감싸고 그를 위해 전사까지 왜곡하려는지 엄숙히 묻는다.
채병덕 육군총참모장과 신성모 국방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