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주로 휴가를 어디로 떠나십니까?
도시를 벗어나 시외로???.
언젠가부터 ‘그것만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보니 그 도시의 역사와 이야기는 다 시내에 그것도 골목이 있더군요
근대 기화기를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지난 토요일 오전 대구시 중구 근대골목 투어에 나셨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은 개화기의 문화향취가 가장 잘 살아 있다는 4개의 투어 길 중 제2길(계산동 일대 투어길)을 선택 하였습니다.
출발지는 지금은 동산병원 부속 동산으로 활용되고 있는 청라언덕입니다.
아래 돌계단을 따라 청라언덕을 올랐습니다.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에 모여 만세운동을 하였다 하여 3.1 운동길이라고도 부릅니다.
드디어 청라 언덕 입니다.
대구의 몽마르떼 언덕이라고 할만한 언덕이지요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생각’노래에 나오는 바로 그 청라언덕입니다.
이 언덕엔 제중원이 확대된 동산병원과 대구 최초의 교회 제일교회(1902년 설립)가 서 있습니다.
고색 찬란한 벽돌집과 푸른 잔디, 아름다운 정원이 잘 가꾸어진 곳입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질 것 같은 정원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 애절한 가사뒤엔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태준은 여기서 약1.5키로 떨어진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이 청라언덕에 세워진 제일교회를 다녔고 이 교회에서 피아노를 쳤다고 하지요.
이 교회엔 이 언덕 바로 아래에 있는 신명여학교 여학생도 다녔다고 합니다.
백합처럼 청초하고 어여쁜 여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박태준은 그 여학생을 짝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성적인 박태준은 고백을 못 하였다고 합니다.
졸업 후 그 여학생은 일본 유학을 떠났고.
그 여학생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박태준은 그 여학생을 못 잊어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박태준은 대학을 졸업하고 마산창신고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 학교엔 노상 이은상이 국어교사로 있었고 박태준과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박태준은 그 첫사랑을 이야기 하였고 그 박태준의 사랑이 하도 고귀하여 이은상은 시를 썼다고 합니다.
곡은 박태준이 븥였고요
처음엔 思友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나중에 동무생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어떤 감회에 젖습니까?
저에게 압권은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는 구절 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드라도 네가 내게서 피어 날 님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바로 박태준이 다녔다는 제일교회입니다
그 언덕을 내려와 길을 건너면 만나는 곳이 계산성당입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지요.
김대건 신부는 물론 김수환추기졍이 서품을 받은 곳이라고 합니다.
이 성당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때는 전쟁이 한참 중인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당시 대구시장 허억이 주례를 섰다고 하지요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고 하여
하객들이 박장대소를 하였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신랑 보다 키가 커
조금이라도 키를 낮추려고 하는 신부를
더욱 당황케 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결혼식을 올리면서 벌어진 에피소드 하나.
신랑이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주려 할 때,
신랑 주머니에 있던 반지가 없어져 한때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신랑의 다른 주머니에서 겨우 찾아내어 식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대구시 삼덕동에 신혼살림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전황이 긴박해지자
박정희는 신혼 5일만에 강원도 전선으로 투입됐다고 합니다.
육영수가 살았다면 박정희의 최후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텐데..
육영수의 영구 차량을 배웅하고 돌아가는 박정희대통령의 쓸쓸한 뒷모습이 생각납니다.
도대체 부부란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골목 투어입니다
첫 골목에서 만난 집이 이상화고택입니다
상화하면 바로 나오지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개벽>(1926
시에 나오는 들은 지금은 화려한 먹자골목이 된 수성들이라고 하지요
봄을 맞아 그 봄을 즐길 수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가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시를 읆조리면서 이상화고택을 향합니다
초입 담장에 이상화를 형상화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상화 고택 바로 옆에 대구 출신 문인 미술가 음악인들의 자료를 모아둔 大邱藝家입니다
바로 옆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고택이 있습니다.
나라 빛을 갚기 위해 남자는 금연, 금주 운동을, 여자는 절약, 특히 기생은
금반지, 금목걸이를 내 놓았다고 하지요.
98년 IMF 금모으기 운동이 보상을 받고 내 놓은 것이라면 이 국채보상운동은 자기재산을 그냥 공짜로 내 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순도가 높은 오늘날 시민운동의 효시라는 것 입니다.
또 한골목을 돌아 나오면 만나는 곳이 한약냄새가 진동하는 대구약령시장입니다
그 약령시장 가장자리에 아담한 목공소가 있어 한컷 하였습니다
일반 가정엔 이런저런 목공관련 연장들이 없는 점을 감안하여
이 주민목공소를 열었다고 합니다.
대구시민이면 누구나 와서 공짜로 목공예를 제작할 수 있다고 하내요
참으로 훈훈한 골목 입니다.
삼성옛터가 복원되었다 하여
약령시장에서 약 2키로 떨어진 달성공원 앞 삼성상회의 옛터를 찾았습니다.
호암 이병철회장의 꿈이 담겨진 곳,
호암은 1938년부터 이곳에서 4층짜리 목조건물을 짓고
2-4층에서는 제분공장과 1층에서는 상회를 운영하였다고 합니다.
이 상회가 지금은 세게 제일의 회사로 발전하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보면 한국 자본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의미 있는 장소인 거 같아요.
한국자본주의 역사에 의미 있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대구사람인데...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네요...감사합니다
와 여기서 뵈니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동산병원 안에 보시면 의료 박물관도 있어요 대한민국 근대사의 귀한 사진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에 청라언덕길과 붙어 있어요 이동네가 제가 근무하는 곳 입니다
보고 또 봐야 겠어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스토리가 전해져요.
먹구름님은 표현력이 특별하신 분이시구나 또 다시 느껴요.
알토랑같은 여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