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프레이리 – 말의 해방적 기능
한글날이다.
한글은 아름답다. 창제원리를 보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재를 모음 구성 원리로 삼아 우주적 사유를 보여줬고, 발음기관의 생김새를 본따 자음을 제작하는 과학적 태도를 보여줬다. 그리고 음양의 조화처럼 자모를 조합하여 모든 언어의 말소리를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한글의 위대함은 그것이 지배계급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라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의 자유와 해방이 원래 세종의 의도였다고 말할 순 없을지라도 잠재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그렇게 민주적인 말의 씨앗을 뿌렸다.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롭게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동기는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서였다. 홍익인간의 덕치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자는 철저히 지배계급의 문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통치의 문자였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당연히 소외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억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세종이 쉬운 문자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표면적으로 사대를 표방하는 나라로서 한자 외의 문자를 만들어 쓰는 것이 중국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지식에 대한 독점권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백성들이 똑똑해지면 지배하고 착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종이라고 그것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더 백성이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역사는 세종의 바람대로 흘렀다. 이제 한글은 모두가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문자가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했던 정신은 바로 민주주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은 김용옥 선생이 말했든 철저한 민본주의자다.
현대는 어떤가? 우리는 한자어와 일본어와 영어 등 외국어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한글이라고 볼 수 없다. 세계화된 시대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도 있지만, 언어를 권력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점을 생각할 때, 민주적 가치에 합당한 쉬운 말 사용에 대한 의식이 너무 적어졌다.
의학, 법학 등 전문영역의 언어들은 더 어려워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다. 한편으로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보다 sns 속 채팅이 더욱 익숙해지면서, 활자시대의 안정된 문장 구조와 단어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조합과 단축으로 진화하고 있다. 온통 잡담투성이가 되어버린 언어 속에서 과연 참과 거짓도 모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수많은 언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확성기를 쥔 자들이 언어를 독점하고 권력을 쥐는 것도 쉬워졌다.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 시대에 우리는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학교도 관료화되어 확성기 기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문해교육을 통해 해방의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던 프레이리를 거듭 생각한다. 과연 해방의 언어가 가능할까?
말은 근본적으로 거짓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실제를 지시하는 기호지 실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실제에 대해 관심을 끊는다면 온통 거짓투성이 세계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의 실제에 대해 거듭 물으며 참된 말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말은 의사표현 수단이다. 말을 통해 개체는 자신을 드러낸다. 말엔 말 한 자의 권력이 담겨 있기도 하다. 말해진 것은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누가 왜 무엇을 말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말에 대한 성찰과 질문이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진실에 대해 귀기울여야 한다. 침묵하는 자들의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언어에 대해 자의식을 가진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20세기 3세계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한 의식화 교육의 일환으로 문해교육을 실시했다. 말할 수 없는 자, 말을 빼앗긴 자, 침묵을 강요받는 자들이 언어를 통해 각성하고 세상의 주인으로 참여하는 것이 참된 민주주의고 인간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한글날 말의 해방적 기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