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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송월동의 문화유적 찾기
◇ 국립 기상박물관 : 종로구 송월길 52 (국보 329호)
- 1932년에 건립된 서울기상관측소를 그대로 복원한 국내 최초의 기상과학 역사 박물관
국립 기상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기상과학 역사 박물관으로, 1932년에 건립된 서울 기상관측소를 그대로 복원하여 운영하고 있다.
하늘을 기록하고, 읽어온 시간의 흔적을 담은 국립 기상박물관은 조선시대의 측우기에서 최신 인공지능 예보까지, 기상 과학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교육의 장이다.
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329호) 등 역사적 기상 유물을 소장하고 있고, 기상 관측 장비, 예보 시스템, 세계 각국의 기상 사례 등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기상학의 발전과 기후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도슨트 해설이 마련되어 있어, 기상과 날씨에 대한 흥미를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다.
국립기상박물관 건물은 본래 1930년대에 기상관측소로 지어진 역사적 건축물이다. 2017년에는 세계기상기구(WMO)로부터 '100년 관측소(Century Observatory)'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곳은 우리나라 기상 관측의 뿌리와 현대적 발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이 박물관의 상설 전시는 크게 ➀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역사와 ➁ 최신 관련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두 영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서구식 기상 제도의 도입과 근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위성 관측과 예보 기술 등 첨단 기상과학의 흐름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측우기와 측우대 등의 유물은 조선시대 하늘을 기록하던 방식과 과학적 정밀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측우기 >
국립기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조선 시대 충청도 감영(공주 감영, 금영)에 설치되어 강우량을 측정하던 기구로, 1837년(헌종 3년)에 제작되었다. 이 빗물을 측정하는 기구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측우기로, 2020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측우기는 높이 1자 5치(약 32cm), 지름 7치(약 15cm), 무게 11근(약 6.2kg)이며, 세종대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계승한 형태이다. 몸체는 원통형으로, 각 단이 약 5치씩 나누어져 있어 빗물의 양을 눈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각 도의 감영에 측우기를 설치해 강우량을 측정하고,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체계가 갖춰져 있었으므로,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기상 관측 체계였다.
1915년에 일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에 환수되어 현재 국립기상 과학원(서울)에 보관되어 있다.
◇ 월암(月巖)근린공원 : 종로구 송월동 1-2
- 한양도성 복원정비공사 중 송월동의 구간을 복원하면서 주변에 조성한 시민공원
월암(月巖)근린공원은 한양도성 복원정비공사 구간 중 종로구 송월동 구간의 복원을 2011년에 완료하면서 주변에 조성한 시민공원이다. 정동길이 끝나는 길을 건너면 만나게 되는 140m의 이 짧은 성벽은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조선 후기 순조 때까지의 성벽 건축의 변천을 한 눈에 볼수 있어 귀중한 역사적 유물로 평가된다.
월암근린공원은 종로구 월암동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월암"은 언덕 위의 하얀 바위가 달처럼 보인 데서 비롯되었다. 이 바위글씨가 지역 명칭의 기원이 되어 공원 이름에 반영되었다. 이 공원의 이름은 월암공원 내 바위에 새겨진 "월암동(月巖洞)"이라는 옛 글씨에서 유래했으며, 조선 후기에 어느 선비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공원은 한양도성길과 연결되며, 인근에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 집터 등 문화재가 많아 역사 탐방지로 적합합니다.
한양도성 안쪽으로는 경희궁과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터만 남아있는 돈의문 터 서쪽으로 경교장이 있다.
성벽 아래에는 성곽마을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을 입구에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 가옥, 「대한매일신보」를 만든 영국인 베델(Bethel : 1872~1909) 집터가 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으면 행촌동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권율 장군 집터의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알버트 테일러의 저택이었던 딜쿠샤(Dilkusha)도 만날 수 있다.
이 공원은 잘 정리된 산책로와 다양한 나무들로 덮여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 홍난파(洪蘭坡) 가옥 : 종로구 홍파동 2번지 16호(등록문화재)
- 일제 때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7년간 살던 곳
이 집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을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인수하여 7년간 살던 곳이다. 이 집에서 홍난파 선생의 대표곡들이 작곡되었고, 1930년대 서양식 주택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있다.
홍난파(1898∼1941)의 본명은 영후(永厚), 아호는 난파이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지휘자, 음악평론가이자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음악 작품 중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등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군 수원에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난파는 그 중 현악기인 앙금을 연주했다고 전한다.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홍난파 또한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고, 1912년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으며,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았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기독교청년회 중학과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김상운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홍난파의 형이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자, 그 영향으로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의전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부모 몰래 동경음악학교 예과(豫科)에 2년간 다녔다.
이듬해인 1919년 동경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이 잡지는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19년 3월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음악학교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였다.
다시 귀국한 후에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하였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인 최초의 독주회였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한편으로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6년에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이 학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이 해에 홍난파는 《세계명작 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에 의하였다고 전한다.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김형준은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도쿄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1931년 홍난파는 조선음악가협회 창립총회에서 상무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를 2년간 다녔다. 이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난파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에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모녀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녀의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홍난파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국내에 돌아온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난파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에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 활동이 왕성하였다. 그 해에는 김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는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 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에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홍난파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다가 회복이 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43세로 숨을 거두었다.
* 율곡선생 문성묘 터(구세군 영천교회 자리)의 ‘性同 鱗羽 愛止 山壑’(성품이 비늘과 날개[鱗羽]와 같고, 사랑이 산과 골짜기에서 그친다. 뜻<“만물의 성품이 서로 통하고, 사랑은 산과 계곡에 머문다.”>
◇ 이회영 기념관(´벗집′) : 종로구 사직로 6길 15
- ‘벗집’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과 독립운동을 기리는 공간
이회영 기념관(‘벗집’)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의 여섯 형제들의 삶과 신념을 사진과 문서, 예술작품을 통해 되새길 수 있다.
독립운동을 기리는 이 기념관은 2024년에 옛 선교사 주택인 ‘묵은집’에서 개관했다. 이 집은 20세기 초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살던 서양식 주택으로, 골목길과 언덕을 따라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담쟁이 넝쿨, 그리고 창문 너머 마당이 어우러지며, 도심의 소음과 번잡함을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쉼의 공간을 제공한다.
기념관의 이름인 ‘벗집’은 이회영 선생의 아호 ‘우당(友堂)’을 한글로 풀어 쓴 말로, 그가 한 평생을 벗들을 위해 살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벗집’은 누구나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시민 사랑방으로, 이회영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나누는 공간이다.
이 기념관은 서울시 우수 건축자산으로 지정된 역사적 건물이며, 전통과 근대, 독립운동과 현재가 만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이회영 층계'는 전시실로 연결되며, 오를수록 사진과 기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지하 전시는 영상과 참여형 콘텐츠가 포함되어 있으며, 2층에서는 이회영 선생이 그린 묵란 그림, 신흥무관학교 관련 유물, 그리고 아내 이은숙 여사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원고 등 개인적이고 섬세한 사료들을 볼 수 있다.
우당 이회영·성재 이시영은 1910년에 경술국치가 되자 건영·석영·철영·호영 등 6 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은 전 재산 40만 원(현 시세 약 600억 원으로 추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을 떠난 전형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 :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 집안이다. 우당 이회영·성재 이시영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으로,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회영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에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 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 계획을 추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우당 이회영은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 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하였다.
1932년 우당 이회영은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상하이에서 배로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뤼순 감옥으로 이송,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에 순국하였다. 광복 후 1962년에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이회영 선생의 공적을 기려 기념사업회에서 2014년 2월에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 표석이 위치한 서울YWCA 앞에 흉상(胸像)을 건립하였다.
성재 이시영은 16세에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 교리·승정원 부 승지·궁내부 수석 참의·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 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만사 국장·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술국치를 맞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도 말에 서간도(西間島)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상해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까지 상해임시정부의 핵심적 소임은 수행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 딜쿠샤 (Dilkusha) 집: 종로구 행촌동 1-88번지
-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신문기자로도 활동한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가 건축한 저택
권율 장군집 은행나무 고목 서쪽에 2층 벽돌로 지은 집,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1875∼1948)의 집인 딜쿠샤(Dilkusha)가 보인다.
다른 건물들과는 다른 외관을 지닌 이 오래된 서양식 가옥은 90여년의 세월을 이겨낸 근대건축물로 이 일대에 세워진 첫 번째 주택이다. 얼마 전까지 딜쿠샤 건물은 저소득층 17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딜쿠샤(Dilkusha)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을 의미한다. 인도 북부의 곰티 강 인근에 자리 잡은 딜쿠샤 궁전에서 따온 이름이다. 딜쿠샤가 지어진 것은 1923년이다. 그 때만 해도 인왕산 일대는 인가는 없고 나무들과 덤불숲만이 무성하던 산야 지대였다. 이 집은 1926년 7월 26일 벼락으로 화재를 입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딜쿠샤를 처음 지은 사람은 미국인 사업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알버트 테일러이다. 금광기술자였던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따라 1898년 대한제국 때 조선에 왔던 알버트 테일러는 아버지의 광업사업을 도우며 일제 치하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신문기자로도 활동했다.
알버트 테일러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목격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외신기자로 활동하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취재해서 서방에 알렸다. 알버트 테일러는 자신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난 날(1919년 2월 28일), 갓 태어난 아기와 아내를 만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다가 아기의 요람 밑에서 조선의 독립선언문을 발견한다. 그 날이 바로 1919년 2월 28일, 기미년의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하루 전이다.
알버트는 발견한 독립선언서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빼돌려 서방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또한 수원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숱한 만행을 서방 언론에 알렸다.
알버트 테일러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수감생활 끝에 1942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으로부터 강제추방 당했다.
추방당한 이후 미국에서 살게 된 알버트 테일러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한국이 독립을 하자 알버트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었고,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 메리 테일러에게 한국에 그의 유골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는 알버트 테일러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을 한국으로 가지고 와서 한국의 양화진 묘지에 묻었다.
1919년, 한국의 독립선언서 위에서 그의 생애 첫날을 맞은 알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딜쿠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소년 시절, 영국과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을 때도 어머니인 메리 테일러는 딜쿠샤가 그의 집이라며 늘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942년 부모가 한국에서 추방당한 후 브루스 테일러도 딜쿠샤로 돌아오지 못했다.
브루스 테일러는 현재 미국 멘도시노에 살고 있으며, 2011년 『은행나무 옆 딜쿠샤』라는 책을 썼다. 책 속에서 그는 딜쿠샤에서의 어린 시절과 일제 때의 조선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브루스 테일러는 2006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양화진 서양인묘지와 딜쿠샤를 둘러보았다.
2006년까지는 건물 초석에 ‘딜쿠샤(Dilkusha) 1923’이라고 쓰여져 이를 확인하지 못하여 대한매일신보 사옥이다, 선교사의 집이다 등의 추측만 난무하다가 비로소 베일에 싸여 있던 딜쿠샤의 실체가 밝혀졌다. 브루스 테일러는 아버지가 찍은 옛 서울 사진 17점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당시 이명박 시장으로부터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첫댓글 덕분에 다시 역사공부를 하게됩니다 .4년전에 이시영 기념관도 가 보았고 .
딜쿠사도 제가ㆍ두번이나 가본 집이랍니다.역
사적인 터는 늘 감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