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알랑들롱급 미남이셨습니다.
기자도 하시고, 유선방송국도 운영하시고, 사업도 하셨던 조각미남 아버지...
아버지같은 남자가 내 이상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서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까지,
한 번도 지적을 안 하셨습니다.
공부 잘 한다고 항상 칭찬하시고,
자정 넘어 공부하는 내게
"힘들겠다 그만 자거라."라는 말씀을 가장 자주 하셨었지요.
고3시절에는 학교에서 10시까지 야자를 했었습니다.
오후 정각 6시가 되면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시고,
고등학교 정문 앞으로 저녁 도시락을 갖다 주셨습니다.
내가 대학생 때는
대학교 학부모 위원으로 활동도 하시고,
친구 , 선후배(남녀)들이 집에 놀러오면 너무 반가워하셔서 다들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타 지역으로 발령을 받던 날,
엄마가 준비하신 7개의 짐가방을 드시고
비포장도로를 달려(그 당시는 모든 도로가 비포장)
발령지의 아버지 죽마고우집에 하숙을 시키셨습니다.
(아버지 세대분들은 죽마고우가 형제 개념이라서, 하숙한 집 큰 아들도 중학교 3년을 우리집에서 생활했었어요.)
아버지 죽마고우분도 자나깨나 친 딸 이상으로 나를 챙기셨구요.
발령받은 직장의 큰 행사 때는 아버지께서 꼭 오셔서 행사 관람도 하셨습니다.
일찍 결혼하게 되서
남들이 다 선호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고
엄마는 직장이 아깝다고 안타까워 하셨지만,
아버지께서는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신랑을 따라 가야한다고, 직장을 그만둬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출산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서울 우리집에 한걸음에 달려 오셨었지요.
아가방의 고급진 옥색 잠바를 선물로 갖고 오셔서
내 아들을 보고 감격하셨던 아버지...
내 아들 백일과 돐 때도 작은아버지 부부랑 꼭 같이 오셔서 너무나 기뻐하셨던 내 아버지.
내 아들과 사위(남편)를 너무 좋아하셔서
우리 가족은 시간만 나면 아버지랑 놀려고 친정에 갔었습니다.
우리가 온다고 하는 날은 외출도 안 하시고,
그 당시 고급진 음식이었던 훼밀리쥬스와 손자 간식을 준비하고 기다리셨던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 등에서 할아버지 머리를 힘껏 잡아댕기며 미끄럼을 타고 놀았는데,
아버지는 너무나 즐거워만 하셨었지요.
충청도 양반집 장손이셨던 아버지가
절대로 어울리지 않게
여름 포대기에 우리 아들을 업고 동네를 활보하고 다니셔서 가족들이 깜놀~(자랑하러 다니셨대요.)
아침부터 신이 나셔서 사위랑 뒷산 등산하시고,
내 아들 손잡고 여기 저기 놀러 다니시던 사진을 보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이 납니다.
내 우상이며 내 이상형이었던 아버지께서
70세의 젊은 나이에 쓰러지셨고,
충남대병원 중환자실과 병실에서 6개월을 투병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토요일마다 한 주도 안 거르고 문병을 갔고,
우리 아들은 갈 때마다 할아버지를 붙잡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를 드렸었지요.
병원의 퇴원 조치로 집에서 온갖 재활을 6개월 다 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선산에 아버지를 묻던 날은 보슬비가 내렸고,
이 후 9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질만큼
내게는 크나큰 충격과 아픔이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애기, 제일 예뻐하셨던 양반이 돌아가셨다'고 표현하시더군요.
그래도 가장 큰 위로는
친손자를 장손인 오빠가 20살 때부터 간절히 바라셨는데,
돌아가시기 20일 전 조카가 태어나서 그토록 원하던 친손자를 보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병마로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버지께서
안방에 친손자가 들어오자
활짝 웃으시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해하셨던 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내 평생 올케언니와 조카를 우리 집안의 은인으로 위하며 살고 있구요.)
아들과 딸 차별이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아버지 장례식 때 고모께서
오빠(제 아버지)는 ◯◯◯(저)를 제일 예뻐하셨다고 하실 정도의 큰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
아들을 키워놓고
39살에 다시 노량진학원다니며 시험에 합격,
40살에 결혼 전 다녔던 직장에 다시 발령 받았을 때
엄마께서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딸 새 옷을 맞춰주실 건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아버지 대신이라시며 정장 2벌을 사 주셨었지요.
대화가 잘 통했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시어머니 잘 모시라는 거였는데.
시어머니랑은 목욕도 같이 다니고 여행도 같이 다니며
친밀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과 길을 걸을 때는
항상 아들을 차도가 아닌 쪽에 두고,
꼭 손을 잡고 다니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합니다.
아버지의 숭고한 희생과 교육덕분에
아버지의 사랑였던 딸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직장도 명퇴하고 늘 평안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었던 외손자와 친손자도
이제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 잘 하고 있답니다.
항상 지켜보고 계시죠?
내 삶의 큰 거울인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첫댓글 훌륭하신 아버님을
두셨군요.
좋은 추억과 함께
행복한 나날되세요.
향산님과 따님 글 읽으면 아버지 생각납니다.
향산님 손자이야기 읽으면
아버지께서 내 아들에게 홀딱 빠지셔서 사랑하셨던 기억 나구요.
향산님은
좋은 아버지, 할아버지십니다.
@正道行(꽃향기) 감사합니다.
외손자가 유치원
다녀와서 잘 노는군요.
@실상당 향산 손자사랑은 할아버지, 할머니시죠.
외동아들의 엄마셨던 제 시어머니께서는
외동손자인 제 아들과 그 귀한 손자의 엄마인 저(며느리)를 위해 사셨었어요. 밥 다 해주시고 청소, 세탁, 육아 다 해 주시고.
저를 보시면 가끔씩 '너는 어쩜 이리 신통방통하니...어떻게 이리 예쁜 애기를 쏙 낳았다니~~'하시며 평생 감탄하셨어요. 며느리와 손자를 위해 사셨답니다. 마치 친할머니와 친손녀같은 고부간이었지요. 시집와서 고생 1도 안 하고 살았답니다. 시어머니랑 너무 붙어다녀서 주변에서는 모두 친정엄만줄 알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