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의 사전적 의미는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교회는 오늘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 주일을 지낸다. 저희 본당 요셉 보좌신부님은 미사 강론에서 루카 3.10~18의 복음말씀과 함께 전래동화 <구두쇠 영감>을 소개하셨다. 군중이 요한에게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요한이 그들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답했다.
우리네 세밑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좌절과 분노의 목소리가 정치권력과 자본에 의해 마구 짓밟히고 거리에는 바쁘고 무심한 발자국만이 겨울바람에 흩날린다. 언제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던 자선냄비의 종소리마저 메아리 없는 둔탁함으로 낯설다. 구세군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루스가 그의 아내 캐서린과 함께 런던의 빈민가에서 시작한 개신교의 한 종파다. 본래는 ‘그리스도교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이웃에게 배고픔을 없애주고 복음을 전하자.’는 의미로 시작했다고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장자(莊子)> ‘지락(至樂)’편에 이런 우화(寓話)가 있었다. 옛날 중국 노(魯)나라에는 어느 날 귀한 바닷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노나라 군주는 그 새를 맞아 왕실의 사당, 종묘에서 술을 베풀고 순임금의 음악인 구소를 연주하였다. 그러자 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근심에 잠겨 한 점의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삼일 만에 죽고 말았다. 노나라의 군주는 자신이 먹는 음식으로 새를 보양했지만 새에게는 자연에서 사는 생활방식이 아니었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베푼 이와 베풂을 받은 상대가 서로 맞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에 빠진다. 베푸는 이와 베풂을 받는 이 쌍방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현실정치이고 사회적 배려가 아닐까?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기 위해 마음을 쓰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유가에서는 일찍이 인간의 공감능력과 그에 따른 배려를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여겼다. 이를 공자는 인(仁)으로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설명했다. 만약 우리 앞에서 한 아이가 물에 빠졌다면 그 상황에서 이것 저것을 따지지 말고 즉각 몸을 던져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이 상대를 위한 배려이고 인간의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배려는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상대를 생각하는 쌍방향적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세밑이면 많은 단체와 개인이 경쟁적으로 1회성 불우이웃돕기에 나서 생색을 낸다. 신문과 방송 또한 이를 보도하는 기사를 베푸는 사람 중심으로 소개한다. 세밑의 미담기사는 베푸는 단체나 사람 중심으로 소개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혜자를 들러리로 세우는 것일까? 불경(佛經)에서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는 말이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주는 것 세 가지가 공(空)하여야 참다운 희사(喜捨)가 된다고 말한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세밑 거리에 아기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찬송이 한창 울러 퍼지고 자선냄비 종소리가 은은하게 메아리칠 때다. 이런 세밑이면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와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그리고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단편 <우동 한 그릇>의 감동이 새삼그립다. <행복한 왕자>는 제비로 하여금 자신의 동상 눈과 칼집에 박힌 보석을 빼서 아픈 아이를 데리고 바느질을 하는 아낙과 다락방에서 글을 쓰는 작가, 추운 거리의 성냥팔이 소녀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온몸의 금붙이를 하나하나 뜯어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눈물겨운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스물두 살난 가난한 부부 델라와 짐의 이야기다. 아내 델라가 자신의 머리칼을 팔아 남편 짐의 시곗줄을 사고 남편 짐은 아내 델라의 머리장식을 사기 위해 자신의 시계를 파는 가슴 저미게 하는 사랑의 이야기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 성탄 선물을 마련한다. <우동 한 그릇>은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면 일본의 우동집이 붐빈다. 삿포로에 있는 북해정이라는 우동집에 손님이 끊어지려고 해서 간판을 내리려야할 늦은 밤에 허름한 차림의 부인이 두 아들과 같이 들어와서 머뭇거리며 우동 한 그릇을 시킨다. 주방장은 이들 모자에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문 받은 우동 한 그릇에 우동 한 덩어리와 반 덩어리를 더 넣어서 말아준다.
우동집 주방장은 이듬해에는 오지 않은 그 가족을 기다린다. 그러나 오지 않는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뒤에야 문을 닫을 때쯤 세모자가 찾아와 그 자리에 앉았다. 부인은 할머니가 되었고 큰 아들은 검사, 작은 아들은 은행원이 되어서 찾아온 것이다. 그날은 그때 그 시절 우동 한 그릇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온 것이다. 우리나라 무성영화시대에 나온 <검사와 여선생>의 사연이 떠오르는 <우동 한 그릇>은 일본에서 지난 1992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세밑에 떠오르는 동화와 단편의 소재가 마치 변사가 구성지게 읊어대는 신파조 활동사진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감히 이들 작품은 삶에 찌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일깨우는 철학서요 영원한 인문고전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작품을 이번 세밑에 가족과 함께 찬찬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젊은 날 사건기자시절 시경을 출입할 때였다. 당시 큰형 뻘 되는 동래고보 출신의 강모 수사과장이 계셨다. 그분은 자식들이 방학으로 집에 모이면 추운 겨울날 어느 새벽을 잡아 자갈치 시장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했다. 그날은 배차시간이 길고 한 대 같은 시내버스를 태우고 추위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언 손을 녹이는 노점상 아지매들의 자갈치시장 바닥을 체험하며 상인들에 끼여 시락국을 먹였다고 했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각자 보고 느낀 대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나는 그 강 과장의 현장자녀교육을 내 자녀들에게 옮기지 못하고 이야기로만 전했던 기억이 아직껏 아쉬움으로 남는다.
첫댓글 저물어 가는 한 해 끝자락에서 많은 생각과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 입니다. 저 자신의 부족함에서
오는 회한들...그러나 자비의 예수님께 모두 맡겨 드리고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하렵니다. 감사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즈음 좋은 글로 밝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밑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갈증 속에 있다가 감로수를 마시듯 시원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예요.
우리가 진정으로 인문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의 따뜻한 마음을 묵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래전 우동한그릇을 읽으며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와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기쁜 성탄 맞으세요.
쉬지않고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지나가는 한해와 다가오는 새해를 어떻게 보냈고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곰곰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