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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가을집회 이현래 목사님 말씀 두 번째 (요약)
반석 위에 2
이번 집회 주제를 ‘반석 위에’ 라 하였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무엇이든 기초 없이 하는 것은 잘 되는 것 같지만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아담도 처음에는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대단했지만 마지막에는 바벨로 가서 분열되고 말았다. 사탄의 말은 마지막에 분열이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구교에서는 제도 위에 개신교에서는 교리와 신앙고백 위에로 받아들였다. 제도 위에 세운 교회는 분열되지 않았지만 교리 위에 세운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사람마다 교리가 다르니 절대적 교리가 나올 수 없어서 시대에 따라 다른 교리가 나온다. 이것이 분열로 가는 교리에 세운 교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위에 세운 교회도 또 갈라진다. 왜냐면 그리스도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감동과 신앙고백과 설교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한 사람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사람이고 더 이상 연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면 분열도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고백이 다르고 감동이 다르다. 고백과 감동이 다르면 다 갈라질 수밖에 없다.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서 그렇다. 벽돌을 쌓아서 성을 세우자 흩어짐을 면하자 망대를 세워 높이 이르러 우리 이름을 세상이 빛내자 하니 분열되지 않을 수 없다. 바벨로 가는 길은 분열로 가는 길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그 사람 위에, 아무도 좋다 하지 않고 다 버리고 간 사람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 사람은 가져갈 사람이 없다. 나같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이나 받아들이지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안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예수 믿은 게 아니라 좀 잘되려고 예수를 믿었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이 없다. 그러니 다 가버리고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3년 반이나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따랐던 제자들까지도 다 가버렸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 살리셨다고 외쳤고 기독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감동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 충격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인간은 분열과 싸우는 입장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사람이 분열되는 게 싫으니 싸우신다. 하나님은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그런 세계가 오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딱 한사람이면 되는 그런 인류가 된다면 더 이상 분열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발견한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점이 한 사람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사람 안에서 의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 사람을 보았는지 놀라운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듯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 한 사람뿐이다. 거기서 내 개인이 자기 이름을 꾸며서 내면 망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딱 한 사람만 보고 있는데 자기 이름을 내놓으면 그 이름이 살아남겠는가.
우리 이름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내놓아봐야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일한 자리인 예수의 이름, 모든 사람이 싫어서 다 버리고 간 그 자리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하나 될 자리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완전하게 축복을 다 해놓았다. 그러니 심히 좋다고 하셨다. 심히 좋다고 하신 자체가 축복이다. 그런데 심히 좋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니 창세기 2장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흙으로 지었는데 산 혼이 되었다. 이 흙이라는 재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아무 가치가 없는데 딱 한가지 씨를 심으면 열매가 나오는 가치다. 사람이 대단한 줄 알지만 아무 것도 아닌 흙이다.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해서 흙이 아니라 흙 자체는 아무 가치가 없다. 누구도 돈 주고 사지 않는다
그런데 씨를 심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귀중한 물건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서 그 흙 속에서 변화된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흙에서 귤이 나온다. 흙에서 망고가 나온다는 게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이것을 안 보고 흙을 살 사람은 없다. 다 버리고 싶은 것이 흙이다. 흙에서 먼지가 나니 아스팔트를 해버린다. 아스팔트 위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지 않는다. 돌짝밭에 심었더니 뿌리가 내리지 못해 죽는다. 돌이 바닥에 깔린 산에는 나무가 오래 살지 못한다. 나무뿌리는 흙이 없고 반석이 있으면 죽어버린다.
우리나라 산은 1-2미터 아래가 다 돌이라서 나무가 오래 살기 힘들다. 미국에 주목 단지가 있는데 나무 하나가 3천 년이고 계속 산다. 한 나무가 아니라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도 주목이 있지만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토양에 뿌리를 깊게 뻣어도 계속 뻣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언제까지 살지 모른다. 지금까지 3천 년이다. 생명은 이렇게 살 수 있는 토양만 있으면 무진장 살 수 있다. 우리 인생도 살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무진장 살 수 있지만 지구상에서는 수명이 제한되어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형상화하기를 원하신다. 우리 형상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했는데 우리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사람의 모양을 보고 그 형상과 모양을 알 수 없다. 뿐만아니라 사람의 모양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을 모른다.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으니 아담의 자식을 낳을 수 있다. 이것이 모두 연합의 비밀이다. 모두 혼자 될 수 없는 문제다. 둘이 합한 연합은 비슷한 것끼리 연합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달라서 연합한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아기를 낳고 하나는 못 낳는다. 완전히 기능이 다른데 서로 필요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그리스도와 비슷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접근 자체가 어렵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첫 번째 명령은 네가 이것을 경작해서 인격화하라는 것이다. 너는 인격이니 인격으로 경작해서 인격화시키라는 것이다. 사람은 산 혼이고 형상과 모양이다. 십계명에 오면 너희는 아무 형상도 나를 위해 만들지 말라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형상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십자가에 매달려 내려오지 못한 그분이 사람의 진실이고 실체다. 사람이 좋고 나쁘고 간에 높고 낮든 간에 상관없이 그렇게 죽는 게 진실이다. 여기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싫든 좋든 원래 내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좋으냐 나쁘냐 내 마음에 맞냐 안 맞냐도 아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무능하고 게을러서 못 얻는 것도 복음이 아니라 자기 탓이다.
사람의 능력이 다 같지 않다. 내가 어려서 장사를 해보며 사람의 능력이 다른 것을 알았다. 내가 보기에 시시한 사람이 돈을 너무 잘 버는 것이다. 나는 좀 잘하는 줄 알았는데 빈털터리가 되었다. 나는 또 장사를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판에서는 난 안될 사람이다. 하나님이 다른 판으로 나를 불러내서 가보니 꽤 쓸만했다. 하나님이 써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길을 열어주셨다. 장사할 때는 길을 열어주지 않으신 이유가 내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못 할 것을 붙들고 있으면 고생만 할 뿐이다. 고생도 자기 책임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아는 것은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다. 분수를 모르면 고생하고 실패한다. 안되는 사람을 보면 안될 곳만 찾아다니고 안될 일만 골라서 한다. 그러니 자기 분수를 모른다. 수영선수 될 사람이 농구를 한다면 노력을 두 배로 해도 안 된다.
우리 인간의 소질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인격화하는데 소질 있는 존재다. 우리가 다른 것을 만들려 하지 말고 씨를 받아서 내 인격으로 재배해야 하는데 흙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진다. 고구마도 황토에 심은 고구마와 보통 땅에 심은 고구마는 맛이 다르다.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
그 토양이 예수다. 씨를 심으면 싹이 나지만 먹지 못할 것이 난다면 아무 소용없다. 우리 인생이 정해진 길로 가면 너무 쉽다. 이것을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유의지가 있는데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게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생겨 먹었다. 사람은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진다. 그래서 버린다, 포기한다는 게 잘되지 않는다. 포기해봐야 역시 그 자리다. 할 수 없어야 버리지 할 수 있으면 버릴 수 없다.
나는 무엇을 버렸다 하는 말은 사실 버렸다는 자기 의가 남아있다. 그러니 구제 불능이다.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했지만 겨우 그물과 배를 버렸는데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한다. 있는 사람이 보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런데 막판에 예수를 버렸다.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니 안 버리고 싶어도 버렸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냐고 물었고 예수가 그렇다고 하니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지금까지 알던 예수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고 그 모르는 사람을 모른다고 한 솔직한 사람이다. 배신자가 아니다. 몰라서 모른다고 했으니 배신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것은 단순한 결혼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운명으로 정해진 것으로 무슨 수로도 바꿀 수 없다.
나는 일생을 살면서 조금만 한눈을 팔면 어떻게 아시고 제제가 온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바로 길이 막힌다. 결혼할 때도 그랬다. 하늘은 열려야 되지 그게 막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도 나를 온전하게 붙잡을 것은 없다. 신학이 나를 붙잡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자유를 왜 신학에 붙잡히고 정통에 붙잡히고 자유주의에 붙잡히고 중도파에 붙잡히는가? 붙잡히면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붙잡히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붙잡혀있다. 성경이라도 내가 모르는 것은 그냥 두어야지 굳이 알려 하지 않는다. 내가 그냥 둔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아는 날이 온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우리가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 다 좋은 것만 주셨는데 믿음이 없으니 우리가 다 취할 수 없다. 자기 분량만큼만 취한다. 그러니 공평하다. 배가 터지지도 굶지도 않을 정도로 적당히 취하도록 만들어놨다
오늘은 이탈과 회복이라는 말씀을 하겠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같이 되겠는가? 너무 간단하다. 사람들이 묻기를 누가 하나님같이 되려 했냐고 하지만 속 깊은 곳에 다 도사리고 있다. 누구에게 안 지고 싶은 것이다. 다 자기가 머리가 되고 싶고 하나님이 되고 싶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게 하나님같이 되려는 것이다.
하나님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는 게 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표현이 안 되는데 어찌 흙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겠는가? 영이요 생명이 된다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놀라운 것이, 영으로 산다는 사람들, 쉼 없이 영을 호흡한다는 사람들,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 사람도 진짜를 못 봤다. 자기 편리한 데로 영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인격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영이라는 말이 위험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격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이 인격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말하는 인격이 아니다. 세상의 인격은 하나님같이 되려고 갈고닦아서 만든 인격이다. 내가 말하는 인격은 내가 만들 수 없는 인격이다. 격은 볼트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해진 전압은 격이 정해진 정격전압이다. 이 정해진 격은 하나님이 이미 만들어놓았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것을 나는 인격이라고 하니 오해 없길 바란다.
인격. 하나님은 이 인격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다른 데서는 활동이 안된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그대로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이 사람으로 가기 위해 여러 가지 과정을 주시는데 이 정격으로 가기 위해서다.
이것은 연단이 아니다. 연단을 해서 인격이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을 때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다듬은 것으로 쌓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전을 쌓을 때 다음은 돌로 쌓으니 오래가지 못했다.
원래 성막은 그렇지 않다. 보기 싫고 초라해도 성막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임금이 되고 보니 나는 이렇게 좋은 궁전에 사는데 여호와가 천막에 계시면 안된다 해서 성전을 지으려 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너는 피를 많이 흘려서 내 성전을 지을 수 없다 하셔서 솔로몬이 이어서 지었는데 솔로몬도 순수하지 못했다.
임금이 되고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그러니 그것도 온전하지 못했다. 솔로몬도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재판도 잘하고 다 잘했지만 세력이 약하니 정략결혼을 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 우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손으로 만든 것이 좋게는 보이지만 오래갈 수 없다. 하나님같이 되려면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종교를 만들든지 철학으로 만들든지 과학으로 만들든지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만드는데 천재적 기술이 있다.
제일 신기한 게 꽃에서 냄새를 맡아서 그 냄새를 분석해서 다시 그 냄새를 만든다. 정말 하나님같이 된 것이다. 우리는 구분을 못 한다. 더군다나 그런 향만 맡다가 진짜 향을 맡으면 오히려 다르다고 느낀다. 그런데 사람은 속는데 나비나 벌은 안 속는다. 얼굴에 진짜 향을 바르면 벌이 달려드는데 가짜라서 벌들이 다가오지 않는다.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생명 안에서 다 드러난다. 야곱이 꾀가 많고 자기 집을 세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결국 다 뺏기고 빈손으로 애급으로 내려갔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것은 결국 무너진다.
초창기에 우리 모임을 보고 사람이 얼마 안 되니 그렇지 사람이 많으면 조직이 생길 것이라고 비아냥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형제들에게 만일 조직이 필요하게 되어 만들게 되거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필요하면 안 만들 수 없다. 조직이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교회에 제도가 없다. 내가 제도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제도를 만들면 다른 것이 만들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더 좋은 제도를 만들 게 아니라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고 했다. 우리 교회가 엄청나게 커지긴 커졌다. 이렇게 커진 것도 기적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일지 몰랐다.
나는 사람 많이 모이라고 기도한 적도 속으로 원해 본 적도 없다. 나만큼밖에 안 되는데 어찌 바라겠는가. 교회가 나만큼이지 나 이상은 되지 않는다. 목회자들이 자기를 빼놓고 남을 위해 살려 해도 안 된다. 자기가 산만큼 된다. 산모가 건강해야 아기가 건강하다. 산모가 약하면 아기도 약하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버지 나이가 60세고 어머니가 37세니 노산이다. 그리고 너무 가난했다. 밥만 먹어도 다행인 생활을 했으니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수 없다. 이러게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젊어서 턱걸이 한번을 못 해봤다. 아무리 하려 해도 안 되는데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게 큰 은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선은 보기 좋을지 모르지만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마귀의 유혹이다. 마귀는 누구인가? 신약성경에 나온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할 때 나왔다. 마귀라는 한국말은 원래 불교 용어다. 지옥과 천당도 불교 용어다. 그것을 카톨릭에서 먼저 가져다 썼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불교의 영향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불교 문화가 다 깔려있다. 기복신앙이 우리나라에 많은 이유가 절에 다니던 사람들이 복 빌러 다니던 게 교회로 옮겨진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떤 선교하던 사람이 새벽길을 가는데 한 여자가 고목 나무 아래서 빌고 있다. 선교사가 그 나무가 속이 썩은 이유가 줄 것은 없는데 매일 와서 빌어서 그렇다고 했고 그 여자가 그럼 어디 가서 빌어야 하냐고 물으니 건너편 예배당에 가서 빌라고 하니 다음날부터 거기에 가서 기도했다고 한다. 목사도 여자가 자발적으로 와서 기도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 장소만 옮겼고 이름만 바꿨을 뿐이지 내용은 같다.
교회에서 기도해도 그 사람만큼 밖에 안된다. 하나님이 못 알아들으시겠는가? 소리 지른다고 하나님이 알아듣고 열심히 구한다고 알아듣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신다. 다 알고 계신다. 기도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할 때는 해야 한다. 그런데 헛된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괜히 하나님만 귀찮게 한다. 줄 것도 없는데 계속 조르며 얼마나 괴로우시겠는가.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한다고 두드릴 곳에 가서 두드리고 구할 것을 구해야지 무조건 구한다고 주시는 게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주셨다. 모두 공짜로 줘서 받았다. 나는 하나님을 본 일이 없고 아직 잘 모르지만 없다는 말을 절대 못 하겠다. 받은 게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하고 어떤 때 주시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분이 알아서 주신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실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군대에 간 사람에게 필요하니 총도 주고 폭탄도 준다. 보통 때 같으면 안 준다. 아무에게 수류탄을 주겠는가. 적을 향해 가야지 그 위험한 것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사람을 보고 주신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지만 일부에서는 그 제물을 보고 아벨은 받고 가인은 안 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받은 것이라고 한다. 종교가 잘못된 게 제물만 잘 드리려고 한다. 이것은 교회만 그런 게 아니라 민간신앙도 그렇다.
살아서 불효했던 사람이 죽으면 정성을 다해서 제사 드린다. 조상을 섬겨야 자기가 잘살기 때문이다. 제물에 머리카락이 하나 들어가면 조상이 보기에 뱀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 지내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드린다. 제사음식은 간도 안 한다. 제물 차리는데 너무 관심이 많지만, 만약 조상이 온다면 자식을 보지 그 제물을 보겠는가. 귀신이 와서 음식을 먹겠는가.
귀신 눈 속이듯 하나님을 속이려 한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신다. 바닷가에 살면 바다에 귀신이 많아서 정월 보름날에 바닷가에 밥이나 음식을 많이 가져다 놓는다. 거기에 이상한 게 바닷가의 못 먹는 파래를 올려놓는다. 귀신 눈 속이려고 한다. 제물을 드리면서도 귀신 눈 속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눈을 속이겠는가? 다 보고 계시니 속일 수 없다. 나는 야곱의 일생을 워치만 니가 해석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나를 꺼집어 내서 낱낱이 이야기하는데 내가 하나님 손바닥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빤히 보고 계신 대 나는 꾀부리느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했으니 하나님이 보고 웃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 다 드러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폭로되는데 편안해지는 경험을 여러번 했다. 나는 내 밑바닥이 드러나고 절망적인 시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
마귀는 속이는 자고 거짓말하는 자고 훼방하는 자고 이간시키는 자다. 우리 성경을 조선사람이 번역해서 마귀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옛 뱀이라 하고 용이라고도 하는 자가 잡혔다. 그런데 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잡혀서 유황불에 가고 다음에 새 예루살렘이 나온다. 마귀가 있을 때는 새 예루살렘이 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신부와 어린양의 보좌가 나온다. 그리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더라 한다
어제 저녁에 김 목사 말씀에 강물이 흘러 온 세상을 덮는다고 했는데 그 물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온다. 생명수가 나오니 인생을 뒤덮던 모든 부정과 어둠과 밤과 슬픔과 애곡이 다 없어진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오지 그것이 남아있으면 계속 유혹을 받고 또 받게 된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그런 부정이 다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기도 안 하면 또 나온다. 이런 부정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 내가 살아보니 이만하면 되었지 하는데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이유가 있다. 아직 부정적인 게 다 없어지지 않아서 그렇다.
내게 남은 부정을 이용해서 퍼트리는 자가 있다. 내가 살아보니 아직도 안된다고 하는 게 계속 발견된다. 그런데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흐르면 모든 부정이 다 사라진다. 그래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한다. 가까이 오면 올수록 더 부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합한다면 그런 부정이 없다. 연합이 시원찮으니 부정이 온다. 약혼만 한다면 온전하지 못하다. 결혼을 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살아보고 결혼한다고 한다. 참 편리해 보인다. 그러면 영원한 짝이 되는가? 불가능하다. 사람이 일 년 만에 결정되는 게 아니다. 살다 보면 엉뚱한 일이 발생 될 수 있다
어떤 세기의 지성인이 계약 결혼을 했다. 완전한 계약을 하면 못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지식이 많을수록 더하다. 지식 없는 사람들은 그냥 결혼해서 산다. 앞으로는 또 어찌 될지 모른다. 지금은 살아보고 결혼한다.
그런 사람으로 무엇을 한다면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고 아담은 동산에서 추방되어 동산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추방된 이유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였다. 동산에 하나님이 둘이 될 수 없다.
아담은 두려워 나무 뒤에 숨었고 그 후로 아담은 나무 뒤에 얼굴을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감추고 산다. 서양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상당히 친절하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인사하지 못하고 서로 민망해한다. 서양사람들이 친절해도 거리를 두고 살기 때문에 친절하다.
사람은 나무 뒤에서 얼굴은 가리고 자기 소유만 내놓는다. 그래서 소유가 좋아지려고 평생 땀을 흘린다. 먹기 위해 땀 흘리는 것은 수고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 직장을 가는 것을 불평하면 안 된다. 능력 있으면 더 좋은 직장에 가면 된다. 능력 있으면 임금을 많이 준다. 세상만 원망할 일이 아니다.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을 보면 제물을 드리다가 형이 아우를 죽였다. 제물 드리는 신성한 일에서 살인사건이 생겼다. 이것이 최초의 종교 살인이라 할 수 있다. 약할 때는 다 어린양인데 강해지면 호랑이가 되어버린다.
약한 자는 항상 나는 어린양이라고 하지만 커지면 그 어린양이 호랑이가 된다. 종교가 특별히 그렇다. 그리고 바벨로 갔다. 바벨은 분열된 곳이고 거역으로 갔다. 하나님 나라를 거역하는 곳이다. 높아지고 성을 쌓자고 한다. 우리는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을 인격화시켜야 하는데 흙이 벽돌이 되어 성을 쌓고 망대를 높이 세우고 우리 이름을 빛내자 하는 게 세상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고 흩어버려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그 원리 자체가 흩어지게 되어있다. 높이 쌓을수록 허물어지게 된다. 사람이 쌓다 보면 점점 더 높이 쌓게 된다.
내가 옛날에 있던 교회에 종탑이 아주 구시대 종탑이었다. 좋게 만들어보느라고 벽돌로 아치를 만들었는데 경험 없는 사람이 하니 쌓다가 무너져서 큰 사고가 날뻔했다. 그 벽돌이 아랫쪽 가내공업 공장 지붕 위로 날아가 구멍이 났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없어서 큰 사고를 면했다.
세상은 결국 분열로 간다. 인간의 힘으로 만든 것은 결국 분열된다. 아주 보기 좋게 쌓으려고 하다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때 만일 사람이 죽었거나 다쳤으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아찔한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대책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대책은 불러내는 일이다. 거기서부터 나오라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거기 있지 말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후사를 약속했고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대책에 대한 말씀은 내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