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李光洙)가 최남선(崔南善)을 처음 본 것은 1907년 2월――안창호가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도중에 잠시 동경에 들렀을 때였다.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서는 그에게 유학생들을 위한 강연을 부탁했다. 그 강연회에서 최남선은 안창호의 뒤를 이어 등단하였다가 발작을 일으켰다(학질 때문에). 놀란 안창호가 최남선을 가슴에 안고 여관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최남선과 안창호의 첫 번째 만남이었고 그때의 안창호의 지극한 간호가 인연이 되어 최남선은 안창호가 이끄는 신민회의 중추 멤버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평생에 선생이라고 부르는 이가 없는데 오직 도산 한분만 선생으로 모신다”고 뒤에 술회하게 되었다. 그의 초기의 중요 논문으로 평가되는 「노력론」도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 사상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었다.
그 때 이광수는 천도교(일진회) 유학생으로 동경의 대성중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광수는 학생 신분으로 최남선이 연단에 올라가 쓰러지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았었고, 최남선은 역시 학생이었으나 이미 안창호와 같은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그 때 학생과 지도자라는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이광수가 최남선을 만난 것은 대성중학의 동급생인 홍명희(洪命憙) 소개로였다. 최남선이 이광수를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1909년 11월 30일 이광수는 최남선이 오기로 되어 있다는 홍명희 집으로 찾아갔다. 그보다 3,4분 뒤에 도착한 최남선을 보고 이광수는 적이 놀랐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최남선은 천재들이 지니고 있는 서늘한 눈빛에다 미모와 용기가 부드러움, 섬세함 등을 구비한 사람이었으나 실제의 그는 부드러움도, 섬세함도, 서늘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록대로 최남선은 ‘안색이 흑(黑)하고 육(肉)이 풍(豊)하고 안(眼)이 세(細)하여 일견하면 둔한 듯’ 한 인상이었다. 머리가 좋고 용기가 뛰어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사람을 이상으로 꿈꾸고 있었던 그에게 최남선의 첫인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그날 거의 혼자서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화를 떠들어댔다. “일종 오만의 색(色)이 상(常)히 그의 구(口)에 부동(浮動)하다”고 이광수가 그날 일기에 써둘 정도였다.
허나 둔하고 뚱뚱하고 오만에 가득 찬 최남선을 일시에 무시해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천재 때문만도 아니었고, 그의 입심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약한 이광수의 마음을 억누르고 윽박지르는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힘을 최남선은 가지고 있었다. 최남선보다 두 살 위이며 집안도 좋고 머리도 결코 떨어진다고 보기 어려운 홍명희에게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홍명희보다는 네 살 아래고 최남선보다는 두 살 아래인 이광수는 홍명희에게서 친구이거나 선배 정도의 거리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비해 육당(六堂)에게서는 선배를 넘어서서 스승 같은 정신적 무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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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세 천재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이 세 사람은 1910년대에 만나 일생을 지우로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길로 와서 다른 길을 걸어가는 흥미로움을 보인다.
홍명희는 을사보호조약 때 현감이던 부친이 자결하는 전통적인 양반집안에서 자라나 일본 유학을 하고 1930년대엔 신간회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한편,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정립하는 역사소설 「임꺽정」을 집필하는 진보적인 민족주의자가 되는가 하면, 이광수는 고아나 다름없는 존재로 일본 유학 시 2 ․ 8 독립운동 선언서를 짓고 문필로 일세를 뒤흔드는 젊은 이들의 우상 역할을 하다가 변절, 친일하는 오욕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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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길은 홍명희 ․ 이광수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는 와세다대학에서 연례행사로 열리는 모의 국회사건에서 분격하여 그곳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와 그의 집안의 의업(醫業)으로 모은 수만의 자산을 가지고 신문관을 열어 잡지를 내고 『동국통감』『동사강목』『삼국유사』『삼국사기』『동국병감』『택리지』『훈몽자회』『성호사설』등 역사지리서, 어학 문학서 등을 복간했으며 주시경을 필두로 한 임규 김두봉 한징 권덕규 이규영 등을 동원하여 국어사전 편찬에도 착수한다.
1910년대의 신문관과 광문회는 김윤식의 명명대로 한국의 아카데미아였으며, 진학문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의 양산박이었다. 그곳은 학문과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그곳을 거쳐가지 않은 문사가 없었고 그곳에서 유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없었다. 김성수가 운영난에 빠진 백산학원을 인수하여 중앙학교로 재건시킨 것도 최남선의 중재에 의한 것이었고 『동아일보』와 이광수가 인연을 맺은 것도 신문관을 통해서였다.
이처럼 최남선이 홍명희나 이광수와 달리 문화운동적인 길을 걸어간 것은 결국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 때문이었겠지만, 그보다는 세계를 보는 시각이 그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처음 동경에 갔을 때 보고 놀란 것은 집도 아니고 전차도 무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책방에 진열되어 있는 잡지와 신간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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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책이 일본의 오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그는 신문관과 광문회를 통하여 재현하려고 했다. 허나 그는 그의 책으로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이광수와 같이 친일하는 비운을 맛보게 되는데, 이는 그의 계몽주의적 활동이 시기를 못 만났을 뿐 아니라 민족 현실에 대한 뼈저린 아픔이 없이 소년적 희망과 용기로 매진하였던 에에도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본 유학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20년 가까이 침묵했던 노신의 태도는 대조된다. 그는 중국의 민중 현실에 절망하고 그 현실을 타개할 만한 자신을 가지지 못했던 데에 또한 절망했다. 그것이 「광인일기」라는 작품으로 나왔다.
참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세분이 이렇게 연관된건 첨 알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때 홍명희의 임꺽정전을 몰래빌려주는 대본집이 경남중학교사 바로 밑에 있어서 그걸빌려 가지고 숨어서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너무 재미가 있어서 쉬지않고 그 열두권이던가 하는 전집을 며칠간인지 단숨에 읽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
첫댓글 그 시대의 인물이었고, 그렇게 가깝게, 서로 연결이 되어있군요,,,간략한 근대사 잘 배웠습니다,,고맙습니다,,^^**
세명의 한국 천재들 우리 같은 속인들이 무어라고 평할수 없는 사람 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대를 잘못 만났으나 역시 큰어른 들이었습니다.
후세들은 말하겠지요, 이천년대 초반 화랑이 다음카페의 양산박이였다고...
참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세분이 이렇게 연관된건 첨 알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때 홍명희의 임꺽정전을 몰래빌려주는 대본집이 경남중학교사 바로 밑에 있어서 그걸빌려 가지고 숨어서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너무 재미가 있어서 쉬지않고 그 열두권이던가 하는 전집을 며칠간인지 단숨에 읽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