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거(喫茶去)
‘끽다거(喫茶去)’라는 유명한 화두를 남긴 조주(趙州) 종심(從諗, 778~897) 선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승(禪僧)으로, 차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4세에 출가해서 불문에 귀의한 조주 선사는 일찍이 선의 본질을 꿰뚫어 고승(高僧)의 물음에 답할 때 막힘이 없었고, 선문답(禪門答)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스스로도 참선의 화두를 많이 만들어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바로 ‘끽다거(喫茶去)’이다.
조주 선사는 세수 80에 이르기까지 행각과 선문답에 열중하다가 그의 나이 80세부터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줄곧 머물렀던 관음원(觀音院)에 있었을 무렵, 수행자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절을 올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불법(佛法)의 대의(大義)가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대답 없이 되물었다.
“전에 이곳에 온 일이 있었는가?” 하시니, 한 수좌가 대답하되,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선사께서 말씀하시되,
“그럼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 잔 마시게”라 하셨다.
그리고 옆에 같이 온 수행승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그러니 그 수행승은 답했다.
“예, 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또 말했다.
“그럼 자네도 차 한 잔 들게나(喫茶去).”라고 했다.
이와 같은 문답이 이어질 때 이 두 스님을 조주 선사 앞으로 데려 온 원주(院主)가 난감한 표정으로 선사께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온 적이 있는 사람에게도 차를 권하고, 온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차를 권하시니 어인 일입니까?”
그러자 원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사가 큰 소리로 원주! 하고 불렀다.
이에 놀란 원주가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을 하니, 선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원주, 그대도 차 한 잔 들게나(喫茶去).”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시자(侍子)가 말했다.
“스님께서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끽다거’ 하시는데, 도대체 요령이 통하지 않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랬다.
이에 조주 선사는 말했다.
“옳도다. 너도 끽다거(喫茶去)!”
그 순간 시자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곧 넓게 트인 골짜기처럼 마음이 활짝 열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은 같을지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 그 찻잔을 만지는 따스함도 느끼는 차 맛도 즐기는 차향도 약간씩은 다르듯이 깨달음도 스스로 깨우치라고 조주 선사가 끽다거(喫茶去) 한 것이다.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 잔 마시게"라는 화두는 망념 망상을 버리고, 본래 청정한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번뇌 망상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에 마음을 두라는 것이자, 일상생활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이며, 선의 진의(眞義)는 곧 불성(佛性)의 마음자리이니, 더 물을 것도 없고, 더 말한 것도 없으니 차나 한 잔 마시라는 것이다
‘끽다거(喫茶去)‘에서 ‘끽다(喫茶)’는 차를 마셔라는 말이고, 거(去)는 명령형 조사여서 별 의미가 없다.
고승 조주 선사는 120여 살까지 산 장수하신 선사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끽다거(喫茶去)’, ‘남천참묘(南泉斬猫)’,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등의 고칙(古則)으로 잘 알려진 분이다.
‘끽다거(喫茶去)’는 조주 선사가 남긴 번뜩이면서도 탁월한 선기(禪機)를 보여주는 일화들 중에 차(茶)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선문답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하여 ‘끽다거(喫茶去)’는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극치를 보여주는 꽤 까다로운 공안으로 알려져 있다.
「봄에는 아름다운 온갖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비추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흰 눈이 날리도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품지 않으면 이때가 인간세상의 좋은 시절이로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조주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형식이나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문답도 격식이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한 수행자가 길을 묻자, 어느 선사가 ‘눈앞이 길이다’라고 했다.
길을 걷고 있으면서 왜 두리번 거리느냐는 송곳 같은 말씀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라는 저잣거리의 금언과 다르지 않다.
뜻이 간절하면 보이지 않던 길도 눈앞에 나타나는 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눈앞에 정답을 두고도 오답만 보고 살아간다.
조주 선사는 ‘큰 도(大道)는 눈앞에 있는데 보기가 어려울 뿐이다’ 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조주 선사가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한 것은 수행승들에게 주는 공안으로서,
“일체의 관념과 분별을 다 여의고, 일체를 다 내려놓고, 쓸데없이 이런 저런 걸 묻지 말고,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 네가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은 너 속에 다 들어있는데, 엉뚱한 곳에 와서 뭘 묻고 찾으려 하느냐.” 하는 말뜻이다.
그러니 ‘너의 주인공은 어디에 두었느냐? 정신 차려라!’ 하는 뜻이기도 하다.
조주 선사는 늘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말했는데, 누구를 찾아다닌다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것이다.
조주(趙州) 상당(上堂)하여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종사험인단적처(宗師驗人端的處) ― 종사(宗師)가 사람을 시험하는 단적처(端的處, 정곡을 찌르는 곳)는
등한개구변지음(等閒開口便知音) ― 한가로이 입을 엶에 문득 지음(知音)함이로다.
정면약무청백안(覿面若無靑白眼) ― 바로 면전을 대해 청백안(靑白眼)이 없으면
종풍쟁득도여금(宗風爭得到如今) ― 어찌 종풍(宗風)이 오늘에 이름을 얻으리오.
※청백안(靑白眼)-청안(靑眼)은 환영하는 눈빛이고, 백안(白眼)은 싫어하는 눈길이다. 따라서 ‘청백안‘은 좋고 싫은 것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이에 산승(山僧)이 대중에게 묻노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조주 선사를 알겠느냐?
양구(良久)하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해 이르기를 일찍이 이르렀다 해도 “차나 한 잔 마셔라” 하고,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해도 “차나 한 잔 마셔라” 하니, 조주 선사의 법은 사의(思議)하기 어렵도다.
필경에 어떠한고?
조주 선사의 안광(眼光)이 항사법계 (恒沙法界)를 비추어 빛남이라. 비록 이와 같으나 시자(侍者)야 차를 달여 와서 조주(趙州) 선사께 올려라. 할(喝)! 하고 하좌(下座)하다. 어떻게 아리송해서 사의(思議)하기 어렵다. 선문답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이 일화에서 보듯이 불교의 수행과 차를 마시는 것은 서로가 도움이 되는 상승작용을 가져왔다.
차는 졸음을 쫓아내고 정신을 맑게 해주어 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고, 차의 효용을 알아차린 불문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차 마시기 위해 수행하고, 수행하기 위해 차를 마신다”는 말처럼 끽다거(喫茶去), 이 세 글자는 어짊과 지혜의 상징이 됐고, 훗날 조주의 백림선사(柏林禪寺)가 차선일미(茶禪一味)의 고향으로 성장하는 기초가 됐다.
타인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임제 선사는 할(喝)을, 덕산 선사는 방(棒)을 사용한 것과 달리 조주 선사는 평범한 일상의 언어[言句]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조주선을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 부르며, 그의 어록을 ‘간화선의 진수’이자 ‘화두 선의 원조’로 여기고 있다.
조주 선사가 남긴 어록은 수학 문제와 같이 공식으로 계산해 정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남긴 어록들은 수행자들에게 당장은 알아듣지 못해도 깨달음의 씨앗이 되고 지혜를 탁마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대원 스님은 조주 선사의 어록을 통해 “중생의 의식을 통해 아는 것은 중생의 습성만 키우는 것이고, 중생의 의식을 벗어난 것이 ‘반야지혜(般若智慧) 이므로, 일체분별과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오직 일념참구(一念參究)를 통한 깨달음이 종문의 법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핵심을 강조했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그 함의가 깊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함축된 요약이다.
세상엔 조금 더 채우려는 이들과 조금이라도 내주지 않을 요량인 이들로 이전투구로 소란스럽다.
이들에게 멋진 의복 대신 수의를 입혀주면 고요한 성정이 돌아올까 궁금하다.
욕망의 갈망이 소멸의 시간 앞에 작아지는 이유를 그들만 모르는 듯하다.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해 불안함과 초조함의 병세가 심한 그들에게 선사의 화두공안(話頭公案)만이 병을 낫게 하는 훌륭한 처방이란 생각이다.
침묵은 정적(靜寂)만이 흐르는 상태가 아닌 마음의 무언가를 비우는 일, 아니 마음에 침묵을 채워서 다시 마음을 비우는 일이라는 어느 작가의 변처럼 무작정 비우고 하지 않는 행위가 아닌, 없음을 있음으로 채워서 비우는 일이라 해석된다.
조주 선사의 사유로는 우리네 인생이 차(茶) 한 잔 마시는 일에 불과한 찰나일 뿐이라면 잠시의 침묵은 그 찰나 속에 가장 값진 순간일 것이다.
비우고 침묵하는 것이 채우고 큰소리치는 것보다 더 빛나 보인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높은 경지에 오른 큰 스님의 짧고 깊은 말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조주 선사를 찾아온 이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품고 있었기에 힘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통을 감수하며 찾아 왔을지는 헤아려 볼 수 있다.
조주 선사가 왜 그렇게 찾아온 모두에게 하나 같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차를 권했는지. 수행자들이 무겁고 무거운 질문을 내려놓고 대신 받았던 한 잔의 차는 어떤 맛일지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결국, 수행자들이 찾는 도란 물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평범한 일상에서 스스로 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한 것이다.
성철 큰스님이 살아계실 때 신도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면 먼저 부처님께 3천 배를 하고 오시오 하셨다.
3천 배를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신도들은 3천 배를 하는 동안에 짊어지고 온 원통함과 의문이 다 풀려 스스로 산을 내려간다고 했다.
우리는 저마다 간절함을 품은 채 살고 있다.
그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간절함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스스로를 지옥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아니면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그런 집착을 버리고, 각자의 소중한 명분을 내려놓는 순간, 해탈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일 것이다. 끽다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