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에 대하여
(수필의 재미를 위한 제언)
지난번 수필집담회에서, 1930년 대에 문학의 장르로 수필을 도입한 이후에 수필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전에 수필류에 해당하는 글을 무슨 명칭으로 불렀을까? 하나로 아우르는 이름이 없었다. 다양한 양식의 글쓰기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雜文 또는 雜記이다. 잡문에 대한 현대 표준대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일정한 체제나 문장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쓴 글이다. 대체로 지은이의 감정이나 사상이 꾸밈없이 드러난다.’ 줄을 바꾸어서 ‘동의어로 잡문학(雜文學)이 있다. 예술적 가치가 없는 잡스런 문학이다.’라고 토를 달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에는 잡문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이 그대로 담겨있다. 잡문에 대한 사전적 설명은 수필의 속성과 아주 유사하다. 동의어로 잡문학을 들면서 잡문을 폄하하는 주장이 아주 강하다. 오늘의 문학가들이 잡문을 바라보는 시선을 대변한다.
시인 안도현이 펴낸 책의 이름이 ‘안도현 잡문’이다. 책의 소갯글에 ‘안도현이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1만 여 개의 글 중에 244개의 글을 추려서 엮은 책이다. 시를 쓰지 않고 지내는 떫은 시간에 시를 쓰는 마음으로, 잡스러운 문장으로 어떻게든 세상에 말을 걸어보려고 쓴 글이다.’ 시가 아닌 잡문(잡스러운 문장)이라고 한 것은 산문으로 쓴 글이라서 시만큼 무게 있는 글은 아니다, 라고 읽어진다. 산문으로는 시처럼 인생을 깊이 있게 파헤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떫은 잡문으로나마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보았다는 뜻이다. 이 글도 오늘의 문학가들이 잡문 또는 산문을, 나아가서 수필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읽을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엔 학자, 시인,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잡문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주요 문학출판사가 금기로 여기는 것이 에세이집 출간이기도 했다. 유홍준이 1993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박을 터뜨리자 ‘잡문으로 인세 수입을 노리는 한심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20년 가까이 꾸준히 팔리며 지금은 에세이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들은 잡문으로 폄하하였던 유홍준의 책을 왜 꾸준히 읽었을까? 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사례를 통해서 본다면 잡문으로 취급한 사람들은 문학 전문가였고, 꾸준히 읽어 준 사람은 전문가가 아닌 오늘의 평민들 즉 보통사람들이다. 단순히 말해서 독자이다. 유홍준이 쓴 ‘문화 유산 답사기’가 어떻게 하여 잡문에서 에세이로 대우가 바뀌게 되었는가는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전문집단보다 우선하는 것은 독자라는 뜻이다. 전문가는 일반인 위에서 군림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지배는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답은 ‘雜’의 역사성에서 찾아보면 나오리라고 본다.
중국문학사에서 잡기(雜記)라고 하면 고대에 쓰인 일종의 기록체 문체로서, 사건을 기술하거나 사물을 묘사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내용은 아주 광범위하다. 인물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전장(傳狀)이나, 비지(碑志) 등 이외의 모든 기록성이 짙은 산문을 말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臺閣名勝記가 있다. 여행기의 유형이다. 山水遊記로는 유종원의 永州八記가 있고, 書畵雜物記는 한유의 畵記가 있다. 이 밖에도 사람에 대해서 기술하는 士雜記도 있다. 이런 경우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잡기는 서사가 위주이지만 서정성이나 논리성을 결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수와 명승을 묘사한 잡기는 자연의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는 동시에 경관을 보면서 일어나는 감정을 서술하거나 작가의 이상과 희망을 융합시키는 내용으로 확산해 나간다.
잡기를 쓸 때는 대개 다양한 수사적 어구를 궁리하고 언어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다듬으며, 묘사는 공교하게 이끌어서 작자의 진심과 실감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실을 충실하게 서술하고 감정을 질박하게 표출하며, 이치를 담는 것이 한데 어우러져 강렬한 예술적 흡인력을 지내게 해야 한다. 잡기는 고대의 문학 장르 가운데 가장 예술적 수준이 높은 분야의 하나이다. 잡기 중에는 아름다운 작품과 뻬어난 성과가 대단히 많은 장르이다. (-중국문학비평용어사전. 임종욱. 이회. 2011) 앞의 인용문에서 보면 중국 문학에서 잡기는 예술성이 높은 문학의 한 장르였다.
중국 자료들을 더 찾아보자.
1) 잡언시(雜言詩) - 중국 시가는 정형을 갖추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고체시는 정형을 깊이 따지지는 않는다.
고체시 중에 시구의 배치나 운을 사용하는데 아주 자유로워, 심지어는 산문투의 배치를 시도하기도 한다.
2) 잡체시(雜體詩) - 고대 시가 가운데 공식적인 체제(정형을 갖추는 것) 이외의 다양한 시체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잡체시는 문자를 가지고 문학적 유희를 즐기는 성격이 강하다. 문자를 가지고 노는 정도의 시라고 할까. 김삿갓 시라고 할까. 그래서 문학작품의 반열에 올리기는 어렵지 않는가. 라는 주장도 있다. 시의 명칭에 雜이 들어가면 선비나 사대부의 고상한 느낌보다는 말장난을 하는 서민의 삶이 느껴진다.
중국 문학사에서 雜이 들어가는 유명한 문학 장르로는 잡극(雜劇)이 있다.
원나라 때 유행한 연극의 대본으로서, 북방에서 발전한 음악이 기본이 되어서 만들어졌다. 중국사에서 북방이라고 하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뜻과 일반 백성이 중심인 민중문학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고대 중극 연극은 말과 음악(唱)이 어우러져 있다. 송나라 때의 관본잡극(官本雜劇)과 금나라 때의 원본(院本)이 기초가 되어서 만들어진 양식으로 원나라가 천하 통일을 이룬 후에는 대 유행을 했다.
이때 사용한 극본의 문장은 질박하고, 현실 문제를 위주로 다룬다. 시대-사회의 인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문장 표현도 솔직하고 진실하다. 잡극의 무대 효과(성공 여부)는 청중의 반응이 중요했다.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토속적인 용어나 방언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진실되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해학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잡극의 각본은 전통적인 고전 문학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 썼다.
송대에는 예술 속으로 서민들이 들어온다. 그림에도 서민의 삶을 그리는 풍속화가 나타난다. 송대의 시에는 서민들의 다루고, 서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시어로 사용한다. 이 말은 귀족들이 지배하던 사회구조에서 서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서민을 포용하는 예술 형식에 ‘雜’이라는 접두어가 붙었다. 중국 문학사를 더듬어 보면 雜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雜’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 고대문학은 소설이 발전하지 못했다. 수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형식은 아주 다양하였다. 특히 한문 문학에서 많다. 예를 들어보면 隨筆, 雜記, 文集, 稗錄 등의 이름으로 쓰여진 글은 모두 수필류에 속한다. 또 漫筆(서포만필), 패관잡기, 다산문집, 연암집, 반계수록(隨錄) 등도 오늘의 수필 장르에 해당한다.
내가 한문을 배우고 있는 이장우-장세후 교수가 퇴계시를 번역하여 발간한 책의 이름을 퇴계잡영(退溪雜詠)이라고 했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퇴계 선생이 고향인 도산의 토계마을에 내려와서 이런 저런 인간사를 노래한 시라고 했다. 말하자면 삶을 노래한 시어서 雜詠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雜이라는 말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평범한 사람의 삶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雜은 수필의 정의에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고려시대 대학자 이제현이 ‘櫟翁稗說(역옹패설)’이라는 문집을 내면서 머리말을 이렇게 썼다.
“-생략- 稗(패)에 卑(비)를 붙인 것은 그 소리 때문이지만 뜻으로 본다면 곡식 종류로는 가장 비슷한 것이다.(稗는 벼논의 피를 말한다) 나는 어려서 책을 읽을 줄 알았고, 커서는 그 학문을 그만 두었고, 이제는 늙어버렸으니 도리어 질박한 문장을 짓기 좋아하여 내실이 없고 미숙하니 패와 비슷하다. 그래서 내가 기록한 것을 패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역옹패설의 전집에 나오는 글을 요약하여 인용해보자.
여주 서기로 재임한 정통(鄭通)이라는 자가 소매향이라는 관기에 혹했다. 여기에서 아이까지 하나 얻었다. 집에 있는 아내는 남편을 멀리 보내고 땔나무도, 쌀도 없어서 종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향했다. 가는 길의 도중에 정통을 만났다. 말에는 기생을 태우고 자기는 어린애를 업고 북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고향으로 가는 아내와 마주쳤다. 아내는 가소로워서 혀를 끌끌 차면서 ‘늙은이가 그게 무슨 꼴이오? 남편은 ’나는 이렇게 장난을 하고 있소.‘라고 했다.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이지만 웃음 뒤에 뭔가를 꼬집는 것이 있다. 역옹패설의 여러 글에는 이처럼 이야기는 있지만 저자인 이제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역옹패설 뿐 아니고 고전수필의 일반적인 양태이기도 하다.
한문학에는 經書가 아닌 책은 雜書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역옹패설의 패설도 그런 뜻에서 잡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위의 이야기도 잡스런 내용이다.
전통 한문학에서는 문장의 양식을 많이 따졌다. 글쓰기에서 격식을 벗어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역사적 사건으로 정조의 ‘문체반정’이 있다. 이제 문체반정의 원인을 제공한 박지원의 문장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박지원은 기존의 시와 부, 문체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다. 죽은 누나의 행장을 쓸 때는 일반적인 양식 즉 현모양처로 묘사하여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이 양식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어려서 함께 자랄 때 누나에게 섭섭하였던 일, 작난질을 하여 누나를 골탕 먹이던 일들을 썼다. 청나라를 다녀와서 쓴 여행기의 성격이 강한 ‘열하일기’도 형식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문장으로 글을 썼다. 이 열하일기가 정조의 분노를 샀고, 문체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정조는 문체를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꼬집어서 이런 식의 문장을 금했다. 이것이 정조의 문체 반정이다.
박지원에게도 반성문을 쓰게 했다. 박지원의 반성문은 이렇다.
“글로서 장난거리로 삼아(以文爲戱)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광대처럼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제 문장은 진실로 천박하고 누추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박지원의 반성문을 되짚어 보면 ‘광대가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듯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조잡하고 실없는 말로 문장을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이제현이 말하는 패설과 서로 뜻이 통한다. 일상에서 서민들이 또는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투는 품위 있고, 고상한 말이 아니다. 이런 말은 오히려 소통이 안 되고 부자연스럽다.
민담에 어느 선비가 호랑이에게 아버지가 물려가는 다급한 상황인데도 한문 문자로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니 마을사람들아 빨리 구해 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여 선비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호랑이는 선비의 아버지를 물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문 어투가 고상하고 품위는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소통되지 않았으므로 죽은 언어나 다름없다. 고상한 한문 어투로 말한 선비는 자기의 뜻과 달리 패륜을 저질렀다면서 비웃음을 샀다.
박지원의 반성문에 以文爲戱라고 하였지만 단순히 웃기 위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웃음 뒤에는 강한 사회비판이 있다. 표현상으로는 잡문인지 몰라도 내용으로는 잡문이 결코 아니다. 박지원이 쓴 글은 중국의 잡극이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해학적으로 다룬 것과 유사하다.
박지원이 살았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평민들의 의식 수준이 많이 높아진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 노래 등이 유행했다. 조선 후기에 평민들이 널리 부르는 잡가도 크게 유행했다. 가곡, 가사, 시조 등은 중인 소리꾼이거나 선비들이 부르는 노래로서 정가(正歌)라 했다. 정가의 상대의 위치에 있는 노래를 雜歌라 했다. 잡가는 일반 백성이나 하층민의 전문 소리꾼이 부른 노래이다. 이처럼 ‘雜’에는 기층민, 서민, 평민의 삶과 서로 통한다. 우리들의 일상사와
관계 있는 내용들이 포함된다. 잡문 또는 잡가는 서민들과 가장 잘 소통되는 양식이다. 雜에는 수필의 요소를 아주 많이 내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박지원의 양반전, 호질 등 여러 글들이 여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雜’은 저질 또는 나쁨 이라는 뜻으로 우리의 뇌에 각인되어 있다.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저질’이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가까운, 또는 평민, 서민이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글로 옮긴 것이라면 수필의 정의와는 아주 가깝다. ‘雜’의 여러 장단점을 살펴서 수필에 적극 활용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