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김연종 장옥관 조용미 오은 이병연 권혁재 강익수 김소형 박영
사각지대
김연종
시집 한 권 보내고 싶었는데 주소를 물어보기는 겸연쩍고 주소를 알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누구인지 가물거리고
혼사 소식을 들었는데 모바일 단체 청첩장이라 가기도 쑥스럽고 안 가기도 체면이 아니라
계좌번호만 확인했는데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신문 동정란 보고 병원장 등극한 동창 소식 접했는데 축하 전화도 축하 난도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어느새 퇴임 소식
부고를 접하고 망자 대신 장례식장을 확인하는데 주중에는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거리가 멀어
핑계 대신 반가운 계좌번호만 하릴없이 바라보고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말없이 '좋아요'만 누르고 사라진 지인에게
메신저를 통해 안부나 전할까
전화로 직접 목소릴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페친 삭제
----애지 여름호에서
봄꽃
장옥관
활짝, 거짓말이 한 채 얹혀 있다
재개발지구에서 뽑아온 매화
구덩이 파고 기다렸더니 산앵(山櫻)이었다
어제 찔린 손가락에
통증이 남아있다 가시를 빼냈는데도
나무는 나무인데 내가 나를 속인 것이다
아무렴, 속는 줄 알면서 속아
무참한 생이었고
속일 수 있어서 또한 오늘이다
올해 중학생이 된 이웃집 아이가 고개를
숙일까 말까 살풋 지나친다
그래,
손바닥을 활짝, 내일을 펼쳐 보인다
----애지여름호에서
작약을 보러간다
조용미
먼 산 작약
산작약
옆 작약
백작약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간다
당신 없이,
백자인을 먹으면 흰 머리가
다시
검어진다
잠을 잘 수 있다
백자인을 먹으면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측백나무의 씨
운석 같은 열매 속에는
백자인 여섯 알이
가만히
들어있다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간다
----애지 여름호에서
지는 싸움
오은
싸우기도 전에 질 것을 안다
숨을 데도
도망칠 데도 없다
상대는 나를 단번에 쓰러뜨릴 것이다
믿음은 확신으로 뿌리내리고
불안은 공포로 확산된다
질 것을 알면서도
문을 열고
창 앞에 선다
창 안으로
후려치듯 들이치는 것이 있다
흐드러지고
지고
사라지고
눈을 감았다 뜨면 국면이 달라져 있다
불리한 쪽에서 불합리한 쪽으로
불합리한 쪽에서 불가능한 쪽으로
비바람이 불어
창이 없어질 때까지
바람비가 내려
창이 없어졌음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졌는데도
창밖에서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애지 여름호에서
고산 가는 길
이병연
곧은 길 놓고
할머니 등처럼 굽은 길
느릿느릿 간다.
구룡천 따라
빼곡히 박혀 있는 감나무 길
덧대고 기운 길 간다.
휘어진 등으로 하루를 더듬으며
시래깃국으로 삭은 몸 달래던 할머니
주렁주렁 빠진 이 사이로 흘러나오던
얼룩진 이야기 싣고
아픔도 슬픔도 달착지근하여
가을 햇살 아래 누워 있는
고산 가는 길
한 구비 지나면
또 한 구비
멀리 불그스레 앉아 있는 산들
무심히 지나가고
오랜 얼굴 같은 잎들 단풍이 들어
삐걱대는 문에서도 단내가 나던
아득한 그 시절 꽁무니에 달고 간다.
----애지 여름호에서
자리가 비었다
권혁재
한 차장이 면직되고 자리가 비었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신입을 뽑지 않았다
그가 키우던 죽은 나무를 내다 버렸다
먼지에 덮인 의자가
눈치 보며 비꼈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못할 빈 자리
지나간 공문이 폐지 더미로 쌓여도
한 차장을 기억하는 직원은 없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와
붙여대는 담뱃불처럼
한 사람의 청춘이 연기로 사라졌다
----애지여름호에서
사람과 돌의 간극
강익수
눈 깜짝하는 사이
100년이 지나간다
한 걸음 내딛는 사이
1,000년이 지나간다
말 한마디 건네는 사이에
10,000년이 지나갔다
달팽이 걸음은 광속의 행보
하나의 문장이면 수만 년이 걸리는데
너희는 수 초 만에 완성한다
잠깐의 묵언수행이면
너희는 세상의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말의 홍수를 쏟아낸다
종이 다른 소통의 부재는
이렇듯 느림과 빠름의 간극인데
너희는 이를 생물과 무생물이라 한다
100년도 무른 너희들이
빠른 것만 쫓아가니
지구가 돈다
----애지여름호에서
공 명
김소형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빈 병이 혼자 운다
잘록한 허리로 책상 끄트머리에 서서
지잉지잉
무엇이 들어가 너를 울게 할까 생각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흘렀고 꽃이 시들었고
너는 전화를 끊었고 문이 닫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주파수로 울었을 뿐이다
닿지 않는 소리들이 문밖에서 살다가 쓸쓸히 죽기도 하고
먼 데 있는 것이 푸르르 날아와 몸을 울게도 하는데
키 작은 소리들이
애써 닿으려 주파수를 높이고 있다
달의 뒷모습도 모르면서 계수나무가 있다고만 믿어
밤마다 물을 준 사람처럼
종이 뎅뎅 울린다
비어야 울 수도 있다지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가
내 몸속에서 한 세상을 살다 간다
----애지여름호에서
멸치
박영
냄비에 육수를 끓이려 멸치를 넣는다
멸치들은 포기한 듯 순종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하얀 눈알의 백내장 멸치만
입을 얼굴만큼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은빛 날개 휘날리며 하늘로 오른다는 시인의 넋두리에 속았지
어망에 발 담그고 꿈도 꾸기 전
멸치털이에 놀라 날아오르다 꼬꾸라지고
눈알 빠진 멸치는 눈인사 못하고 지나친 멸치
목 댕강 내장 쏙 뺀 멸치는 친근한 멸치
눈알 흰 멸치는 기가 센 멸치
피 말리듯 온몸 물기 말리며
염원은 염장으로
햇빛도 소금도 멸치의 길
고등어 횟집 서비스로 나온 멸치회무침은 잊어
다음 생은 멸치회 전문점에서 만나는 걸로
잡놈들 다 모아놓은
한봉지 싸게 값을 치렀지만
근본 없는 멸치라고 하지 않을게
기장멸치 외포항멸치 여수멸치 통영은 죽방멸치
맛있다잖아 봄멸치
그래요 그래요
눈알 내리깔게요
백내장 수술로 세상이 달라 보이면
악을 쓰던 입은 다물어질까요
----애지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