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벗 삼아 생각하며 걷는 어느 ‘조용한 여행’
/ 오태진
7월 분주령(嶺)은 하늘나라 꽃밭이다.
태백기린초, 하늘말나리, 할미밀망, 꽃며느리밥풀, 큰까치수영, 산꿩의다리, 물봉선, 동자꽃, 일월비비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핀다. 갈 길이 멀어도 길섶 들꽃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한여름 분주령 능선 길은 표범나비 천국이다. 벌보다 나비가 많다. 보랏빛 꿀풀은 물론 가냘픈 범의꼬리에
까지 매달려 꿀을 빨아댄다. 60㎜ 접사렌즈를 바짝 들이대도 꽃에 정신이 팔려 아는 척도 안 한다.
폭우 그친 주말 강원도 태백 분주령 길을 걸었다.
정선에서 태백 넘어가는 옛 38번 국도를 꼬불꼬불 버스로 오른 고갯마루.
'백두대간 두문동재 해발 1268m'라고 새긴 길가 표지석에서 천상(天上)의 꽃길이 시작한다.
숲길을 들어서자 비에 식은 여름 흙 냄새, 풀 냄새가 기분 좋게 밀려온다. 길 오른쪽 금대봉까지 가는
불바래기 능선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꽃 잔치가 벌어진다. 옛날 화전민들이 밭 일구려고 불을 지른 뒤 이곳에
맞불을 놓아 산불로 번지는 걸 막았다고 해서 '불바래기'다.
길은 불바래기 능선을 지나 하늘이 보이지 않는 원시림으로 들어간다.
어둑한 숲 속 생명들이 비를 맞고 화들짝 깨어났다. 모처럼 낯을 씻은 단풍잎이 반짝반짝 빛난다.
바위 이끼, 나무 이끼도 목마름을 풀고 푸르게 일어섰다. 손톱만한 달팽이가 제몸만한 집을 지고 이파리에
붙어 있다. 수풀 속에서 둥근이질풀, 터리풀, 갈퀴나물 꽃들이 점점이 연보라·연분홍 불을 밝혔다.
깊은 숲길은 분주령까지 2.5㎞를 이어간다. 거기서 잠깐 대덕산에 올랐다가 한강 발원지 검룡소까지 모두
10㎞ 길이 편안하다. 내려가는 산길이어서 등산이 서툰 사람도 거뜬하다.
대덕산과 금대봉이 해발 1307m, 1418m이지만 출발점 두문동재보다 40m, 150m 더 높을 뿐이다.
여행사 버스를 타고 온 덕분에 되돌아갈 필요도 없다.
버스는 두문동재에 사람들을 내려준 뒤 저 아래 검룡소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chosun.com%2Fsitedata%2Fimage%2F201207%2F25%2F2012072502577_1.jpg)
승용차 여행이라면 산길을 왕복하거나 버스나 택시를 타고 차 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주령 코스는 두문동재를 다니는 버스가 드물다. 검룡소와 두문동재를 곧바로 잇는 버스 편도 없다.
택시를 타기에도 멀다. 여행사 단체여행에 끼면 그런 번거로움이 없을뿐더러 운전대를 잡지 않아 편하다.
기름값과 고속도로 통행료를 생각하면 돈도 덜 든다. 분주령 트레킹처럼 여행사 버스가 딱 알맞은 여행지가
적지 않다.
그런 장점을 알면서도 좀처럼 단체여행이 내키지 않았다.
관광지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끌벅적한 관광버스를 워낙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러다 분주령 상품을 산 곳이 '김휴림의 아름다운 여행'이다. 이 작은 여행클럽이 추구하는 '차분하고 조용한
여행'에 마음이 끌렸다. '김휴림'은 '흥겨운 여행을 원하는 분은 다른 여행사를 이용해 달라'고 권한다.
우선 버스 안 TV를 켜지 않는다. 버스에선 동행자하고도 꼭 필요한 몇 마디 말고는 대화를 삼가야 한다.
떠드는 사람은 다음 여행부터 신청을 받지 않는다.
여행에 참가하려면 회원 가입부터 해야 한다. 일행은 두 명까지만 받는다. 산악회원은 사절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하는 경우에만 네 명까지 올 수 있다. 한 팀을 두 명씩 나눠 따로따로 신청했다가
일행이라는 게 들통나면 역시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도도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수선한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온다. 홈페이지 '김휴림의 여행편지'는 여행 정보를 풍성하게 쌓아둔 보물창고다.
갈 곳, 먹을 곳, 잘 곳이 지역과 주제에 따라 백과사전처럼 담겼다. 추천하는 여행 코스를 8월 초, 8월 말
식으로 세분해놓아 갈 데 마땅찮은 사람에게 그만이다.
'아름다운 여행'과 '여행편지'를 꾸리는 이가 여행가 김휴림이다.
서울대 나온 공학도가 여행에 빠져 여행업까지 벌였다가 실패를 맛봤다. 나이 마흔에 뒤돌아보니 너무
정신없이 살았구나 싶었다. '쉴 휴(休)'자에 '수풀 림(林)'자로 필명을 짓고 남에게도 쉬어가는 숲이 돼야겠다
맘먹었다. '여행편지'를 열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로운 글과 정보를 올려온 지 10년째다. 일주일에 두어 차례
진행하는 '아름다운 여행'도 500회를 훌쩍 넘겼다.
김휴림은 "안달하지 않고 욕심을 줄이고 기대를 버렸더니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더라"고 했다.
여행클럽도 그렇게 운영한다. 그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가 달라서 많은 사람이 함께 여행할 때
모든 것을 맞춰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들떠서 놀러 가는 것과 여행을 구분한다. 여행이란 일상을 떠나 제시간을 갖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경치 좋은 곳, 이름난 관광지를 피해 조용히 걸으며 생각하는 일정을 짠다.
이를테면 '독서 같은 여행'이다. 김휴림의 버스를 타보니 우리네 단체여행도 분화하고 진화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오래 다물고 있었더니 입안에 가시가 돋는 듯하긴 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