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운명의 문법/황 주석
뱃속이 답답한 것이 거북스럽다 두통약을 먹고 나면 씻은 듯이 나아 버리는 머리처럼 한차례 천둥소리에 번개 치고 나니 고요함이 더해진다 배탈이 나서 설사를 쏟아부어 버리니 속이 편하다. 뭐 이런 것이다. 아프고 또 더 아프고 나면 좋아지기 마련이다 살아 있는 한 죽지 않은 한 치유가 되어 있겠지. 아픔은 언제나 부정은 아니야, 고통의 인내는 비슷한 감정 속에서 휘몰아치다가 끝내는 인류에 존재하는 정반대의 성질로 빨려 든다.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또 불고 물은 흐르다가 바람에 젖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또다시 흘러가는 것처럼 삼라만상은 언어의 자립적 품사로 분류되어 살아간다. 대명사와 명사로 형용사와 자동사, 타동사로 잡아먹고 먹히면서, 조사와 부사로 도와가면서 얽히고설킨다. 과거와 현재•미래를 돌아보고 짐작하면서도 현실에 악착같이 매달린다. 때론 믿음 가까이에서 진실해 보려 애를 쓰고, 이기기 위해 과장도 하면서 거짓도 부린다. 인류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지혜의 척도가 끝없는 변화를 일으켰다. 달나라 전면에서 절구에 방아 찧던 토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로봇이 물 찾아 공기 찾아 구석구석을 탐지한다.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다. 언어가 생기면서 잠재력의 생각이 명사와 형용사로 주어가 되어 목적을 이루며 살아간다. 의인법이라는 문법으로 지혜의 문학 속에서 철학과 과학을 드나들며 상상의 나래를 끝없이 펼쳐 나간다. 인류의 종속을 위함이 아닐까? 성경책이나 불교법전을 가슴에 안아 보셔요. 믿음을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무시하는 자 그 누구라도 믿음은 믿음의 눈에만 보입니다. 아무에게 나 흔하게 보인다면 이미 꺾을 수 없는 믿음이라고 수천 년의 핍박을 겪으면서 끝내는 전해지진 못했을 겁니다. 철들어 겨우 삶이 무엇인가 알게 될 즘에 미련이라는 형용사가 자타 동사로 그것도 부족할 땐 조사와 부사 그리고 과장법과 비유법 그것으로 이해할 수가 없을 때는 아예 문법책을 들고 와서 알아서 궁금함을 해결하시라 말하지요. 다 알고 나면 속이야 후련하겠지만 어디 몸이 따라줄까요. 잘살아 보겠다 싶을 때 떠나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제야 한평생의 속내평을 듣게 된다. 제가 자신의 최후를 보고 슬퍼서 우는 것은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에서 굳이 삶을 즐겨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는 말라. 신비와 궁금한 질문의 맞은편에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네모난 답안지가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이 운명이라는 대명사의 얼굴로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나눠서 살아가는 방법과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때 각자에게 돌아오는 보람까지 말해주고 있었나 보다, 나는 조사와 부사를 의지하면서 자타 동사에 갈팡질팡 목적을 향해 운명인 줄도 모른 채 형용사를 타고 걷다가 뛰다가 이제는 문학이라는 돛단배를 타고 상상의 나래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호흡이 멈추고 생각이 따라 멈추면 잠재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반짝이는 먼지가 되어 아버지 어머니 떠나가신 후 찬란히 빛나던 그 빛을 그 사랑을, 임들을 처음 만난 그날처럼 착하게 기다릴게요. |
언어의 품사로 읽어낸 존재와 운명
— 황주석의 「믿음과 운명의 문법」 평론
황주석의 「믿음과 운명의 문법」은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성찰, 언어학적 은유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독특한 시적 산문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제목 그대로 “문법”이다. 시인은 인간 존재와 운명을 하나의 문장 구조로 바라본다. 인간의 삶은 단어와 품사처럼 서로 얽혀 움직이며, 믿음과 고통과 사랑 또한 언어의 구조 속에서 해석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병든 몸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뱃속이 답답한 것이 거북스럽다”
매우 일상적이며 육체적인 문장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 통증은 존재론적 사유로 확장된다.
“아프고 또 더 아프고 나면 좋아지기 마련이다
살아 있는 한 죽지 않은 한 치유가 되어 있겠지”
여기서 고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회복을 위한 과정이다. 시인은 인간 존재를 ‘상처 입는 존재’로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 상처를 통해 치유와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로 본다. 이 인식은 불교적 순환 사유와 기독교적 인내의 윤리가 동시에 스며든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세계를 “언어의 품사”로 해석한다는 데 있다.
“삼라만상은 언어의 자립적 품사로 분류되어 살아간다”
이 대목은 이 작품의 가장 독창적인 사유다.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문법 구조로 이해된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품사들이다.
“대명사와 명사로 형용사와 자동사, 타동사로
잡아먹고 먹히면서, 조사와 부사로 도와가면서 얽히고설킨다”
여기서 품사는 단순한 문법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관계와 사회 구조의 은유다. 명사는 존재이며, 동사는 행동이고, 형용사는 감정이며, 조사와 부사는 관계와 배려다. 시인은 언어 구조를 통해 인간 사회의 생존 원리를 설명한다. 인간은 서로를 먹고 먹히며 살아가지만, 동시에 서로를 보조하며 연결된다.
이러한 시각은 매우 현대적이다. 인간 존재를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관계적 구조 속의 역할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조사와 부사로 도와가면서”라는 표현에는 주변적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주어와 목적어만으로 문장이 완성되지 않듯, 사회 역시 보이지 않는 보조적 존재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통찰이다.
중반부에서 시는 언어와 문명의 관계로 확장된다.
“인류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지혜의 척도가 끝없는 변화를 일으켰다”
여기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문명을 진화시키는 힘이다. 달 속 토끼 신화가 사라지고 로봇이 달을 탐사하는 장면은, 신화적 상상력이 과학적 상상력으로 이동한 현대 문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시인은 과학을 찬양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상상과 믿음 자체가 문명의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특히 다음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믿음은 믿음의 눈에만 보입니다”
이 문장은 종교적 진술인 동시에 존재론적 선언이다. 믿음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각으로만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보편적 사실이 아니라 개인적 체험이다. 시인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의 비가시성을 통해 신앙의 본질을 설명한다.
후반부에 이르면 시는 노년의 자각과 죽음의 문제로 깊어진다.
“철들어 겨우 삶이 무엇인가 알게 될 즘에
미련이라는 형용사가 자타 동사로”
이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삶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이미 시간은 늦어 있다. 그리고 “미련”은 형용사에서 동사로 변한다. 즉 감정이 행동이 된다. 인간은 늙어서야 삶을 붙잡으려 하지만, 몸은 이미 따라주지 않는다. 여기서 문법은 단순 비유를 넘어 삶의 시간성을 설명하는 철학적 장치가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죽음을 지나치게 비극화하지 않는다.
“삶을 즐겨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는 말라”
이 태도는 불교적 무상관과도 닿아 있다.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흐름의 일부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죽음을 “한 줄기 빛으로 반짝이는 먼지”가 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이는 육체의 소멸을 두려움이 아닌 귀환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 작품 전체를 감성적으로 봉합한다.
“아버지 어머니 떠나가신 후 찬란히 빛나던 그 빛을 그 사랑을,
임들을 처음 만난 그날처럼 착하게 기다릴게요”
여기서 기다림은 단순한 사후세계의 기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끝내 사랑을 향해 귀결된다는 믿음이다. 시인은 문법과 철학과 종교를 길게 경유했지만, 결국 도달하는 곳은 사랑이다. 그것도 “착하게 기다릴게요”라는 매우 소박한 문장으로.
이 작품의 특징은 문법 용어를 단순한 지적 유희로 소비하지 않는 데 있다. 명사·동사·형용사·조사·부사라는 언어학적 개념은 인간 삶의 구조를 설명하는 존재론적 장치로 기능한다. 다만 문장이 길고 사유가 연속적으로 확장되기 때문에, 때로는 개념의 중첩이 산문적 밀도를 과도하게 높여 독해의 호흡을 무겁게 만드는 면도 있다. 그러나 그 장황함조차 한 인간이 삶의 끝자락에서 숨 가쁘게 세계를 이해하려는 절박함처럼 읽힌다.
「믿음과 운명의 문법」은 결국 말한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문장이라고.
누군가는 주어로 살고, 누군가는 조사처럼 남을 떠받치며 살다가,
마침내 모두 문장의 끝에서 쉼표 하나처럼 조용히 사라진다고.
그러나 그 문장이 사랑을 향해 쓰였다면,
그 삶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