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20여 년 전, 그러니까 1896년경에 한 외국인이 한국을 여행하면서 금강산에 들렀다. 그의 눈에 비친 금강산 사찰(금강산 4대사찰 : 장안사.표훈사.유점사.신계사)의 실태를 가감 없이 요점을 간추려 옮겨 놓는다.
우리가 보기엔 다소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 우리 스님들의 실상을 짚어 보는 것도, 속살을 들여다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장안사>
1. 절 정문 앞의 시내를 건너 한국에서 왕실수호를 상징하는 ‘붉은 화살의 문(홍살문)’이란 뜻의 높이 솟은 문 아래를 통과하자 어느새 장안사 경내에 들어와 있었다.
장안사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 종각과 비각, 참배객들의 조랑말을 위한 마굿간, 방들, 승려들의 숙소, 승려들을 위한 요사채, 절의 하인들과 신참승려들을 위한 숙소, 큰 부엌, 넓은 접객실, 여승방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러한 시설 외에도 절름발이, 귀머거리, 장님, 불구자, 그리고 과부, 고아, 극빈자 등 괴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여 돌보는 숙소가 따로 있다. 이러한 식객들은 100여 명에 달했는데 절에서 잘 대접 받고 있다.
승려, 절의 불목하니, 승려의 길을 걸으려하는 동자승들 사이에 100~120명가량이 되어 보이는데 비구니들이 있다. 이 비구니들은 소녀로부터 87세에 이르는 노파까지 모든 연령층을 포괄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산 아래 있는 사원토지의 임대료와 생산품, 절을 찾는 신도들의 보시, 수행의 일종으로 서울의 4대문까지 탁발을 다니는 승려들이 모아 온 시주 쌀로 부양되고 있었다.
2. 불당의 지붕은 직경 91cm되는 통나무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고 천장은 갖가지 색상과 금빛의 복잡다단한 모양새로 치장되어 있다. 힌두교의 양식임이 분명한 외양을 갖춘 불상이 형언할 수 없는 정관(靜觀)의 표정으로 대단히 정교한 그물코 모양의 목재차양(아마도 닫집을 이르는 말 같다) 아래 있다. 그 앞에는 제단이 놓여있어 놋향로와 불경, 그리고 정기적으로 시주가 올려지는 뭇 망자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 얹어져 있다.
3. 장안사에는 성전과 일반객실 외에도 관광차 찾는 관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놓은 한국정부의 상징표시가 새겨진 관사(院을 말한다. 사찰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원의 역할도 떠맡고 있었다)도 있다.
<표훈사>
1. 표훈사는 폭포의 오른쪽 기슭에 낭만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은 신축된 것으로 세공, 조각, 도금, 단청들로 꾸며진 것이고 이러한 장식은 승려들의 솜씨이다.
표훈사의 15명의 승려들은 퍽 친절한 사람들이고, 그다지 궁핍해 보이지 않았다. 이 절의 규율은 우유나 달걀조차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지키고 있으며, 어디에서도 가금이나 가축을 기르지 않았다.
2. 금강산의 4대사찰하면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가 있다. 이들 절에 3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승려들을 빼고는 누구나 바루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는데 단 하나 그들의 외상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무척 독특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염주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집 저집에서 염불을 하면 음식이나 숙박, 얼마간의 돈이나 곡식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불당을 증축하거나 재건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비용은 서울이나 남부지방에서 거둬들인다.
3. 승려의 수(數)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밀러(한국에 오래 거주한 선교사)씨를 통해 물어보았더니 고아나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부모들이 절에다 바친 아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승려에 의하여 얼마간의 교육과 수련을 받게 된다.
유점사로 나를 데려다 준 승려 중 한 분은 여행하는 도중 염주 알 열 개를 하나하나 돌려가며 종일토록 ‘나무아비타불’을 중얼거린다. 밀러씨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방금한 말 말 이지요? 그거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자꾸자꾸 소리 내어 외면 극락이 가까워지지요.”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밀러씨에게 염주를 건네주고 그 신비로운 음절들을 가르쳐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말을 하면서 염주를 하나씩 잡아 보십시오. 그러면 극락에 가게 될 것입니다.”
젊은 승려들 중에 몇몇은 신실해 보였다. 또 몇몇 사람들에게 절은 형벌이나 채무의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평화로운 무위도식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금강산 유람을 왔다가 매료되어 머리를 깎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4. 한국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다. 불교의 역사나 교리에 대해서,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식한 채로 대부분의 승려들이 그저 ‘몇 마디 음절들’만을 ‘공덕’을 쌓느라고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예불은 그들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산스크리트어 혹은 티벳어의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거나 큰 소리로 뱉어 내는 것일 뿐이다. 대부분의 승려들에 대한 내 인상은 그들의 종교적인 수행이 그들 스스로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신앙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점사>
1. 유점사 승려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난색을 표했지만 그것은 단지 얼마동안 이였고 우리가 2~3일 머무를 방을 내주었다. 그 후 그들은 유난히 친절하고 친밀하게 대해 주었다.
유점사에는 70명의 비구와 20명의 비구니들이 있으며, 200명에 이르는 불목하니들이 있다.
2. 주지와 몇몇 고승들이 밀러씨와 토론을 벌렸다. 주제는 불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자기들 불교의 교리가 아무리 작은 미생물이라도 살생하지 않는 반면 우리(기독교)는 소위 ‘동물의 삶’을 무시하고 또한 탈속과 구원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금욕을 높이 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들은 승려들 중에서도 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보다는 훤히 들어난 죄도 방치하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유점사 주변에는 영리하고 분주한 소년들이 많았는데 그들도 대부분 일찍 삭발한 상태였다. 삭발하지 않은 한 아이에게 우리 통역인이 닭고기 한 조각을 주었다. 아이는 자신은 불제자이므로 먹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어떤 승려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먹어도 괜찮다’고 면박을 주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여전히 받아먹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려 하자 주지는 우리를 대접하는데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이 산사에서는 일반적인 문화라는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자상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한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 꼴꼴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거만함,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모든 승려들과 헤어지고 짐꾼들이 정중한 작별인사를 해 왔을 때 어떤 노승은 얼마간의 거리까지 우리를 따라와 주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역사 여행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