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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는, 타임즈로부터, “100년에 한 번 나올만한 목소리”라고 극찬을 받았던, 성악가 배제철씨를 모델로 한 영화입니다. 그는, 동양인에게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는, 독일의 자르브뤼켄 극장에서, 주역 테너로 활동하며, 전성기를 보내는 가운데, 갑상선 암 수술로 인해, 목소리를 잃게 됩니다. 성악가로서, 목소리를 잃는 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 속에 있을 때, 그의 목소리를 사랑한, 일본인 “와지마 토타로”가, 그를 일본 무대에 세우기 위해, 유럽으로 가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잃어으로, 실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는 그에게, 용기를 주며, 재수술을 받도록 노력합니다. 그의 노력으로, 일본의 성대복원 전문의인, 이시키 박사로부터, 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 당일, 이시키 박사는, “예전의 소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수술을 한다고 해서, 성대가 완전히 복원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4시간의 수술로 들어갔습니다. 부분마취를 하고 있던 그에게, 이시키 박사는, 말을 해보라거나 고음을 내보라고 말하더니, 급기야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이시키 박사는, 배제철씨가 얼만큼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면서, 가능한, 이전의 목소리에 가까운 고음을 낼 수 있도록, 성형을 하였던 겁니다. 이때, 배제철씨는, 문득 “하나님께 가장 먼저 드리고 사용하겠다”며, 기도하던 것을 떠올리고는, 즐겨 부르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는데, 차차, 음정과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힘있게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술을 마치고 회복에 들어서자, 와지마는, 그가 재기에 성공하도록, 단독 콘서트를 만들었습니다. 이 무대에서, 배제철씨는, 갑상선 암을 극복하고, 무너진 오른쪽 성대를 안고, “어메이징 그레이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오직,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련은, 배제철씨에게, 그동안 자신이 지내왔던 일들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며 성장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 찬양이 아닌 노래들을 불렀던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점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성기 때 지녔던 목소리의 50%정도만, 회복하였기에, 이제는, 고음을 요구하는, 오페라 가수로서, 무대에는 설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늘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음악이란 코드가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는 것들도 풀 수 있어요. 특히 일본의 크리스천 인구가 현격하게 적은데 음악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면서, 남은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찬송하며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새사람교회 김중기 원로목사님은, “체험이 없는 신학, 자기 실험이 없는 신학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우리 각 개인이, 신앙생활로, 몇 년을 지냈든, 또, 어떤 식으로 지냈든, 그 신앙 속에, 하나님에 대한 체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이 아는, 성경적 지식에 대한 확증이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테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지닌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에 대해, 정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에 대해, 풍부하고, 깊은 지식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오늘날에 존재했더라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들에게 모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이 살아있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겁니다. 우리가 오후에 사용하는 찬미예수 229장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의 가사를 보면,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 주님께 맡기세요 / 우리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 이럴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 주님밖에 없어요 /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가요”라고 합니다. 본문이 있는 시편 71편은, 고난 가운데서, 더더욱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앙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14절을 보시면,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이 시를 보면, 다윗은, 사면초가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길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길을 찾아, 더더욱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지금, 압살롬에 의해 쫓기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 속에서, 그가 찾은 것이 뭡니까? 자신이 항상 피해서, 숨을 수 있는 바위이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지를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히 11: 1을 보시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한 것으로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아직, 내 손에 쥐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내 손에 쥐어지며,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 있다면, 우리가 취할 자세가 뭡니까? 머리를, 짜내고, 짜내는 일입니까? 주변과 도모하는 일입니까? 그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것은, 야곱이 행한 얍복강가의 씨름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기록한 다윗은, 아들을 피해 달아나는 도망자의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백성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다윗이 행할 수 있는 것이 뭡니까? 아들을 향해 칼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보여드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 가운데로 들어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행위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는, 주변에서 조용히 하라고 해도, 무시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소리쳤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을 오직, 예수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리쳤던 겁니다. 또, 가버나움에서는, 중풍병자를 병상에 뉘어, 문으로 들어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는, 예수님 앞으로 내렸습니다. 이 또한 예수님만이, 중풍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이 외에도, 백부장이 그러했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러했습니다.
서울 영동교회의 장로이신 이병욱 박사는, 암을 치료하는 의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약 3,000번의 수술을 하였는데, 재발이 낮다고 그 실력을 평가받은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되는 것에는, 역경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아야 하고, 대부분 위험부담이 따르며, 응급환자가 생기면, 시간을 불문하고, 뛰어가야 했기에, 자신이, 외과 의사라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는, 외과의사로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외과의사야 말로, 꿈이 있으며, 역동적이며, 죽은 자도 살리는 극적인 의사라며, 외과 의사로서의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 주변이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게 되었고, 예전의 자신처럼, 살아가는 자들을 볼 때는, 먼저 가서 전도하는, 전도에 미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쓴 “생활 전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아무리 비정한 곳이라도, 삶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기도하며 전도하면 온기어린 삶의 터전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도시를 세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강남, 영적인 강남, 사랑 넘치는 살맛나는 강남 거리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제가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이후로 날마다 ‘점심시간 전도’를 선포하고는 간호사들과 함께 거리 전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각자 50명씩은 전도합니다. 당장 전도지를 받아 주지 않아도 흐뭇합니다. 다음엔 받을 것을 확신하니까요. 기도하면 주께서 그 마음을 예비해 주십니다. 오늘도 강남 한복판에서, 저는 간호사들과 함께 전도합니다. 비정한 거리가 아니라 예수 복음으로 넘쳐나는 영적인 거리를 꿈꾸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이병욱 박사가 구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찬송하며, 구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비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행하실 때,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또는, 포근함에 둘러싸인 곳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재앙을 통해, 연단시킵니다. 이스라엘이 축복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때, 어디를 거쳤습니까? 광야를 거쳤습니다. 그 곳을 지나는 동안, 그들의 믿음이 씻기고, 씻겼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 역시, 이와 같은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랬기에는, 그는, 본문 속의 고난을 겪으면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해야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고난의 자리에 있습니까? 그 자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행적을 돌아보시며,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내어드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의 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질도, 모양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내어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시고,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더더욱 찬송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 됨을 기뻐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본문과 함께, 렘 1: 5을 보시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합니다. 또, 창 25: 23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눅 1: 42에서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생성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며,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다윗은, 이것을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하나님께서 일찍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에 대해,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확신”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믿음은, 전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 해도, 순간순간, 하나님에 대해, 의심이 일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다음으로 미루고 싶지는 않습니까? 본문 앞의 5절을 보시면,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고 합니다. 믿음이 나약하더라도, 믿음이 적더라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하는 데, 그것을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잘 믿다가도, 어려움을 만나면, 백전백패 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신 31: 19을 보시면,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였던 겁니다. 즉, 어려서부터 신앙교육과 훈련을 받게 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된 우리는, 첫 사람인 아담의 패배를 답습하는 자가 아니라,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승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훈련은, 믿음이 장성할 때까지, 말씀과 기도로 하는 겁니다. 신 6: 7을 보시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합니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 둘은, 수레바퀴입니다. 지식으로만 치우치면, 건조한 신앙인이 되며, 경험으로만 치우치면, 우상숭배식의 신앙인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머리로 인간적인 가능성을 저울질해서, 그 여부에 따라, 믿음도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본문 속의 다윗은 어떠합니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야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구원을 택정하셨음을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에는,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이 있었지만, 연합군이 이끄는 영국에는, 몽고메리가 있었습니다. 롬멜은, 사하라 사막에서, 교묘한 작전으로,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몽고메리가, 롬멜을 물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장병들을 모아놓고, 시 56: 4을 읽어주었습니다. 보시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입니다. 이는, 거대한 상륙작전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누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이길 수 없음을 역설했던 겁니다. 몽고메리의 이러한 신앙고백대로, 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이것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종식시키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지금껏, 수많은 전쟁을 하는 가운데, 백전백승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비록, 압살롬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었지만, 본문에서 그는,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태에서부터 선별하셨음을 찬양하였던 겁니다. 다윗이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다윗의 삶 속에서, 반석이었고, 요새였고, 피할 바위가 되셨습니다. 압살롬에게 쫓기는 다윗을 향해,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러한 말에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여전히, 소망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라며, 고백하였던 것이고,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라고 고백하였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생활이, 우울하든지 괴롭든지, 어렵든지, 더더욱 찬송해야 합니다. 슬픔에 있다면, 더욱 큰 소리로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분의 자녀로 택하셨음을 믿으며,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찬송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이 이토록, 사면초가에 놓이게 된 것은, 이 상황이,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기 때문이며, 또, 다윗이 이제는, 노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앞의 9절을 보시면,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육신의 노쇠함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을 때, 정말, 나의 무력함을 느끼는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이여,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는 간청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처지는, 참으로 절망이었습니다. 본문 속의 상황에서, 다윗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러기에, 삼하 16: 7을 보시면,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그것을 본문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삼하 16: 12을 보시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는 데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면초가에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확률에 소망을 둡니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도모하는데 둡니까? 아니면,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저나 여러분이 행한 것이 아닙니다. 12년간 앓던 혈루병을 치료한 것도, 저나 여러분이 행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할 것은, 우리가 선택할 것은, 항상, 소망을 잃지 않고, 소망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심으로, 날마다 기적을 만들어 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