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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강의도 그렇지만 유식의 강의도 제 분수를 넘어서는 강의라서, 나열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나름 들으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려 하였으나 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그때 근기 따라 법을 설하셨기에, 깊은 말씀과 얕은 말씀이 섞여있고, 출가자와 제가자에게 한 말씀이 섞여있어, 경을 결집하였으나 체계가 없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체계적 정리를 하다보니 이견이 있게되어 부파가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불교가 아미달마(對法)불교, 부파불교입니다.
아비달마 불교가 법을 실재한다고 보고 법을 중시하여 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비중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놓친 것이 있게 되었는데, 부처님의 본생담과, 사념처의 법무아로 대표되는 법공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잡부니까야에 보살의 본생담이 실려있고, 4부니까야의 이야기중 많은 부분이 본생담입니다.)
이렇게 니까야에 비중있게 설해진 본생담을 놓치니 아비달마의 불교에 보살도가 사라지고,
사념처의 법무아를 놓치니 법도 뗏목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법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 법공을 설하여 뗏목과 같은 법에 집착하는 것을 깨뜨리고, 동시에 보살도를 드러내게 되었으니, 대승불교가 그것입니다.
처음에 반야경이 나왔으나 선언적 설법으로 알아듣기 어려웠고, 용수 스님이 중론 등을 저술하여 절묘한 반논리의 테크닉으로 누구나 쉽게 법공을 알게 하자, 모든 법을 뗏목으로 보라는 중관학의 공사상이 세상에 널리 퍼졌고, 그와 더불어 악취공에 빠지는 자가 속출하였습니다.
그것은 공사상은 잘못 이해하거나 나아가 악하게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악취공에 떨어지면 가치상실의 폐인이 되거나 막행막식으로 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게 되니, 그 폐해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섭소문경에는 “차라리 수미산같은 아견을 가질지언정 무아에 빠지지 말라.”하였고, 승랑의 제자 승전은 삼론학의 공사상을 전할 때 “무아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걸 말하면 자신을 망치니 밖에는 전하지 말아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중관학은 아비달마에 통달한 이에게, 즉 법에 통달한 이에게 법에 집착하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기에, 그렇지 못한 이가 바로 알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중관학의 참뜻을 아는 유식의 논사들이 중관학을 잘못알아 악취공에 떨어지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아비달마교학인 법유와 공사상의 공의 결합인 식(환)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식학인 것입니다.
사실 유식학의 대가들은 모두 중관의 계승자들이니, 무착은 중관학의 저술인 順中論을, 호법은 제바의 廣百論 주석을, 안혜는 大乘中觀釋論을 저술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공의 조망을 통해 보니 세상만사가 다 헛것이고 꿈이다. 다 연기한 것이다. 공한 것이다. 하며 공만 얘기하다, 공을 잘못 알아 악취공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는 연기를 얘기하자. 어떻게 이 환상이 만들어 지는가? 어떻게 꿈을 꾸고 있는가? 를 애기하여 악취공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자.
이로써 볼 때, 유식학은 중관학의 연기를 공이라 함에서 다시 공한 연기를 드러내 공에 떨어짐을 막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들은 다리 꼬고 앉는 수행자들이기에 유가행이고, 마음뿐이라는 유식사상을 설파했기에 유식학파이니, 유가행 유삭학파입니다.
이제 이들이 건립한 유식학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1. 유가행 유식학파는 유가행의 수행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고, 오직 마음뿐이라는 유식 사상을 설하는 학파이다.
2. 유식학파의 문헌들:
① 미륵 유가師지론 - 요가수행의 경지에 대한 논문이기에 유가行지론이 정확한 번역
② 무착 섭대승론
③ 세친 유식삼십송
④ 호법 성유식론 - 현장역, 다른 10대 논사의 글도 중간중간에 소개되어 있음,
동아시아 유식학의 텍스트
⑤ 안혜 유식삼십송주석
3. 유식교리의 특징, 5위 100법설 : 설일체유부의 구사론(5위 75법)과 대동소이하나, 다음 4가지가 다르다.
① 법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구사론에서는 법이 실재한다고 보지만, 유식에서는 공의 세척을 거친 법이라, 법은 꿈과 같이 실체가 없다고 본다.
② 순서가 다르다.
구사에서는 색 심왕 심소의 순서이나 유식에서는 심왕 심소 색의 순서로 되어 있다.
※ 구사에서는 심왕을 1로 하였으나 심왕을 8가지로 함 (구사론과 대응시키려면 5위 100법보다 5위 93법으로 하는 게 좋다)
③ 부정법이 다르다.
유식에선 선악을 구분 못해 부정법이라 하였으나, 구사에선 심소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것이 남아 부정법에 넣는다고 하였다.
④ 아비달마보다 무위법이 셋 늘어났다.
허공 택멸 비택멸 (아비달마의 무위법) + 부동멸 상수멸 진여
※ 여기서 상수멸을 주목하라.
색이나 행이나 식은 대상화 되지 않는다.
색에 대한 수와 상만 들어온다.
행도 마찬가지다. (벤자민 리벳 실험에서는 행이 생각보다 앞선다는 걸 증명하였다.)
우리가 인식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수와 상뿐이다.
즉 우리의 의식의 내용은 상과 수일 뿐이다.
유식의 아와 법에 대한 말씀은 다 가설이다.
오직 마음이라는 그 마음도 마음과 물질이란 이분법을 타파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음이랄 것도 없는 것이다.
아뢰야식조차도 모두 연기한 것이기에 실제한다고 보면 안된다.
8식이 모두 의존하여 일어난 의타기 즉 연기한 것이다.
그러니 식만 또는 마음만 존재한다고 집착하면, 그것도 법유와 같이 법집이 되니 잘못이다.
경을 안보면 법집에 걸려 다 자기 사상이 된다.
자주 경을 보아야 정확하게 부첨님 가르침을 알 수 있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식의 사분설 : 마음의 측면을 넷으로 설한 것이다.
5. 종자설 : 설일체유부에서는 과보 받음이 득(도달)이다. 득이론을 종자로 바꿔 종자가 성숙 발아하여 과보를 받는다 것이 종자설이다.
아뢰야식은 종자를 저장하고, 종자가 저장되며, 견분은 7식이 자아로 삼는다.
① 명언종자(인지종자 = 등류습기) : 동인등류과인 성향
착한 사람은 항상 착하고, 악한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습관을 말하는 것으로,
선인선과 악인악과라 표현한다.
a. 명언습기(세계관) - 표의명언 (언어적 세계관)
현경명언 (심상적 세계관)
b. 아집습기(자아관) - 구생아집 (선천적 아집)
분별아집 (후천적 아집)
② 업종자(감정종자 = 이숙습기):
업에 따른 과보를 말하는 것으로, 선인락과 악인고과라 표현한다.
유지습기(有支습기)이니, 유는 업으로 내가 어떤 업을 짓고 살았는가가 바로 유지습기이다.
12연기의 유(有)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생에 어디 갈지가 이것으로 결정된다.
이렇게 내생에 어디갈 지를 결정하는 것을 또한 이숙과라 한다.
(이숙과와 더불어 등류과가 있고, 증상과가 있는데.
이숙과로 태어난 내생의, 내적 상태의 과보가 어떠한가를 결정하는 것이 등류과이고,
외적 환경의 과보가 어떠한가를 결정하는 것이 증상과이다.)
6. 8식설: 유식에서 마음을 설명하기 좋게 의식(6식)을 다시 의식, 마나식, 아뢰야식의 셋으로 세분한 것이다.
사물을 분별하는 요별경식을 의식(6식)이라 하고,
아상 아집 이기심의 구심점을 마나식(7식)이라 하며,
업을 지으면 과보가 생기는 데, 그 씨앗인 종자를 저장하는 식을 아뢰야식(8식)이라 한다.
세상은 6 7 8식으로 나타닌다. 즉 6 7 8식이 세상을 나타내게 한다.
8식인 알라야는 쌓여있다는 의미이다. (희말라야 흰눈이 쌓이다란 의미)
알라야식은 종자가 쌓여있다는 의미이다.
종자가 쌓여있는 식이 아뢰야식이다. 그러니 종자가 성숙하여 과를 받는다.
7식은 아뢰야식의 견분을 자아로 삼는다.
무엇인가?
모든 식은 4가지 측면이 있다.
이걸 식의 4분설이라 한다.
보는 작용인 견분 (거울의 비추는 작용)
보이는 대상인 상분 (거울이 비추는 대상)
봤다는 자각인 자증분 (비추는 거울 자체)
자각한 것을 아는 증자증분이 그것이다. (비추는 거울을 비추는 거울)
모든 식이 이 4가지 측면을 갖는데 견분도 그중 하나다.
팔식의 견분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같다.
이 견분이 자아가 아니구나 하며 무아를 알 때 구심점인 이기심이 사라지고 평등성지가 된다.
7. 삼신설: 진속 이제에 근거한 법신과 화신의 이신설에, 보신을 더하여 유식학에서는 삼신설을 세웠다.
법신은 진리신이니 공성이고, / 보신은 정신이니 종자마음(아뢰야식)이고, / 화신은 육신이니 몸이다.
우리는 성숙하지 못한 화신인 이 몸과 / 성숙하지 못한 보신인 정신, / 성숙하지 못한 법신인 공성을 가진 것이다.
정신으로서의 보신을 추가한 것이 유식학이니,
정신이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정신으로 세상만사가 나타나는가를 드러낸 것이 유식학이다.
8. 불토설: 법성토 보토 화토
법성토 - 깨달으면 나타나는 진리의 땅이다.
보토 - 지전 보살을 위한 보토 즉 기도할 때 나타나는 보토와
깨달아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보살들에 나타나는 보토가 있다.
화토 - 우리가 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화토이니 변화토이다.
9. 전식득지설: 부처님이 되면 식이 지혜로 변한다.
5식은 五根호용의 성소작의 지혜로,
6식인 의식은 있는 그대로 보는 묘관찰의 지혜로,
7식인 마나식은 동체대비의 평등성의 지혜로,
8식인 아뢰야식은 일체마음과 우주전체를 다 비추는 대원경의 지혜로 바뀌는 것이다.
이상은 호법의 유식학으로 신유식이고 현장이 전한 것이다.
10. 진제가 전한 구유식에서는 달리 얘기한다.
① 9식설:
부처님처럼 깨달으면, 하얗고 깨끗한 9번째 마음인 아마라식인 무구백정식이 열린다.
이같이 식이 9식인 무구백정식으로 향상할 때가 성불이고 깨달음이다.
섭대승론을 중심으로 한 구유식의 진제가 전한 것으로, 깨달으면 9식이 열려 8식이 상을 떠난 9식인 백정식으로 바뀐다고 한다.
② 무상유식 유상유식설:
무상(無相)유식은 離象유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으니,
8식이 9식으로 바뀌면 상이 다 깨져 버리는 별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진제 구유식의 학설)
유상(有相)유식은 同象유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으니,
식이 변해 지혜로 바뀌는 것이니 깨달아도 제 3의 것이 들어오지 않는다. (현장 신유식의 학설)
11. 삼성설과 삼무성
원성실성은 완전히 해결된 자성이니, 공성이고 진제이다.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존한 자성이니, 연기성이다.
변계소집성은 두루 분별된 자성이니, 분별성이고 속제이다.
왜 유식에서는 이같이 의타기성을 설하는가?
중관학에서 이제만 설하니, 편계소집성의 속제 벗어나 원성실성의 진제만 추구하여 허무주의 악취공에 빠져 버리는 자들이 속출하기 때문이라,
이에 매개하는 교리로서의 의타기성의 세계를 제시하여 악취공에 빠진 자들을 벗어나게 하니, 유식학의 전체 교리인 것이다.
12. 식의 4분설
호법은 4분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마음을 거울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다.
제4의 거울을 알려면 제3의 거울을 돌려 비추면 되므로 제 5의 거울이 필요 없다.
진나는 3분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마음을 등불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등불을 보기 위해 등불을 또 하나 켤 필요가 없으니, 등불이 자타를 모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4의 등불은 필요 없다.
난타는 견분 상분만 있다하니,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객관 주관과 같다.
안혜는 보았다는 자각인 자증분만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깊이 들어간 것이다.
3분설이든 4분설이든 둘다 가설이니, 옳게 쓰면 방편으로 맞게 되나, 집착하면 둘다 틀리게 되는 것이다.
13. 아뢰야 연기론 (8식 연기)
의타기성이 연기의 세계인데, 의식 마나식의 연기는 쉬우나 아뢰야식의 연기는 어렵다.
이에 아뢰야식의 아뢰야 연기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업을 지으면 아뢰야식에 종자가 생긴다. 자꾸 하면 성숙하게 되니, 종자생종자이다. (참회하면 업장소멸)
마침내 종자가 무르익어 세상만사가 나타나니(일을 겪음) 종자생현행이다.
현행(체험)으로 업을 짓게 되니, 현행훈종자이다.
즉,
종자생종자 > 종자생현행 > 형행훈종자> 종자생종자로 반복됨이라, 내가 만든 것을 내가 받고 다시 내가 만들고 받고 하는 것이다.
14. 번뇌의 성격
번뇌장 - 아집이니 염오무지(탐진치)이고, 무아(아공)를 깨달아 열반을 얻음으로 없어진다.
소지장 - 법집이니 불염오무지(가르침집착)이고, 법무아(법공)를 깨달아 보리를 얻음으로 없어진다.
소지장은 유식에서 주장한 새로운 교리다.
15. 불신관
자성신: 법신이니, 일체 유정이 모두 갖춘 불생불멸한 본래 상주의 진리이다.
수용신: 보신이니, 자수용신으로, 여래의 진짜몸이다.
이것이 진짜 몸으로,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이다.
응신이니, 타수용신으로, 초지~10지 보살을 교화하기 위한 가현의 몸이다.
변화신: 화신이니, 지전(地前) 보살과 범부 중생을 위해 성소작지의 힘에 의해 나타낸 몸이다.
"'여러분 진짜 몸은 여러분 눈에 비친 세상입니다.
여래만이 아니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진짜 몸은 이 몸이 아닙니다.
보이고 느껴지는 정신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몸입니다.
남한텐 절대 안들어옵니다.
운전자 핸들 잡고 바라보는 자동차의 모습, 이것이 진짜 내 몸입니다.
그것만이 내가 사는 세상이고, 세상과 내가 함께 갑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 이게 나입니다.
진짜 나입니다.
그것만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주관의 세계는 절대 남이 들어오지 못해요,
나의 고유의 세계입니다.
주관의 성체, 바로 그게 납니다.
부처님의 몸이 그렇듯이, 지금 아직 부처의 몸이 되지 못한 우리 같은 경우도,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고, 그 다음에 진리 아직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도 내가 아닙니다.
지금 나에 비친 눈에 비친 귀에 들리는 모든 세계들, 남에게 절대 보이지 않는 주관의 세계, 이것만이 진짜 진정한 나입니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걸 해결하는 게 불교의 수행이에요.
다 사라지게 할꺼냐? 또 나타낼 것인가?
번뇌를 나타내면 다 나타나고요, 분별을 내던지 욕심을 내던지 이럴 경우 또 나타납니다. 윤회합니다.
그런데 다 거두면, 번뇌를 제거하고 다시 말해 분별제거하고, 공성을 알고 그 다음에 감성적으로 탐욕과 분노 다 제거할 때, 그때 다 거둬집니다. 열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번 강의의 꽃이자 교수님께서 진정으로 들려주고 싶으셨던 법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 열강을 해 주시느라 너무 애쓰셨습니다. 너무 고맙고 고맙습니다._()_
양순님, 하루 하루 지나가는 것이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듯,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이번에 상민님을 대신해 강의를 올려주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_()_
교수님 말씀대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거둘 것인지 돌릴 것인지가 나에게 달려 있으니, 우리에게 자유는 이미 주어졌다 할 것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시여!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맘대로 쓰는 대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두서없는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_()()()_
- 아래는 잘못 이해한 바를 지적해 주십사 적어보는 것입니다. -
위의 1~15까지를 종합하여 이해한 바를 억지로 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위 100법을 세웠으나, 법은 공한 법이라 나와 법이 모두 가설이라 실재한 것이 아니다.
여덟가지 식을 4분으로 보든 1분으로 보든 아뢰야 연기를 근저로하는 연기가 끝없이 반복하고 그렇게 반복하는 삼무성의 삼성에서,
무아를 깨달아 열반을 증득하니 번뇌장이 소멸하고, 법무아를 깨달아 보리를 증득하니 소지장이 소멸하여 삼신(법신보신화신)을 갖춤에 불토(법성토보토화토)에 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또 전식득지하거나 무구식으로 향상하여 부처님의 몸인 자성신수용신변화신을 구족함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주관의 성채.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되어지는 것만이 내 세상.
절대 주관은 있으나 절대 객관은 없다는
교수님의 열띤 강의가 다시 글로 적히니
감동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많이 늦었네요,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절대주관만 있고 절대 객관은 없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이 말씀을 아직 체득하지 못했어요.
이 말씀을 안다면 항상 혼자 산다는 말씀이 무슨 말슴인지 알텐데 말이죠...
그럼에도 몸우님 같이 이 말씀의 귀중함에 공감해 주시는 분이 있으니 행복합니다.^^
늦었지만 인사드립니다.
수희찬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