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시대, 탕평책과 문치로 나라는 화려하게 포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성은 신음했다. 가난으로
신음했다. 가난은 학정과 수탈에서 나왔다. 1787년 경상 우도로 암행을 다녀온 어사 이서구가
이렇게 보고했다.
"환곡은 생판으로 빼앗는 것과 같아서 환곡이 없다면 참으로 낙토(樂土)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참 불쌍하다."
그래서 환곡을 바치고 나면 백성은 자루를 거꾸로 털어 끼니를 충당하고, 세금은 지방관 개인
돈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1787년 5월 4일 정조실록』)
이서구는 환곡과 군정, 노비에 얽힌 문제를 조목조목 보고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내놓았다.
그런데 폭정은 갈수록 악화됐다. 55년 뒤인 헌종 8년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귀하에 의해
전 전주 판관부터 군산 첨사까지 백성을 괴롭힌 전라도 지방관 26명이 떼로 적발됐을
정도였다. 그 험악하고 가난한 시대에 이서구는 부임하는 곳마다 행정의 기준을 백성으로
삼았다. 암행어사 때 경상도에서 목격했던 모든 모순을 현장에서 해결하려 한 것이다.
1793년 첫 번째 전라 관찰사 시절, 세금을 거두는 대신 창고를 풀어서 백성을 구휼했다.
정조는 '기필코 (백성을 소생시키라’고 그에게 힘을 주었다.(1793년 8월 16일 『정조실록』)
1820년 두 번째 전라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최우선 임무는 '양전'이었다. 토지를 다시 측량해
세금을 산정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서구는 이렇게 보고했다. '양전은 백성 구휼을 위함이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빈궁한 백성이 아직 소생되지 않았는데 세금을 다시 매길
수 없다.' (1820년 8월 2일 『순조실록』) 증세를 요구하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이서구는
반기를 들고, 백성 편에 선 것이다. 이서구의 건의는 통과됐다.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곳곳에서 보인 행적은 대개 이러했다. 순조가 이서구를 우의정으로
발령내자 "이제 국가가 의지할 곳이 있어 백성들은 반드시 소생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고, 이서구가 우의정을 끝내 거부하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남공철, '이서구 묘비명’)
정약용은 '평안 관찰사 시절 선정으로 지금도 평양 주민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정약용,『목민심서』 권3, 애민6조)
이게 일개 관찰사가 전설로 전승되고 있는 근본적인 연유다. 사후에도 당쟁에 휘말려 그
이름은 잊혔다. 안동 김씨 세력은 사후에도 그에게 시비를 걸어 삭탈관직을 요구했다. 순조와
아들 효명세자는 그때마다 허락하지 않았다. 민간의 기억 속에서 그는 단순한 관료가 아닌
구원자로 영생하는 중이다. 요체는 말이 아닌 실천이었다.
- 박종인 저, ‘땅의 역사’ 3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