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루(學士樓)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 중층 누각으로, .함양군청 정면 고운로와 학사로가 교차하는 남서쪽으로 주변에 우체국과 법원, 경찰서 등이 있다. 성리학자로서 영남학파의 종조였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재임할 때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의 시를 철거시킨 것이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구전에는 신라시대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885년 신라로 귀국하여 ‘한림학사’에 임명되고, 890년 이후 함양태수(당시 천령태수)로 있을 때 건립하여 자주 올랐으므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최치원은 매년 반복되는 홍수를 막기 위해 함양을 가로지르는 위천의 물줄기를 돌리고 수많은 나무를 인공적으로 조림하여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의 숲을 만들었는데, 하림은 지금 없어졌지만 상림은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서 객사가 있고 동쪽으로 제운루(齊雲樓), 서쪽으로 청상루(淸商樓), 남쪽으로 망악루(望嶽樓)를 두었다고 한다. 1380년에 왜구의 노략질에 의하여 관아와 함께 전소되었다가 1692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함양국민학교 교사로 쓰여 오다가 1963년부터 군립도서관으로 사용되었으며, 1978년에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1-15로 이건하였다.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문화재 주변의 관리 현황도 양호하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연기념물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 상림 등이 있다.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초석 위에 잘 다듬은 원형의 누하주를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공포 형식은 1출목 2익공으로 첨차는 하부를 쌍S자로 초각(峭刻)하였으며 공포 사이에는 화반을 놓아 화려하게 꾸몄다. 상부가구는 대량과 종량을 둔 5량가로 대량은 위로 살짝 굽은 형태의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그 위로 동자주를 세우고 종량을 받았다.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출입은 중앙 칸에 계단을 시설하여 상부 마루로 오르는데, 마루는 우물마루로 기둥 사이를 장귀틀로 연결한 후 동귀틀을 끼우고 널판을 끼운 일반적인 형식이다. 주위로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남면(南面)하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임할 때, 직속상관에 해당하는 경상감사 유자광(柳子光)이 함양 땅을 방문했다. 당연히 함양군수가 경상감사를 예우로 맞이해야 하지만 평소 그의 사람됨을 싫어했던 김종직은 일을 핑계대고 만나지 않았다. 거기에다 학사루에 올라 지은 유자광의 시판을 김종직이 불에 태웠다. 이후 공교롭게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발단된 사건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유자광이었다. 무오사화(1498)로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고, 제자인 김일손은 처형, 정여창·김굉필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여창과 김굉필은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학사루 건너편 함양초등학교 앞에는 김종직이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느티나무가 그를 대신해서 잘 자라고 있다.
학사루에 걸려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시는 다음과 같다.
齊雲樓快晴 六月十六日
6월 16일 제운루의 쾌청함을 읊으며
雨脚看看取次收。輕雷猶自殷高樓。
어느덧 빗발은 점점 걷히는데, 아직도 천둥소리 가벼이 누각을 울리네.
雲歸洞穴簾旌暮。風颭池塘枕簟秋。
골짜기 들어선 구름에 주렴은 어두워지고, 못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자리가 서늘해지네.
菡萏香中蛙閣閣。鷺𪆁影外稻油油。
연꽃 향기 속엔 개구리가 개굴개굴, 해오라기 그림자 밖엔 벼가 반질반질.
憑欄更向頭流望。千丈峯巒湧玉虯。
난간에 기대어 두류산 다시 보니, 천 길 봉우리는 옥룡 솟은 듯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