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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사제가 바로 창가의 혼
이 장을 읽기 전에
이케다 선생님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들과 간담했을 때 일입니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도다 선생님을 섬겼습니다. 힘들었지만 정말 즐거웠습니다.
도다 선생님께 엄하고도 자애로운 훈도를 받으면서 동분서주할 때가 가장 괴로웠지만 가장 행복하게 보낸 빛나는 추억입니다.
지켜봐 주시는 스승이 있고 투쟁을 보고할 수 있는 스승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잠시 엄숙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가슴을 치더니 “그렇지만”이라고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도 헤매지 않습니다.
나는 사자(師子)입니다. 사자의 ‘사’는 스승을. 사자의 ‘자’는 제자를 뜻합니다.
사제의 마음에 꿋꿋이 사는 사람이 사자입니다.”
사제의 길이 바로 니치렌불법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입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고 인간혁명과 광선유포의 길을 관철하려면 생명을 끊임없이 계발시켜주는 ‘사제’로 일어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쓰네사부로 선생님과 제2대 화장 도다 조세이 선생님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이라는 숭고한 삼대의 사제를 근본으로 일본과 세계에 광선유포의 길을 연 창가학회의 역사가 그 점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장에서는 사제의 중요성을 논한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를 소개합니다.
(25-1) 사제 – 숭고한 혼의 릴레이
이케다 선생님은 불가리아의 아시니아 D.주로바 박사와의 대담집 《아름다운 사자의 혼》 불가리아어판 발간을 앞두고 독자를 위한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인터뷰를 끝맺으며 커다란 이상을 후세에 전하고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제’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아름다운 사자의 혼》 발간 기념 인터뷰에서 (2000년 8월 10일 ‘세이코신문’ 게재)
사제라는 주제는 사람과 단체, 국가에 따라 여러가지로 논의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제가에게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것과 정의를 가르칩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바통터치를 하여 다음 세대에 또 그 다음 세대에 의탁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치가나 교육자, 경제인, 저명인사 중에는 독선적으로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인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독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마음속에는 어느새 탁류(濁流)가 스며듭니다. 오만에 가득 차서 제자나 뒤를 이을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마지막에는 함께 파멸하고 맙니다.
그러지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다음은 이 청년들이, 제자들이 나를 뛰어넘어 큰 성과를 올릴 것이다. 그럴 힘이 있다. 사명이 있다.’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반복해야 인류가 발전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은 나라, 단체, 인생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비참해지고 막히고 맙니다.
‘인간만이 간직할 수 있는 사제라는 존극한 보물을 계승한다.’
이 점을 주시하고 다시 한번 되살려 그 진실된 모습을 실천하는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같은 괴로움과 같은 증오, 같은 갈등을 되풀이하고 맙니다. 나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제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세계사를 보아도 또 메이지유신 등과 같은 일본사를 보아도 위대한 혁명에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스승은 이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혹은 도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내가 그 뜻을 이어받아 실현해야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훌륭한 ‘혼의 릴레이’ ‘혼의 바통터치’의 모습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사제가 없고 오로지 자기 시대에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작은 연극’과 같습니다. 자기만으로 끝나고 맙니다.
한편 대하의 흐름과 같은 유구한 인류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통터치를 하는 릴레이 경주와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제입니다.
불법은 ‘사제불이’를 설합니다. ‘스승이 위, 제자가 아래’라는 개념이 아닙니다.같은 목적을 향해 함께 나아갑니다. 불전(佛典)에 보면 금세의 제자가 내세에는 스승이 된다는 설화도 많습니다.
다만, 스승은 스승으로서 엄연히 존재하지 않으면 ‘화합’이 무너지고 맙니다. 스승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은 어떤 일이 있어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스러워집니다.
‘같은 길을 달리는 주자’가 바로 사제입니다. 똑같은 정의로운 길, 인류를 평화로 이끄는 길, 행복으로 이끄는 길을 계승하여 달립니다. 싸웁니다. 먼저 달리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제자가 바통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으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스승을 존경해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스승이 가르친 것, 미래를 위해 남긴 것을 제자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어 스승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내가 스승이니 나를 따라라. 무조건 내 말을 들어라.’ 하고 말하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스승입니다. ‘나를 뛰어넘어라!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부탁한다. 이루어주기 바란다.’ 이것이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 스승의 구상을 ‘좋다, 뛰어넘어 보자’ 하고 계승하는 사람이 위대한 제자입니다.
(25-2) 스승과 제자는 바늘과 실
사제란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 커다란 이상을 공유하고 계승하는 가운데 참된 인간성을 꽃피우는 최고의 궤도라는 점을 알기 쉽게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나의 인간학》에서
인간이 자신의 사명을 알고 살기 위해, 또 사회를 향상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느낍니다.
오늘날 사제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낡고 봉건적인 인상이 강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학문이든,스포츠든 무언가를 습득하려면 반드시 지도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잘 지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습득도 빠르고 실력도 눈에 띄게 향상합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서 습득하려고 하면 헛수고만 하는 경우도 많고 금방 막히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더욱 유익하게 가장 가치적으로 살려면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이나 인간관 등을 가르쳐주고 지도해주는 사람 즉 ‘인생의 스승’이 필요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신분으로 구분하는 상하관계도 아니고 이해나 보수에 따른 계약관계도 아닙니다. 같은 목적을 함께 나누고 신뢰가 뒷받침된 가장 자발적이고 순수한정신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러한 ‘사람’과 ‘사람’의 유대에서만이 참된 인간이 육성되고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스승,위대한 스승을 만난 인생은 최고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커다란 이상은 스승과 제자가 그것을 공유하고 제자가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아야 비로소 성취되는 법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바늘과 실의 관계로도 비유할 수 있겠지요. 스승이 길을 열어 원리를 제시하면 남은 제자들이 그 원리를 응용하고 전개해 실현합니다. 또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만 합니다. 한편 스승은 제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빛나는 미래의 길을 열어주고 활약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용감하게 희생하자,그것이 내 책임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서원합니다.
(25-3) 제자의 길을 관철해야 가능성이 꽃핀다
이 절(節)에서는 석존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이야기를 들어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하고자 고투하는 가운데 개성이나 재능이 연마되어 자신의 사명과 가능성이 꽃을 피운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청년부기념간부회 스피치에서 (1990년 4월 20일, 도쿄)
잘 아는 바와 같이 석존에게는 ‘십대제자’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 석존 슬하에서 수행에서 좀처럼 얻기 힘든 자질과 개성을 기르고, 그것을 홍법의 무기로 삼아 정법(正法) 유포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십대제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사리불(舍利佛) - 지혜제일. 외도(外道)의 제자였지만 목련과 함께 석존에게 귀의했다. 석존을 대신해 설법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제자였지만 석존보다 일찍 사망했다.
② 가섭(迦葉) - 두타(頭陀)제일. 가섭은 소박한 사람으로 인기는 없었다. 그러나 두타(계율이 엄격한 수행)에 뛰어나고 중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소박한 사람이 석존이 입멸한 뒤에 교단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된다.
③ 아난(阿難) - 다문(多聞)제일. 석존을 상수급사(常隨給仕)한 제자로 부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 온화하고 다정다감해 호감이 가는 청년으로, 출가를 희망하는 여성의 의견을 석존에게 간청해 비구니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④ 수보리(須菩提) - 해공(解空)제일. 공(空)을 잘 깨달아서 이렇게 불린다. 성격이 온화하고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말하자면 인격이 원만한 타입이었다.
⑤ 부루나(富樓那) - 설법제일. 유창한 웅변가였다.
⑥ 목련(目蓮) - 신통제일. 신통에는 신족통(神足通)이라는 의미도 있다. 시방(十方)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단짝인 사리불이 ‘사고파(思考派)’인 데에 비해 목련은 이른바 직관력이 뛰어나고 정열이 넘치는 ‘행동파’였다.
⑦ 가전연(迦旃延) - 논의제일. 치밀한 ‘이론파’로 다른 종교와 논쟁하거나 석존의 가르침을 해성하는 활약을 했다.
⑧ 아나율(阿那律) - 천안(天眼)제일. 아나율은 석존이 설법할 때 졸다가 석존에게 질책을 당한다. 아나율은 반성하고 나서 계속 잠자지 않는 수행을 했는데 너무 무리한 나머지 장님이 되었다. 육체의 눈은 잃었지만 남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과 판단력을 겸비한 천안을 얻었다.
⑨ 우바리(優婆離) - 지율(持律)제일. 당시 인도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특별한 역량은 없었으나 석존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호지(護持)했다. 이른바 ‘서민파’의 대표다.
⑩ 나후라(羅睺羅) - 밀행(密行)제일. 밀행이란 ‘면밀한 수행’ ‘정확한 수행’ 이라는 뜻이다. 나후라는 석존이 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로 열다섯살에 수행을 시작한다. 석존의 아들이라는 이뉴로 고생도 했지만 그만큼 세세한 점까지 알아차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여러 경전에 이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종합하면 대략 이러한 인간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석존은 성향이 전혀 다른 제자 열명의 ‘개성’을 멋지게 꽃피웠습니다.
청년 석존을 중심으로 출발한 신흥 ‘불교교단’은 조직도 건물도 신용도 무엇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석존과 제자들의 ‘사제의 유대’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출발할 당시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런 가운데 제자들은 석존의 마음을 이어받아 홍교에 힘썼습니다.
석존은 제자를 입문시키면 곧바로 홍교에 나서라고 지시했습니다. ‘혼자 가서 설법을 설하고 오너라.’ 즉시 ‘두루두루 다니며 교화하여라.’ 하고 말입니다.
홍교에는 모든 수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뛰어난 ‘인간수행’은 없습니다.
따라서 근본인 이 실천을 잊으면 ‘인간 연마’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장하지 않으면 조직의 힘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조직의 암적인 존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철저하게 홍교를 실천하는 일이 바로 불법의 생명입니다. 그것이 석존의 가르침입니다. 특히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신명을 바쳐 문하에게 보여주신 성불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십대제자는 처음부터 ‘자신은 이것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불도수행에 힘쓰고 교단을 건설하기 위해 고생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개성을 갈고 닦아 저마다 ‘가장 자신 있는 기술’ ‘무기’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실천은 온몸에 새긴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하려는 제자들에게 한순간 한순간은 목숨을 건 승부고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법전이었을 것입니다.
또 스승 쪽에서 보면 제자들에게 ‘행동’을 시켜봐야 가능성과 적성 등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겉모습만 봐서는 좀처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단련하고 또 단련해야 비로소 자체현조(自體顯照)할 수 있습니다. 생명 깊숙한 곳에서 ‘개성의 다이아몬드’가 빛을 발합니다. 이러한 ‘인간성의 꽃’은 정치나 경제 차원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또 교육으로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명을 연마하는 신심수행의 깊은 의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25-4) 사제가 바로 니치렌불법의 근간
이 절(節)에서는 니치렌 대성인이 강조하신 ‘사제’의 중요성을 들어 ‘사제불이가 바로 광선유포를 영원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제2총도쿄 최고간부협의회 스피치 (2008년 4월 5일, 도쿄)
‘이체동심’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사제불이’로 끝까지 사는 것입니다. ‘사제불이’가 바로 ‘이체’를 ‘동심’으로 만드는 요체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심에 힘쓰는 이케가미 형제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송구스럽지만 두 사람이 함께 니치렌을 (스승으로서) 존귀하다고 생각하십시오. 만약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 두 사람에 대한 (제불, 제천 등의) 가호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십시오.” (어서 1108쪽, 통해)
한사람 한사람이 스승에게 마음을 맞춰 광선유포를 위해 전진하겠다고 깊이 다짐해야 이체동심의 단결이 단단해집니다. 거기에 묘법의 공력이 찬연히 발휘됩니다. 성훈을 더 배독하겠습니다.
“니치렌의 제자라고 말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니치렌과 같이 할지어다. 그렇게 한다면 석가(釋迦), 다보(多寶), 시방(十方)의 분신(分身), 십나찰(十羅刹)도 지키시리라.” (어서 989쪽)
“만약 법사(法師)에게 친근하면 조속히 깨달음의 길을 얻을 것이다. 이 스승을 따라서 배우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1070쪽, 통해)
“제자와 스승의 마음이 다른 기원은 물 위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아서 이루어질 리 없다.” (어서 1151쪽, 통해)
“법화경의 대해와 같은 지혜의 물을 받은 스승을 잊고 다른 곳에 마음을 옮기면 반드시 지옥 등의 육도를 떠돌아 괴로움의 생사를 헤매는 화(禍)를 당할 것이다.” (어서 1055쪽, 통해)
성훈 하나하나에 명확히 나와 있듯이 불법의 진수는 ‘사제’에 있습니다.
닛코(日興) 상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의 이 법문은 사제의 길을 바로잡아 성불한다는 가르침이다. 사제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똑같은 법화경을 수지해도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사도지방법화강중전답서>)
‘사제불이’가 바로 성불을 결정짓는 근간입니다. 그리고 ‘사제불이’에 바로 광선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논한 대로 닛코 상인과 배신자의 오노승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사제불이’입니다.
닛코 상인은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어본불’로 올바르게 배알하고 어디까지나 자신을 ‘니치렌 대성인의 제자’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비해 오노승은 권력에 아첨하고 탄압을 두려워해 어리석게도 자신들을 ‘천태사문’이라고 자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민을 위해 한자와 가나(일본 고유의 글자)를 섞어 쓰신 대성인의 편지 등을 스승의 치욕이라고 하면서 불태워버리거나 풀어서 다시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오로지 닛코 상인만이 한자와 가나를 섞어 쓴 어서를 소중히 지키고 장차 번역하여 중국과 인도 등 세계로 전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하셨습니다.
(닛코 상인은 “일본의 대성인의 성훈도 광선유포할 때는 또한 가나문자를 번역하여 인도와 중국에 유통해야 한다.” <어서 1613쪽, 통해> 하고 말씀하셨다.)
엄숙하게 ‘사제불이’를 관철하신 닛코 상인과 그러지 못한 오노승의 차이는 너무나 뚜렸했습니다.
광선유포는 ‘사제불이’를 관철해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제’라는 기둥이 없으면 자신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고 시대의 상황에 휩쓸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없으면 난을 만났을 때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닛코 상인은 대성인이 입멸한신 뒤에도 반세기가 넘는 동안 사제불이의 준엄한 투쟁을 관철했습니다. 열렬한 집념에서 나온 파사현정의 법전은 오노승의 사의(邪義)를 완벽히 무너뜨렸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신 지 50년이 됩니다. 나는 선생님의 직제자로서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만년에 빛날 ‘제자의 길’ ‘후계의 길’ ‘불이(不二)의 길’을 규범으로서 확립했다고 확신합니다.
(25-5) 생애 ‘제자의 길’을 관철하다
일본 불교가 타락한 원인은 사제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대성인의 말씀을 바탕으로 창가학회는 삼대(三代) 회장 그중에서도 이케다 선생님이 사제의 길을 철저히 걸어왔기에 광선유포의 길을 열었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본부간부회, 가나가와현총회 스피치 (1998년 2월 3일, 도쿄)
왜 일본 불교는 타락하여 이상해지고 말았는가. 니치렌 대성인은 ‘그 이유는 스승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히에이산은 일본 불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창시자인 전교대사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진언종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도 유행을 타고 싶다.’
“나의 스승이신 전교대사는 아직도 이 사실을 상세하게 배우시지 않았노라. 한토(漢土)에 오래 계시지 않은 고로 이 법문은 황당히 보았으리라 생각하고”(어서 280쪽) 즉 “우리 스승인 전교대사는 진언종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지 않으셨다. 중국에도 오래 유학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진언의 법문은 대략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자기들이 더 잘 안다’, ‘자기들이 더 공부했다’, ‘스승은 잘 모른다’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증상만입니다.
그리고 스승인 전교대사를 버리고 유행하던 진언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실은 전교대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언은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에 관한 역사는 <선시초>에 나와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기에 히에이산은 ‘진언의 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성인은 “근본인 전교대사의 대원적(大怨敵)이 되었느니라.” (어서 369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전교대사의 대원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악(邪惡)과 싸워야 할 때 제자가 싸우지 않았습니다. 스승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은 좋은 사람인 양 싸우지 않고 난을 피했습니다. 교활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천태는 보시지 아니하였으므로 천태의 말학(末學)들은 지혜도 얕았기 때문에 그런가 하고 생각하였느니라.” <어서 301쪽> 등)
어리석은 겁쟁이라서 스스의 위대함도 모르고 선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법의 청류(淸流)가 점점 탁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보은초>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스승의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속으로는 스승을 깔보고 사악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싸우지 않을 뿐 아니라 악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권력의 마성(魔性)과 싸우지 않으면 자기가 마성에 젖어들고 맙니다.어서에는 이런 중요한 방정식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또 이러한 불교계의 타락 구도는 결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서를 잘 배독하기 바랍니다.
창가학회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정신이 사라지면 큰일 납니다. 광선유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승께 죄송합니다. 니치렌 대성인께 죄송합니다. 그래서 나는 살고 또 살아서 엄연히 지휘를 하고 스승의 ‘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니치렌 대성인 시대에도 증상만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대성인의 방식이 잘못되어 대난(大難)을 당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문하가 있었습니다.
죄가 없는데 대난을 당하는 이유는 ‘법화경 행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그러한 인간을 ‘타종을 믿는 방법(謗法)의 사람보다 더 오래 지옥에서 괴로워하게 된다. 불쌍한 일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도리어 니치렌을 교훈(敎訓)하고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벽인(僻人)들이 염불자보다도 더 오랫동안 아비지옥에 있게 될 것은 불쌍하다고 할 수밖에 없구나.” (어서 960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제의 길’을 파괴하는 죄는 이만큼 무겁습니다. 닛켄종도 그렇습니다. 대성인과 닛코 상인을 비롯해 역대 선사(先師)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그저 ‘자기 중심’입니다. ‘사제의 길’을 파괴한 종문에 더 이상 불법은 없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대원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제자의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하 《도다조세이전집》 제3권)
“닛코 상인은 니치렌 대성인을 뛰어넘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셨다. (조금도 없으셨다.) 우리도 오로지 마키구치 선생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고 실천해 우리 생활 속에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선생님은 스승이고 우리는 제자다.”“선생님 말투를 흉내만 낸다고 무엇이 되겠는가. 성수(聖水)를 버리는 행위와 같다.”
“제자는 제자의 길을 지켜야 한다. 말도 실행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나타내야 한다.”이것이 도다 선생님의 유언입니다. 간단한 말인 듯하지만 탄압을 받자 이 말대로 실행한 사람은 오직 도다 선생님뿐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퇴전했을 뿐만 아니라 ‘마키구치 녀석’ ‘도다 녀석’이라고 욕까지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섭습니다. 스승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만 살 길을 찾았습니다. 가짜 신심입니다. 축생의 마음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전멸한 가운데 도다 선생님은 홀로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고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마키구치 선생님)의 광대무변한 자비는 저를 감옥까지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모든 불국토에 늘 스승과 함께 태어난다)는 묘법연화경의 한 구절을 몸으로 읽고 그 공덕으로 지용보살의 본사(본사)를 알아 법화경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신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마키구치 선생님의 3회기 법요 때 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숭고합니까. 이것이 학회가 나아가는 ‘사제의 길’이자 ‘불법의 길’입니다.
스승과 함께 대난을 받으면서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제자와 천양지차입니다. 불법을 넓히면 당연히 난이 일어납니다. 법화경 권지품에 “악구매리(惡口罵詈)”(법화경 418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대성인도 어서에서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난이 일어나면 박해를 두려워하고 공교롭게도 은혜를 입은 스승을 나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 얼마나 비겁한 짓입니까.
나도 오로지 혼자서 도다 선생님을 지켰습니다. 혼자서 도다 선생님을 끝까지 모셨습니다. 학회의 ‘전통의 2월’도 오로지 ‘도다 선생님께 보은하자.’는 일념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1952년)는 도다 선생님이 회장은 되셨지만 좀처럼 홍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선배들은 으스대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도다 선생님이 “어쩔 수 없구나. 이제 슬슬 다이사쿠를 내보내 볼까.” 하고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스승의 엄명이었습니다. ‘하겠습니다’ 나는 스승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단번에 돌파구를 열어 길을 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광선유포의 ‘대도’를 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늘 “다이사쿠에게 맡겼으니 나는 유유히 위스키나 마시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이사쿠가 하면 반드시 승리한다.’ 이렇게 확신하셨습니다.
이 사제불이가 바로 확회의 진수입니다.
어쨌든 나에게는 ‘니치렌 대성인’과 ‘도다 선생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본존’과 ‘도다 선생님’ 그리고 ‘성실’이 내 ‘세가지 보물’입니다. 나는 성실로 승리했습니다.
온갖 욕설과 험담을 들으면서 가장 올바르게 살아 신심으로 승리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승리했습니다. 불법의 눈으로, 삼세의 눈으로 보면 내가 가장 승리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25-6) 정의로운 스승을 구도하자
성훈을 배독하고 구도해야 할 정의로운 스승은 난을 받으면서 광선유포의 길을 여는 존재이고, 이는 다름 아닌 창가 삼대의 사제라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본부간부회, 전국장년부간부회, 규슈총회 스피치 (2006년 3월 9일, 도쿄)
‘사제계약어서’라고 불리는 <사이렌보답서>의 한 구절을 배독하겠습니다.
“지금 시대는 스승 중에 정사(正師)와 사사(邪師), 선사(善師)와 악사(惡師)가 있다. 그 차이를 알고 사악한 스승을 멀리하고 정의로운 스승에게 다가가 가깝게 지내야 한다.” (어서 1340쪽, 통해)
스승이라고 해도 정의로운 스승이 있는가 하면 사악한 스승도 있습니다.
‘정의로운 스승을 구도하라! 사악한 스승을 피하라! 그 차이를 예리하게 간파하라! 결코 속지마라!’ 이것이 연조(蓮祖, 대성인)의 준엄한 훈계입니다.
사악한 스승을 따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모든 사람이 악에 물들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도해야할 ‘정의로운 스승’은 누구인가. 그것은 삼류강적(三類强敵)과 싸우고 신명을 아끼지 않고 묘법을 부르고 넓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법화경이 설한 대로 ‘난’을 받고 있느냐 없느냐. 대성인은 그것을 가장 큰 안목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법화경을 알고 법화경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우쭐대는 무리에게는 ‘니치렌처럼 난을 당한 적이 없지 않은가’ 하고 엄하게 되받아치고 힐책하셨습니다.
대성인의 생애는 그야말로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비열한 참언 등으로 두 번이나 유배되었습니다. 참수도 당할 뻔했습니다. 수많은 난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두 경문대로입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난을 당하지 않고 겉모습만 그럴듯한 자는 모두 올바르지 못한 스승이다. 온뭄으로 난을 받은 니치렌이야말로 ‘정의로운 스승’이다.” 하고 엄연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본불 대성인에게 직결하여 ‘유다원질(猶多怨嫉)’ ‘악구매리’의 난을 받으면서 말법 오탁악세의 현대에서 세계 광선유포의 길을 연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초대, 제2대, 제3대로 이어지는 창가의 사제밖에 없습니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 선생님은 대성인의 정법정의의 명맥을 지키다 감옥에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감옥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압박을 견디고 목숨을 깎아가며 2년에 달하는 고통을 꿋꿋이 견디셨습니다.
제3대인 나도 광선유포를 위해 무고한 죄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반역자에게 편승해 매출 올리기에 급급한 비열한 언론의 새빨간 거짓말 때문에 수많은 악구매리를 당했습니다.
모두 법화경에 씌어 있는 그대로, 어서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나를 얼마나 훈련시켜 주었는가. 나를 얼마나 소중히 해주셨는가.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실패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때에도 내가 홀로 동분서주하며 선생님을 지켰습니다. 막대한 부채도 모두 청산했습니다.
선생님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사람이 있으면 혼자서 그길로 달려갔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스승의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청년답게 용감하게 성실하게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말했습니다.
난과 싸우는 스승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 기원, 그 행동에 불법에서 말하는 ‘사제의 진수’가 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불이(不二)’였습니다. 도다 선생님과 나 또한 ‘불이’입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사제입니다.
나는 도다 선생님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해 삼류강적과 싸워 창가학회를 여기까지 만들었습니다. 창가의 사제는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 그리고 나로 정해졌습니다.
근본은 삼대의 사제입니다. 삼대에 걸친 ‘사제정신’을 지키는 한 창가학회는 영원히 발전합니다. 세계 광선유포를 반드시 실현할 수 있습니다.
후계인 청년부는 이 삼대가 구축한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혼’을 반드시 계승하기 바랍니다. 승리하기 바랍니다. 잘 부탁합니다!
(25-7) 마음에 스승을 모신다
소설 《신·인간혁명》 여기저기에는 사제의 깊은 의의가 씌어 있습니다. 이 절에서는 야마모토 신이치 회장이 늘 마음에 스승을 품고 가슴속 스승과 함께 대화하면서 광선유포의 길을 연 준엄한 사실을 엮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소설 《신·인간혁명》에서
(“창가학회가 사회에 열린 운동을 펼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고 묻는 청년부 간부의 질문에)
신이치는 곧바로 대답했다.
“사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네는 왜 ‘사제의 길’일까 하고 의문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제의 길’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사회에 크게 열린 운동으로 펼치는 일은 원운동으로 말하면 원심력입니다. 그 원심력이 강할수록 불법에 대한 강한 구심력이 필요해집니다. 이 구심력의 중심이 바로 사제불이 정신입니다.
최근 청년부원은 사회에서 승리의 실증을 보이려는 기개가 넘치고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의식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광선유포라는 근본목적을 잊으면 사회적인 영예와 입신출세에 급급해 신심의 세계를 경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세간적인 지위나 처지로 사람을 판단하고 서민을 멸시한다면 본말전도입니다. 진실한 인간의 길, 불법의 길을 철저히 걸으려면 사제의 길이 필요합니다.”
불버의 사제관은 제자를 교화하려는 불타인 석존의 자비와 법을 획득하려는 제자의 구도심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사제는 제자의 자발적인 의지가 있어야 비로서 성립하는 혼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대선인과 닛코 상인의 관계만 봐도 명백하다. 사제의 길은 준엄하다. 그리고 거기에 비로소 ‘인간혁명’과 ‘일생성불’의 길이 있다.
신이치는 청년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나도 철저히 도다 선생님을 섬기고 지켜 제자의 길을 관철했습니다. 선생님이 제시하신 목표에는 늘 승리라는 실증으로 보답했습니다. 지면 선생님의 구상이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스승을 배신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만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이치는 내가 말한 것을 모두 실현했구나. 농담까지도 정말로 실현하고 말았다. 나는 말만 앞세우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신이치만 있으면 안심이구나.’
이 말씀은 내게 가장 큰 자랑입니다. 이것이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나는 늘 마음속으로 도다 선생님과 함께 대화합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지금 나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 늘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삶의 규범이 됩니다.” (제17권 제1장 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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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는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사는 일이다. 언제 어떤 때라도 엄연히 기심(己心)에 스승이 잇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사제의 길’을 외쳐도 자신의 마음속에 스승이 없으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스승을 ‘자신의 마음 밖에 잇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스승의 행동도 지도도 자신의 내면적인 규범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승이 자신을 어떻게 보실까’ 하는 스승의 ‘눈’과 ‘평가’가 행동의 기준이 되고 만다.
그러면 ‘스승이 엄하게 말씀하시니까 열심히 하지만 기회를 봐서 쉬엄쉬엄하자’는 요령주의에 빠지기 쉽다. 거기에는 자신의 신심 심화도 없고 인간혁명도 없다. 만약 간부가 그렇게 된다면 불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청정한 신앙의 세계도 이해타산에 젖은 세법의 세계가 되고 만다. 기심에 사제불이의 길을 확립해야만 영법구주가 있다. (제25권 제4장 인재성)
(25-8) 사제는 제자로 결정된다
사제가 바로 ‘부처의 길’ ‘창가의 길’이고 그것은 제자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전국청년부간부회, 한국 진천군 ‘명예군민증’ 수여식 스피치에서 (1998년 1월 17일, 도쿄)
순교하신 창가의 사자왕 마키구치 선생님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늘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내 발자국을 따라 반드시 청년이 이어질 것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마키구치 선생님의 뒤를 이었습니다.
내가 도다 선생님의 뒤를 이었습니다.
내게는 수백만의 여러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뒤따를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더욱더 깊고 강하게 연대를 맺으면서 단호히 이 사자의 길을 뒤따르기 바랍니다.
‘사제’가 바로 니치렌 불법의 정수입니다. 학회정신의 근간입니다.
대성인은 유명한 <화과성취어서>에서 “좋은 제자를 두었을 때는 사제 불과(佛果)에 이르고, 나쁜 제자를 두면 사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사제가 상위(相違)하면 무슨 일도 이루지 못함이라.”(어서 900쪽) 즉 “좋은 제자를 두면 사제 함께 불과(성불)에 이르고, 나쁜 제자를 두면 사제 함께 지옥에 떨어진다. 사제가 상위하면 다시 말해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다르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사제라고 해도 ‘제자가 어떠냐’로 결정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원업은 제3대인 내가 모두 성취했습니다. 홀로 온몸으로 박해를 받으면서 끝까지 싸웠습니다. 나는 승리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청년에게 의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청년부 여러분, 다음은 젊은 여러분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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