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위백규선생, 강진 정수사 삼존 불상 개금 시주기를 짓다
-국가문화재 보물 지정의 중요한 고증 사료로 활용-
장흥 출신으로 조선후기 저명한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이 지은 글이 새로 확인되어 화제다. 이 글은 강진 정수사 목조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시주기이다. 개금(改金)이란 불상의 표면에 금칠을 다시 하는 것을 말하고 시주기(施主記)란 일종의 동참 호소문이나 경과 보고서이다. 이 글은 개금 경과를 적은 글로서 역사 자료로서 더 중요한 기록이다. 원래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5호였는데 국가문화재 보물 승격 지정신청을 위한 조사를 하면서 확인 한 것이다. 정수사 석가여래 삼불좌상은 처음 조성한 기문이 대좌에 쓰여 있는데 이 기록과 함께 존재선생의 개금 시주기가 고증자료가 되어 2014년 12월 보물 제 1843호로 지정되었다. 위존재는 유학에 정통한 학자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제지(支提誌)》라는 천관산 불교유산 사적기를 저술로 남기지만 개별적인 사찰 유물에 대한 글은 처음 발견된 것이다. 특히 최근 국역본이 나온 조선후기 간행 문집 《존재집》이나 1976년 종가 소장 문헌을 망라하여 증보 간행한 《존재전서》에는 실리지 않은 글이어서 새로운 자료 가치가 있다. 대웅전 삼존 개금 시주기(大雄殿三尊改金施主記)라는 제목의 이 글은 원래 《정수사사적기》 또는 《정수사지》로 약칭하는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 여지승람(湖南左道金陵縣天台山輿地勝覽)》에 실린 글이다. 금릉현은 강진의 또 다른 이름이고 천태산은 정수사가 소재한 산을 말한다. 이 사적기의 앞 부분에는 정수사의 건물 배치 그림이 형국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원색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원래 강진 정수사에 있었을 것이나 대흥사를 거쳐 완도, 부산 등지의 사찰로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도내 어느 사찰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수사지》는 1995년 강진문헌연구회에서 국역본(번역 양광식)을 발간한 바 있다. 정수사 삼존 시주기는 부처님의 공덕에 이어 신라 고찰 정수사의 역사성을 적은 뒤 대웅전 삼존상의 금의(金衣)가 오래 되어 신채(新彩)가 필요해 합심 발원한다고 적고 있다. 스님도 나이가 들고 절도 넉넉하지 않아 어려움을 적고 있다. 당시 회인(懷忍)스님은 72세, 겸학(謙學)과 광변(光卞) 스님은 71세. 모연(募緣)에 참여 한 스님은 법현(法賢), 돈명(頓明), 긍환(肯還), 견언(見彦), 치환(致還), 치학(致學), 직언(直彦)이고 선남자, 선여인, 비구, 비구니, 우바새 등의 선근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교종과 선종 스님으로 소임을 나눠 적고 있다. 개금 불사는 3월 25일부터 4월 22일까지로 기간도 적고 있다. 겸학스님의 권유로 사양하다가 신사년(1861년, 영조 37)에 대은암에 있었던 인연으로 글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글을 쓴 연대는 1778년(정조 2, 무술) 음력 6월 하순[戊戌 季夏 下弦]이다. 선생 52세 때이다. 글의 끝에는 “계항거사 위상사백규 서문(桂巷居士 魏上舍伯珪序)”라고 지은이를 밝히고 있다. “계항”은 장흥 방촌의 동네 이름으로 존재선생이 별호로 썼다. “상사”란 생원(生員)을 말하는데 조선 시대에 소과(小科)인 생원과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위존재는 39세때인 1765년(영조 41년, 을유) 생원시에 3등 59위로 입격한다. 존재 위백규선생의 문집을 보면, 강진 오신남 행장, 함평 정민득 유사, 함평 정희득 충효전, 영암 전몽태 묘표, 남원 양산익 묘표, 광주 최창국 묘지명, 옥과 허계 묘표, 담양 정세항 묘갈명, 해남 열녀이씨 정려비명, 나주 보산사우 예성 축문, 장성 하서 김문정공 개위판 축문이 실려 있어 전라도의 여러 고을의 향촌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정수사 삼존 시주기처럼 문집에 실리지 않은 글도 많을 것이고 이러한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찾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이다. 예컨데, 전남대학교박물관이나 곡성군 소재 전남도립옥과미술관에도 존재선생 수필본 간찰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온다. 장흥타임스(2013년 8월 20일자, 존재 위백규선생 문집 국역 완간)에서는 《존재집》국역본 발간을 소개하면서 기념사업회를 조속히 구성하고 문헌 수집과 연구, 활용에 대한 그 절실한 필요성을 제안한 터 이지만, 수년이 흐르도록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선 행정 당국자들의 문화 마인드가 열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료들을 조사 수집 하고 연구 해설하여 선현의 정신을 이어 받고 문림의향 장흥의 전통을 가꾸고 밝혀가야 한다. 그리고 "장흥역사관" 같은 공간을 마련하여 교육과 활용의 센터로서 자리매김 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출처- http://m.blog.daum.net/kht1215/98
* 장흥타임스(http://www.jhtimes.net ; 대표 김상찬)에 문화유산 홍보자료로 제공(2015.04.29 제공, 2015.05.03 보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