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
남궁선순
1990년<예술세계> 신인상
예술시대 작가회 회원. 한국문협회원
한국문협 진안지부 3대회장 역임
현)한국문협 진안지부 고문
시골에 살면, 웬만한 야채류는 자급자족 하지만 생선토막이나 고기류를 살라치면 장날에 맞추어 가야만 싱싱한 것을 구할 수가 있다.
엊그제도 오일장에 가서 풍성한 장구경도 하고, 먹거리도 장만하여 집에 돌아오니 웬 낯선 사람이 마당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구시오?”하고 물으니 “죄송합니다. 저는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 작가입니다. 이 동네가 너무 포근하고 예뻐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산세도 무척 아름답고요.”
우리 동네가 좋다고 하여,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차 한 잔을 대접하게 되었다.
자기는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작품구상도 할 겸 여행을 하며 농촌의 모습과 시골살이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단다.
또, 언젠가는 자기도 귀농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지금 도시인들은 퇴직한 사람, 심신을 달래고자 하는 사람, 몸이 안 좋아 휴양처를 찾는 사람 등 도시를 떠나 시골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귀농, 귀촌 희망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이 막상 시골에 땅을 구입하여 집을 짓자니, 시행착오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 1~2년 임대하여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혹시 빈집이 있으면, 그들에게 내어주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꽃다운 나이 40대 초반부터 틈틈이 지은 집이 대여섯 채.
먹고산다고 식당도 운영하고, 민박으로도 활용했었다.
한때는 2,000~3,000명이 다녀갈 정도로 소득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 닥친 코로나로 손님맞이하기가 꺼림칙하고 부담스러웠다.
나한테는 수입이지만, 외지인들의 출입은 코로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고심을 하던 차였다.
몇 날 며칠 생각 끝에 본채를 제외한 집들의 쓰임새를 바꾸기로 하였다.
우연히 만난 여행 작가의 입소문으로, 조용하고 적적하던 이곳에
인천에서, 서울에서, 세종에서, 전주에서 이주한 분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자연스런 물의 흐름을 우리가 바꿀 수 없듯이 모든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닌듯하다.
다행히도 집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어 각 채로 보면 독립된 공간이다.
평생 선생님으로 퇴직한 교장선생님
아파트 관리소장 하다 퇴직한 사람
자연인이 되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람
사업하다 접고 내려온 사람
몸이 안 좋아 휴양 차 온 사람
자식들은 결혼하고 둥지를 떠나, 각자 제 살길 떠나고 허전하던 차에, 우리 집 울타리 안에 다섯 세대가 함께 살다보니 활력이 뿜뿜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들은 텃밭에 상추, 오이, 토마토 등을 심어 가꾸며 닭장도 손수지어 청계닭, 오골계, 백봉 등 달걀을 먹는 재미로 토종닭도 키운다.
텃밭에 잡초 뽑고 퇴비주고 닭장에 모이주고 산길 따라 올라가 산책하고, 운동 삼아 동네 한바퀴 돌으랴 철따라 지천에 깔린 쑥 뜯고 고사리 꺾으랴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고 살만하단다.
낮에 몸 부리며 움직이니 불면증에 시달리던 사람은 잠도 잘 온단다.
이제는 동네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형님, 동생하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어 잘들 놀고 있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하루를 그냥 재미있게 산다는 것 자체가 보람인 듯하다.
물론 우리가 중재역할도 하지만, 예의바른 도시인들과 천성이 착하고 순한 시골사람들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서로가 잘낫다고 하면, 이야기가 안 되지만 나한테 없는 것이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한 발 물러나면 매우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동네사람들이 읍내에 나갈 일 있다면 서슴지 않고 차편을 내어주고, 동네사람들은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고 수확한 농산물을 한 주먹씩 쥐어준다.
겨울이 되어, 집안에 눈이 쌓이면 함께 치우고 여름장마 때에는 비를 맞으며 물고랑을 같이 낸다.
사람 좋아하는 남편은 가끔 그들을 불러 모아 막걸리 한 사발 나누다 보면, 뭐가 그리 궁금한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한다.
가끔 삶아 말린 시래기 한 줌 내주면, 그들은 택배를 타고 공수해온 맛있는 도시음식을 맛보여준다.
이렇게 함께 살던 두 사람은 살림에 대한 공부를 틈틈이 하며 임업후계자 자격을 취득하고, 인근에 토지를 구입하여 어엿한 귀농인이 되었다.
자격증을 취득하던 날 진안의 명물 흑돼지를 사들고 와 구워먹으며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땐 가슴이 찡하고 뿌듯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가끔 전화상으로 비닐하우스 짓는 요령과 겨울철 난방에 대하여 물어오기도 한다.
우연히 맺어진 인연이 그들에게는 새 삶의 전환기가 되었다고 하니 알찬 보람을 느낀다. 도심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다보니 이것저것 다 잊고 속편하게 자연에서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듯싶다.
진안군은 오래전부터 귀농, 귀촌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유능한 농민운동가 박사님이나 교수님을 초빙하고 군청에서는 담당부서를 신설하여 전국의 지자체 중 귀농 1번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지금도 귀농귀촌지원센터를 운영하며 의식 있는 직원들이 귀농, 귀촌 희망자들을 상담하고 교육하며 빈집과 일터알선 등 열심히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단체의 역할이 더욱 활성화 되어 우리고장의 활력소가 되길 기대해본다. 여기에서 발행하고 있는 “잇다”라는 책자는 꽤 참신하여, 받는 날 즉시 읽고 두었다가 다시 읽는다.
“잇다”라는 의미는 도시와 농촌을 이어준다는 뜻일 게다.
살면서 「잇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과 자연
가족 또는 이웃
노인과 젊은이
좌와 우
남과 북의 교감
그러고 보면, 우리 집도 도시인들에게 농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 몫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민박을 하지 않으니 손님이 다녀가면 쓰레기 치우거나 청소를 안 해도 되어, 늘그막에 편해지라는 팔자인가보다.
또, 그들이 매달 쥐어주는 집세는 가계에 쏠쏠한 보탬이 된다.
근 30년 시골살이 했더니만, 수고했다고 주는 농부퇴직연금인가 보다 그들이 사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조금 더 신경 쓰고 고향집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주룩주룩 내리던 가을비가 그쳤다.
산천의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앞산은 흐르는 안개로 모습이 수시로 바뀐다.
하나의 봉우리가 두 개로 보였다가 다시 하나로 뭉치고.
오묘한 자연의 신비를 느낀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동요가사가 입가에 맴돈다.
대청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끓여놓고 식는 줄 모르며 끄적여 두었던 원고 뭉치를 더듬더듬 다듬어 본다.
“아! 이것이 사는 것이구나!”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