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죄인들을 용서하실 거라고 말한다. 맞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분명한 성경의 약속이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회개하지도 않는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요 기만이다. 하늘은 털끝만큼의 죄도 용납할 수 없는 곳이다. 하늘이 죄로 오염될 수 있는 곳이라면 왜 이렇게 길고 지루한 죄악의 역사가 진행되었겠는가? 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자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참혹한 희생을 하셨겠는가? 죄는 손톱만큼도 용납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회개함으로 온전히 그분께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살길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죄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보여주는 실례로 남아있다.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에 낯선 행인들이 등장하자 소돔의 건달들이 롯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롯에게 이 행인들을 내어놓으라고 소리쳤다.
(창 19: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에 “상관하리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יָדַע(야다)를 번역한 것이다. “야다”는 알다, 이해하다 라고 번역하지만, 때론 동침하다, 성적으로 관계하다 는 뜻이기도 하다.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에서 “동침”이라는 단어가 “야다”다.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가 만연해서 롯의 집에 나타난 이 행인들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롯은 그들의 이러한 참혹한 짓을 막아 보기 위해 자기의 딸들을 내어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래를 제안해 보지만 그것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의 소굴이 되었다. 도시민들은 쾌락이 사는 동기였으며 죄는 죄로 평가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다 악하고 더러웠으므로 아무도 죄를 죄라고 부르지 않았다. 롯도 점점 소돔의 문화에 물들어 가고 있었으며 그도 영원한 멸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간곡한 간청이 없었다면 어쩌면 롯도 유황 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알렸고 아브라함은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롯에게 도망하여 살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가 주어졌다. 지금 세상은 그때 그 소돔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소돔에 살던 롯처럼 우리의 판단력도 무감각해지지는 않았는가? 바야흐로 불어닥칠 재난에도 무분별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부도덕한 사람들에게서 결정적으로 분리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한 탈출구가 있었다. 노아의 날에도 그러하였으며 롯의 때에도 그러하였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도 그러하였으며, 역시 말세에도 그러할 것이다. 당신의 백성들로 널리 퍼진 죄악에서 떠나라고 명하시는 경고의 기별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또다시 들린다.”(부조, 166) 황급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바벨론의 무너짐을 알리며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호소한다.
하나님 아버지! 끓는 가마 속의 개구리처럼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죄악으로 들끓어 오른 세속의 가마솥에서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이 아침 소돔의 멸망에서 깊은 생각에 빠집니다. 주님, 저희에게 주님의 경고를 들을 귀를 허락하사 민첩하게 움직이게 하시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