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곳 호주는 골프 천국이다.
보통 집에서 30분 정도 안에 부킹만 하면 칠 수 있는 골프장이 있다.
가격도 한국 돈으로 18홀에 4~5만원만 내면 된다.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니 4계절 모두 골프가 가능하다.
호주 사람들은 은퇴하면 주로 3G 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정원을 돌보는 가드닝, 손자 보는 그랜드페어런팅, 그리고 골프다.
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 주 한번씩 골프를 친다.
평일에 출퇴근 시간을 피하면 도로도 안막힌다.
또 평일엔 시니어 할인을 하기 때문에 가격도 30퍼센트 싸다.
비싼 멤버쉽을 들 필요도 없다. 마음 내키는 곳에 가면 된다.
대부분의 경우 같이 시니어 할인을 받는 사람하고 둘이서 친다.
지난 주는 화요일에 노쓰 투라무라에서 치기로 했다.
느지막이 11시쯤 티오프를 하고 끝나니 오후 3시쯤 된다.
마치고 클럽 하우스 야외 탁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잔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니 오후 3시 반쯤...
아직 퇴근 시간이 시작되기 전 이어서 도로는 막히지 않는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파킹 하고 집에 들어가려고 지갑을 찾았다.
나는 보통 지갑 속에 현관 도어 키를 넣고 다니곤 한다.
그리고 그 지갑은 바지 뒷주머니에 넣는다.
이곳은 아직 한국과 같이 디지털키가 일반화 되지 않았다.
맞은편 뒷 주머니엔 스마트폰을 넣는다.
혹시라도 무심결에 흘리지 않으려고 항상 신경을 쓴다.
의자에 앉을땐 행여 빠질까 싶어 앞 주머니로 위치를 옮긴다.
여느때와 같이 현관 문을 열려고 뒷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런데 아뿔싸,지갑이 없다!!!
반대쪽 주머니를 만지니 스마트 폰도 없다.
혹시나 싶어 자동차 안을 샅샅이 뒤졌다. 없다.!!!
아무래도 골프장에서 잃어버린 것 같다.
만약 다른 사람이 가져갔으면 현금,신용카드 2장, 메디케어 카드,
금방 산 골프 드라이브레인지 이용권 등등...아찔하다.
구글페이에도 500불이 들어 있다.
간단한 패턴 입력으로 스마트폰만 켜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일단 찾을 수 없으면 신용 카드는 사용 중지를 시켜야 한다.
그런데 집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인터넷 뱅킹을 못한다.
전화가 없으니 당연히 전화도 못한다.
하필이면 아내는 지금 친구들과 9박10일로 퍼쓰 여행을 갔다.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가까이 사는 아들 부부도 인도네시아 선교 여행 중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12척의 배가 아닌 자동차 뿐이다.
하지만 자동차도 계기판을 보니 연료가 한칸 밖에 남지 않았다.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할 돈도,도움을 요청하러 갈 수도 없다.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해도 전화가 없다.
모든 연락처가 전화기에 있으니 전화 번호 조차 모른다.
일단 골프장으로 다시 가보자....
이미 퇴근 시간이 시작되어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1초가 급한 내 사정은 아랑곳 없이 신호등 마다 긴 줄을 선다.
골프장을 떠난지 한시간 반이 지나서 다시 골프장에 도착했다.
일단 내가 앉았던 곳으로 가보고 없으면 클럽하우스로 가보자..
누가 맡겼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런데 내가 앉았던 긴 나무벤치 뒤의 잔디 위에 지갑과 폰이
포켓 간격으로 나란히 떨어져 있다.
지갑과 폰의 색깔이 검은 색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천하를 얻은듯한 기쁨과 안도감이 몰려 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갑과 폰을 찾기 위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갔다.
길이 막힌다고 내일 가야지 하겠는가...?
18홀을 다 돌고 와서 피곤하다고 쉬었다 갈 것인가?
No way!!! 그것을 찾기 전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지갑과 스마트폰을 통채로 잃어버려 보기는 처음이다.
버스에서 지갑을 잠시 흘린 적은 있지만 금방 발견했었다.
그만큼 잃어 버릴까봐 조심하면서 다녔었다.
이렇게 방심하여 분실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조심을 하여 나의 삶을 지키는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날아갈 수 있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교만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날이었다.
첫댓글 아, 가슴졸이며 글을 읽어 내려갔네요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나쁜게 나쁜게 아니네요
그걸 통해서 또 깨달음을 느끼니 얻은게 더 많은거 같아요
가슴 졸이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해피 엔딩으로 끝났으니 용서해 주세요. ㅎ
드디어 이기자님의 글을 볼 수 있네요! 반갑습니다.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두 주 전 집을 떠나 수 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할 때 동네를 벗어나는 순간 이상한 느낌에 차를 돌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잠그지 않을 경우 저절로 열리는 일도 있다는데 정말 아찔했습니다. 추천 꽝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을 목적지에 도착해서 깨달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 하네요. ㅋ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깜빡 하는 것을 영어로 시니어 모우먼트 라고 하는 것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저도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활짝 열린 현관 문을 보고 도둑이 지레 겁먹고 안들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ㅎ
@이기자 혹시 거주하시는 도시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david 저는 시드니에 거주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지갑보다 스마트폰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인증도 그렇고 뱅킹, 주식투자, 결제----- 전화통화도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가 없어 아무에게도 연락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기계로 인해 완전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
넘 다행입니다^^ 가슴을 쓸어 내리셨겠어요.
요즘은 지갑을 안들고 나왔어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폰에 카드, 연락처, 지도 등등 모두 들어 있으니 별 문제 없지만 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멀리 가지를 못하겠더군요. 전에 누가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되어 오장육부가 아닌 오장칠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웃었는데, 성인들도 이젠 같은 신세가 되었어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전엔 폰이 전화와 문자를 통해 연락 하는 용도로만 쓰였는데, 점점 진화하여 이젠 컴퓨터 기능까지 모두 들어가 있죠. 실제로 요즘 젊은 친구들은 컴퓨터 없이 스마트폰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보이더군요.
지감을 잃어버리고 찾은후 철학자가 되어 돌아오셨네요. 때로는 이런 해프닝에서 우린 무언가를 얻게 되기도 합니다. 멋진 철학자 이기자님..
넘어졌을 때 동전이라도 줍고 일어나야 무릎이 까진 것이 덜 아프죠. ㅎ
맘을 졸이며 글을 읽어 내려오다가 휴~~한숨을 돌렸네요
그래서 제 남편에게도 포켓이 깊은 앞쪽 주머니에 지갑과 핸펀을
넣고 다니라고 말하는데도 습관이 안돼선지 여전히 뒷주머니에 ㅜㅜ
고스란히 되찾았을때의 그 순간!
세상을 다 얻은듯한 그 희열을 비슷한 경험자로서 절절히 공감합니다.ㅎ
아무일도 없이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 다시 감사하게 리마인드 하는 해피엔딩스토리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
정말 다행이어요. 저는 밴쿠버 공항에서 갈아타는 게이트 쪽으로 나가려는데 여권이 없더라구요. 발권하는 기계에 둔거죠. 다행히 그대로 있었고 눈에 띄어서 얼른 찾아 갔는데 잠시지만 어찌나 진땀이 나는지요. 매사 꼼꼼한데요. 실수를 하니까요. 조심하는데도 또 실수를 하면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구나 더 조심해야겠구나 싶어요.
저도 공항 검색대에서 핸백을 두고 게이트까지 갔다가 티켓과 여권을
찾는 중에 핸백이 없어진 걸 알고 난생처음으로 공항내 차를 얻어타고
검색대까지 가는동안 얼마나 가슴을 조렸던지.. 그때 검색대 끝 구석에
밀려있는 내 핸백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TG이 절로 나오더군요.
@비나리 어마나~ 저랑 비슷한 경험을 하셨다니... 반갑게 공감하게 되네요.ㅎ
검색대에서 미처 못챙기신거군요. 어휴... 거꾸로 올라가느라 진땀 빼셨구만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솔향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아찔하네요.. 큰 숄더백안에 핸백을 넣어서
검색통에 넣었는데 검색관이 핸백을 뺀 걸 몰라서 그냥 큰 가방만 들고 갔다가
변을 당한 거였죠. 티켓,여권,돈,카드가 다 든 핸백이라 없어지면 꼼짝도 못할
판국이어서 완전 멘탈 나갈 뻔 했죠. 감사해요 공감해 주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