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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예배에 참여하고 따라오신 여러분들 모두 마음 가운데 우리 선하신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께도 당신 마음에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고 인사하겠습니다. 당신 마음에 주님의 인통이 가득하기를 항상 있기를 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우리 성령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성령이 누구신지 또 그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또 교회를 다님에 있어서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도 성경을 그냥 나를 위한 고해사 정도 나를 돕는 하나님의 영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보다 먼저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보다 더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성령은 나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그 좋으신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이에요. 그 큰 틀 안에서 우리는 나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힘들 때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의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또 그 길로 바르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죠.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해서 하시는 모든 일보다 앞서는 아주 중요한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도 하시는 일이고 또 믿은 다음에도 하시는 일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다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일까요?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전하는 것은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우리 수양회 때도 말씀드렸는데 다시 한 번 들면 내가 죄인이다. 나의 죄를 고발하시고 내가 죄인이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영어로 하면 컨디션이죠. 이것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이 반가워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에 속합니다.
하지만 건강한 믿음과 삶을 위해서 꼭 알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시는 이 책망을 이 일을 우리가 잘 기억을 해야 돼요. 물론 성령님께서 더 많은 일들을 하셔요. 아까 찬양했듯이 우리의 신음, 탄식, 불평, 그것도 세밀하게 들으시는 하나님이에요.
하지만 그것들이 병적으로 되고 멸망의 길로 갈 때는 성령께서 힘을 주시고 세게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성령의 책망의 사역을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본문은 37절로 시작하는데 그 첫 부분에 이렇게 말씀이 돼 있어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라는 말씀이 있죠.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는 것이 마음에 찔렸다는 그 마음에 찔렸다는 건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았다는 것이 다른 말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에 찔린 것인가요? 이 사람들이 베드로가 하는 책망의 말 확신의 말에 틀린 것입니다.
그가 하기를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서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고 했고,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라이 살려내시고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한편으로는 책망의 말이오. 한편으로는 확신의 말입니다. 이 말을 베드로가 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베드로의 말로만 될 일은 아니죠. 그의 입을 통해서 성령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아무리 확신에 찬 확신에 찬 마음으로 말을 전했다고 해도 그의 말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마음이 찔리는 찔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사람을 죽였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을 일은 아니죠.
그들 마음에 정말로 찔림이 있었다 하면 그것은 베드로와 지금 함께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들어야 할 것을 듣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말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았다고 우리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책망을 받으면 사람이 갈 수 있는 방향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러한 책망의 말을 거부하는 거 아니면 화를 내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그 책망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여기서는 책망의 목적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책망이라고 우리가 다 받을 것은 아니지, 사탄도 책망하고 고발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고발은 넘어뜨림, 무너뜨림, 멸망을 위한 것이고, 성령의 책망은 언제나 구원하기 위함이다. 받으면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받지 않으면 심판의 길로 계속 가는 것이 성령의 책망입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경우와 같지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오,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요한복음 3장 18절의 말씀과 같아요.
본문에 기록된 반응은 첫 번째예요. 베드로의 말을 들었고 마음이 틀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베드로와 그리고 함께 있는 사도들에게 묻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까 어찌할꼬 이렇게 묻죠.
그 물음에 베드로가 대답해 주기를
회개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구원을 받으라. 이 패악한 세대에서 구원함을 받으라.
간단하게 하면 죄를 뉘우치고 그 죄에 대한 용서함을 보고 살아라. 죽지 말고 살라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리고 본문 말씀에 마지막에 전하기를 그날에 믿는 자의 수가 3천이나 더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3천이라는 숫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들었어요. 복음의 말씀을 들었어요. 자신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드렸어요. 마음에 찔림을 당했어요. 그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대답을 받은 다음에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이전까지는 유대인들이에요. 이전까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회담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공동체인 것이죠.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세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서로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롭게 된 사람들이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전하 사도행전이 전하는 처음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바이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면 어디든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움직임 몸이 보이나요? 그런데 또 다른 흐름도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으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앞으로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고 다시 떠나온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책망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찔림이 없고 죄에 대한 뉘우침이나 회개도 없어요. 믿음도 없고 은혜도 없고, 기쁨의 교재도 없고 순전한 나눔도 없이 되는 것이죠.
교회 안에 딱 하나 된 연합에 있어야 되는데, 여러 개로 찢어진 분파가 있고, 기쁨과 즐거움은 그 안에서만 있고, 서로에 대한 비방이 있고, 교회 밖에서의 삶에는 거짓과 불의와 방탄과 음란이 있는 것 그게 또 다른 흐름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바와 같아요. 모든 것이 다시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되고, 서로와의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보다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취향이 더 우선시되고, 사랑보다 우리가 부른 사랑보다 성령의 은사를 내세우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도 세상의 칭찬을 받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걱정과 비난을 받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 아니라 역사상 많은 교회들의 현실이었고,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전 세계에 있는 많은 교회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이라고 이만큼 있다는 것이 아니고 더 큰 거는 잘 가는 것이지만 작지만 반드시 있다 웃는 모습이에요.
우리가 물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 왜 교회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뒤로 갈까 하는 것을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교회에 와도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그럴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아직 못 갈 수가 있어요. 음짓하고 뒤로 물러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교회 안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교회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고 또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떠나온 자리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물음이 됩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지난주 말씀을 가지고 대답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힘든 때를 어려운 때를 누구나 다 있죠. 가정에도 있고 인생에도 있고 그렇게 힘든 때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그리고 함께 공동체적으로 지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믿음을 없이 아니면 믿음을 잃어보면서 성령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으로 성령의 힘으로가 아니라 공동체 교회의 힘으로가 아니라 개인적인 힘으로만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지배하는 영이 다스리는 영이 인도하는 영이 성령이 아닌가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려울 때만 그렇지가 않죠. 오히려 어렵지 않고 풍요로울 때 어려움이 지나갔을 때 더 그럴 수 있는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유대인들이나 핼라인들한테 핍박을 받을 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하로 들어갈지라도 하나가 되었죠.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삶이 어려울 때 힘들 때 더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믿음을 지켜요.
하지만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어서 다른 종교들을 핍박할 수 있는 그런 높은 위치에 갔을 때 교회는 부패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는 믿음을 잘 지키던 사람도 이 어려움이 지나가면 믿음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 하나님과의 동행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더 큰 인생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오늘 말씀에 따라서 우리 질문에 대답해 보자면 이것입니다. 마음에 찔림이 없기 때문에 사라지기 때문에 이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지기 때문에 교회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뒤로 간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은 그 들은 말들을 자기들에게 적용한 겁니다.
자기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이죠.
이것은 교회가 부흥하는 곳마다 나타난 현상이고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이고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계속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계속 나타나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온다는 것, 또 설교를 듣는다는 것 거기에는 여러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 중에 아주 중요한 것 하나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때 지적을 받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말씀에 있어서는 더 그래요. 말씀을 듣는데 마음에 찔림이 드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성경이 가진 목적 중에 교훈하고 그다음에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운 기함이 있잖아요. 그 목적과 설교가 갖는 목적이 본질상 같은 것이 설교는 각 교회와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지르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경우처럼 우리가 설교에서도 마음을 찌르는 말을 들을 때에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말씀, 또 나를 멸하기 위해서 무너뜨리기 위해서 주는 말씀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 나를 세우기 위해서 주는 말씀, 나 하나만을 위해 아니라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될 뜻이 있을 말씀으로 주시는 말씀 이렇게 받으면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는 성령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나에게 분명히 주시는 말씀인데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고 나를 사랑해서 주시는 말씀인데 그것을 나를 미워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다면 성령의 역사가 시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영의 역사가 시작이 어떤 역사일까요? 자기 마음이 찔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에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멸망을 위해서 찌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찌른다는 이 단어가 두 군데 나타납니다. 물론 동일한 단어네요. 우리 말로는 찌른다고 번역했어요. 하나는 좀 그냥 찌른다고 하나는 깊이 찌르다는데 깊이 찌른다는 말씀이 오늘 3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깊이 찔림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말하는 것이에요.
예수께서 나무 위에서 죽으셨어요. 그때 한 군인이 긴 창문을 들어서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러자 그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고 하죠. 이 두 경우를 우리가 대조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개를 보는데 하나는 십자가를 지게 하는 십자가에 달린 자의 옆구리를 찌르는 찌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마음에 품는 찔림이죠. 하나는 죄 없는 사람을 만들어 죄를 만들어서라도 찌르는 창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잘못을 고발하는 말에 마음이 찔리고 회개하는 찔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의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남의 옆구리를 창으로 꾹꾹 찌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옆구리는 약한 것 사람의 약점을 말하는 거지 그 사람의 약점을 꾹꾹 찌르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책망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책망의 말을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 번째 일은 분명히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창을 들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옆구리를 찌르는 거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죠.
두 번째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께서 성령을 주인으로 삼는 주의 백성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남의 옆구리 창으로 찌르는 사람들이 그룹들이 많은 기회가 되어 할까요?
아니면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런 일에 대한 책망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찔림을 받을 수 있는 사람, 회개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첫 번째는 적어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 안에서는 사탄이 다스린다는 증거가 되고 두 번째는 교회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이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 분명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또 성령께서 기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가야 할 방향이죠.
또한 각 사람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그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혼자서 나 잘 다니는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는 사람, 연약한 사람 붙들어지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발점은 오늘 말씀이 전했듯이 죄를 고발하시는 성령의 책망이고 그리고 그에 맞는 우리의 반응 곧 마음의 질림과 뉘우침 돌이힘이라는 것이에요. 말씀드렸듯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마음을 찌르시는 것만 즐겨 짓는 분이 아니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필요할 때 의사가 칼을 들듯이 꼭 필요할 때는 하신다 하는 건데, 이 성령의 책망하심에 맞게 반응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여러분 각 사람을 위해서 베푸시는 다른 모든 선한 일, 좋은 일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행하실 수 있게 하는 전제가 된다 하는 것이에요.
이 중요한 부분에서 우리 모두가 다 분명히 바로 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