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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의 공주 파소의 아들 박혁거세
북부여 역사는 시공을 뛰어넘어 신라 역사에까지 이어진다. 먼저 <선도산 성모 파소(仙桃山 聖母 파蘇)>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斯盧始王 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年十三 岐嶷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 爲居西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사로시왕 선도산성모지자야 석유부여제실지녀파소 불부이잉 위인소의 자눈수도지동옥저 우범주이남하 저지진한나을촌 시유소벌도리자문지 왕수양어가 이급년십삼 기의숙성 유성덕 어시 진한육부공존 위거서간 입도서라벌 칭국진한 역왈사로
사로의 시조 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시집도 안 갔는데 아이를 뱄다. 사람들이 의심하자 눈수에서 도망쳐서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가 닿았다. 이때 소벌도리(고허촌 촌장, 사량부 최씨 시조)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아이가 커서 열세 살이 되자 자라나는 모습이 숙성하고 영리하며 또래보다 더 커서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육부가 모두 존중하여 거서간으로 삼았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니 달리는 사로라고 했다」 .
파소(婆蘇)공주의 근본을 알 수 있는 말은 ‘부여제(夫餘帝)의 딸’과 ‘눈수(嫩水), ’동옥저(東沃沮)와 ‘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이다.
먼저, ’帝‘ 자이므로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이나 5세 고두막 단군, 6세 고무서 단군의 딸이다. 고두막이 북부여의 단군이 되기 전의 동명국 왕일 때의 딸이거나 쫓겨간 동부여 해부루 왕의 딸이 아니다. 일연도 이 ’帝‘ 자 때문에 제후의 공주라고 하지 못하고 ’중국 황제의 딸‘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눈수(嫩水)’는 ‘눈강(嫩江)’, ‘넌창강’으로 대흥안령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에서 치치하얼을 지나 남으로 흐르다가 남에서 오는 송화강과 만나 동으로 흐른다. 광대한 평원지역인 이 눈강 유역에 단군조선(辰朝鮮, 辰韓)이 있었다. 기원전 425년 구물(丘勿)이 단군을 승계하면서 나라 이름을 바꾼 대부여(大夫餘)가 있었고, 기원전 238년 해모수가 단군을 승계하면서 이름을 바꾼 북부여(北夫餘가 있었다.
기원전 238년 47세 고열가단군이 붕어하면서 단군조선이 47세 단군과 2,096년 만에 막을 내렸다. [삼성기]는 여기까지를 단군조선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기원전 238년 북부여 시조 단군 해모수부터 기원전 86년 동명국 출신 고두막(高豆莫)이 승계한 북부여 왕조, 기원전 58년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단군조선의 후계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진국 발해와 고려를 단군조선의 정통 후계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수(嫩水)’는 파소공주의 출신국이 ‘북부여’임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눈수는 해모수 단군이 세운 북부여의 영역이다. 압록강 지류 졸본천 유역에서 일어난 동명국 시조 고두막 왕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난 다음 온 조선 땅을 지배하려는 한구(漢寇)와 싸워 이긴 군사력과 명성으로 눈수 유역의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를 압박하여 고민으로 죽게 하고, 고우루 단군의 아우인 해부루 단군을 격하시켜 가섭원 부여왕으로 밀어냈다. 고두막 단군이 눈수 유역의 북부여를 지배하였지만 실질적인 도읍지는 졸본천 유역이었다.
기원전 79년 만주 동남부 지역 가섭원 동부여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도주하여 도착한 곳이 졸본천(압록강 지류 동가강) 유역이고, 북부여 6세 단군 고무서의 딸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기원전 58년에 북부여 단군을 승계하고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파소가 눈수를 건넜으므로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의 공주이다. 기원전 86년 고두막이 고우루를 죽게 하고 단군이 될 때, 오빠 해부루는 가섭원 부여왕으로 격하되어 피하고 파소 공주는 멀리 동옥저로 피했다가 다시 한반도 동남부 경주로 이동했다. 경주에서 기원전 69년에 박혁거세를 낳았고,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진국을 세우고 거서간이 되었다.
기원전 86년경에 피하여 동옥저를 거쳐 경주에 도착하고, 기원전 69년에 박혁거세를 낳기까지 걸린 기간이 17년이다. 그런데 [태백일사]의 기록을 보면 “시집도 안 갔는데 아이를 뱄다”이다. 이어서 “눈수, 동옥저, 배, 남으로, 진한의 나을촌”이다. 공 “소벌도리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임신한 파소가 10개월 동안에 걸쳐 눈수에서 진한 나을촌까지 와서 곧 해산했다는 말이 된다. 그 멀고 험하며 위험한 길을 임신한 몸으로 열 달 동안 걸어서 온다는 것은 이치에 안 맞다.
그러나 밀양박씨 족보에는 “한나라 선제 지절 원년(BC 69년) 임자년 가을 7월에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다.”라 한다. 파소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한다. 우리 밀양박씨 집안에는 추대에 앞장을 선 촌장에 대한 이야기가 가전되고 있다. 특히 손씨는 한집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보면, “시집도 안 갔는데 아이를 뱄다”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파소 공주가 북부여를 떠나 수천 리 멀리까지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매우 절박한 상황과 이유가 있었다. 신분은 공주였지만 이역만리 타향에서 생활은 궁핍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선도산에서 제천 의식을 맡아 하는 역할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辰韓‘이란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도 “이보다 먼저 조선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에서 말하는 ’조선유민“이 바로 ‘북부여유민’이다. 단군조선에서 이름을 바꾼 대부여가 망한 기원전 238년부터 남동으로 이동이 시작되어 위만 침략기에 이어 한사군 침략기에 절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파소 공주는 고두막이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를 위협하다가 차지한 기원전 86년 후에 남하했을 것이다.
단군조선은 광대한 영역을 부여를 중심으로 한 본국인 ‘진한=진조선’과 한반도 지역의 ‘막한=막조선’, 요동-요서 지역의 ‘번한=번조선’ 등 세 조선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기원전 194년 번한-번조선이 위만의 침략으로 망하자 기준왕(箕準王)과 백성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동했다. 이들은 살기 좋은 한강 이남으로 이동하여 기존의 마한 세력과 싸우면서 건마국, 월지국-목지국 등 54개 소국을 이루었다. 이어서 기원전 108년 한구(漢寇)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망하면서 만주 지역 전체가 불안해지자 진한-진조선의 백성들이 한반도 남하했으나 번조선 백성들이 차지한 서남부를 피해 동남부로 이동하여 12개 소국을 이루었다. 경주 지역에 정착한 눈수 유역 옛 진한의 백성들이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여 세운 나라 이름이 그래서 ‘稱國辰韓’아다
또한 중국의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을 보면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 사람이었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진秦과 진한辰韓은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다.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秦나라 때 군軍에 가지 않으려고 달아난 사람들이 마한馬韓으로 갔다고 한다.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떼어 줘서 도망 온 사람들을 살게 하였다. 진秦나라 사람들이 살므로 그 땅을 진한秦韓이라고 불렀다(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 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辰韓亦曰秦韓’이란 말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先是朝鮮遺民’과는 전혀 다르다. 군에 가지 않으려고 도망친 사람이 몇만 명이나 되겠는가. 진시황(기원전 221~210) 때면 요서-요동이 번조선의 강역이다. 도망친들 바다로 오겠는가 번조선 수비군이 삼엄한 육지로 오겠는가. 한사군 설치 문제도 그렇지만 중국의 학자들 중에는 걸핏하면 한자 붓을 휘둘러 ‘기자조선’으로 정신적 지배, ‘辰韓亦曰秦韓’과 ‘한사군’으로 공간적 지배를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
나라 밖에서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자들도 있지만 나라 안에서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여긴 자들도 있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사로국 6촌민들이 일찌기 조선의 유민이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연 김견명은 『삼국유사』 [기이편] <신라의 시조 혁거세와>에서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綱”, “이 6부의 시조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며 엉뚱한 소리를 한다. 환인-환웅-단군을 하늘 귀신으로 만들고, 박혁거세를 알에서 난 이상한 아이로 만들어 놓고도 모자라 6부의 시조들을 모두 하늘 귀신으로 만들었다. 중국 학자들 못지 않은 역사 왜곡이다.
일연 김견명의 이러한 역사 왜곡 작태는 파소공주를 중국황실의 딸로 만드는 데까지 이른다.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三國遺事 第五卷 感通 第七 <仙桃聖母随喜佛事>
神母夲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歸止海東乆而不還.
第五十四景明王好使鷹, 甞登此放鷹而失之. 禱於神母曰, “若得鷹當封爵.” 俄而鷹飛来止机上, 因封爵大王焉.
其始到辰韓也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二聖之所自也.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이다. 이름은 사소(娑蘇)이고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얻어 해동에 와서 오래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이 산에 올라 매를 놓았으나 잃어버렸다. 신모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만약 매를 찾으면 마땅히 작호를 봉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잠시 뒤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멈추었다. 이로 인하여 대왕으로 책봉하였다.
그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대개 혁거세와 알영 이성(二聖)이 나온 바이다.
又國史史臣曰. 軾政和中甞奉使人宋, 詣佑神舘有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是貴國之神, 公知之乎.” 遂言曰, “古有中國帝室之女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祖, 女爲地仙長在仙桃山, 此其像也.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祭東神聖母女有娠賢肇邦之句.” 今能施金奉佛爲含生開香火作津梁,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
또한 국사에서 사신(史臣)이 말하였다. 김부식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우신관(佑神館)에 가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貴國)의 신인데 공은 아는가?”라고 하였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닿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있었으니 이것이 그 상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 지냈는데 제문에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讃屳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본기]에서는 ‘파소(婆蘇)’이라 하나 <仙桃聖母随喜佛事> 에서는 ‘사소(娑蘇)’라고 한다. [삼성기]는 동부여 공주라고 밝히지만 <仙桃聖母随喜佛事>에서는 김부식과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의 말을 인용하여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송나라 우신관(佑神館)의 한 당(堂)에 그 여선상(女仙像)이 있다고 한다.
경명왕의 매사냥 설화도 있지만 신라 초기에 지어진 <선도산 성모 사당>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파소부인은 역사적 사실이다. 『밀양박씨세보』는 다음과 같이 신화가 아니라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漢宣帝地節元年壬子秋七月聖母自仙桃山降于楊山蘿井
始祖誕降有神異祥. 한나라 선제 지절 원년(BC 69년) 임자년 가을 7월에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다.」
‘有神異祥’이라 할 뿐이지,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쏘이는 나정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말이 꿇어앉아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큰 자주 빛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는 신화는 없다. 파소는 북쪽에서 내려온 북부여의 공주이고, 말을 타고 나정(蘿井)에 가서 해산했다. 공주님의 해산이니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구경하고 축하했을 것이다. 부여를 떠나 남으로 내려와 씨족 단위로 흩어져 살던 6촌 사람들에게 북부여를 계승한 북부여 공주가 낳은 남아는 6촌 사람들의 신분을 뛰어넘은 고귀한 신분이었다. 경쟁자 없이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북쪽에서 고구려가 세워졌다는 소문을 들은 6촌 사람들은 아이가 열세 살이 되자 왕으로 추대하고 사로국을 세웠다. 신화는 후세에 필요에 의해서 누군가 만들었다. 신화로 만들어 존귀하게 해준 것은 고맙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바라지 않는 바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사실을 신화로 만들고도 모자라 중국 황실의 딸로 둔갑시켰다. 둔갑도 허술하게 한 게 아니라 겹겹이 포장했다. 일연 김견명이 왜 파소를 사소라 하며 중국 황실로 딸로 만든 작태는 앞에서 설명한 환인-환웅-단군 역사의 짜집기와 왜곡과 이어진다. 파소는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이은 북부여의의연한 공주이다. 그런 공주를 중국 황실의 딸로 둔갑시킴으로서 고려가 중국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광고했다. 이러한 작태는 이후에도 이어져서 고려와 조선의 학자들과 관리들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지우고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식하고 접목시키는데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럼 내가 중국인의 외손이란 말인가? 신라 박씨왕조는 중국왕조의 아류란 말인가? 밀양박씨인 나의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도 참으로 섭섭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동옥저(東沃沮)와 ‘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를 살펴보자.
’눈수‘를 건너 동옥저에 도착한 파소는 배를 타고 동해안 연안을 따라 경주 인근 감포에 도착했다. 그다음으로 찾아갈 곳은 같은 진한 사람들이 사는 경주이다. 파소가 남하한 길은 부여성 농안 장춘-눈수-동옥저-남만주-혜산-개마고원-원산-동해안-경주 길은 그전에 부여를 떠난 진한 사람들이 이미 걸어온 길이다. 그래서 파소도 그 길을 따라 내려왔다.
파소가 동옥저를 거쳐왔다고 했으므로 동옥저의 해부루왕의 딸은 아니다. 그럼 새로 북부여의 5세 단군이 된 고두막의 딸이거나 붕어한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의 딸이 된다. 고우루와 고두막은 사이가 안 좋다. 고우루의 아들인 동부여 왕 해부루도 고두막과 사이가 안 좋다. 그런 사이인데 고두막의 딸인 파소가 동부여를 거칠 수 있겠는가? 원수의 딸을 쉽게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우루 단군의 딸일 경우에는 오빠인 해부루가 통과시킬 수 있다. 가뜩이나 눌려 사는 해부루로서 동생을 함께 살자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파소는 아버지가 죽고 오빠가 동부여로 가고 혼자 북부여에 남았다. 그러나 고두막 단군 치하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이미 북부여의 많은 백성이 정복자 고두막을 피해 살기에 적당하다고 소문이 난 한반도 남동부 경주를 목표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파소도 경주를 목표로 길을 떠났다. 기록으로는 ’不夫而孕 爲人所疑‘라 하지만 그것은 위장이고 사실은 망명이었다. 그러므로 파소의 아버지는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두막의 딸이라면, 아무리 미혼모가 됐다고 할지라도 단군인 아버지 허락 없이 그 먼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또한 고두막이 자기를 거부하고 망명한 진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경주로 공주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임신을 알았으면 상대한 남자를 찾아내어 결혼시킴이 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 마음이자 모든 부모의 인지상정이다. 공주를 임신시킨 자는 영광이자 기회인데 결혼을 하지 않을 도리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러니 ’不夫而孕‘은 이치에 마지 않는다.
그런데 ’時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이 문제다. 파소가 경주에 도착한 이후에 북부여 시절만큼 여유롭게 살지 못한 것 같다. 이 문장은 다중으로 해석이 된다. 일차적인 해석은 소벌도리가 무슨 소문을 듣고는 가서 아이를 거두어 와서 13세까지 길렀다는 것이다. 문장 행간의 뜻은 파소가 아이를 낳고 죽었기 때문에 아이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파소가 살았으면 아들을 남에게 맡길 택이 없다. 이때가 파소가 도착한 직후인지 몇 년 지나서인지는 알 수 없다. 파소와 함께 온 사람들이 많았다면, 파소가 죽었어도 아기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길렀을 것이다. 하여튼 간에 파소가 출산 후에 죽었거나 빈곤했거나 개가했거나 입장이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박씨족이 대거 경주로 왔다는 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많은 상상과 가설을 세울 수 있겠지만, 가장 오래된 사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이 해석의 기본이다. 정리한다면, 북부여단 4세 단군 고우루의 공주 파소가 고두막 치하에서 살 수가 없어 먼저 떠난 북부여 유민들이 살고있는 경주에 도착했다. 곧 아들을 낳았으나 키울 형편이 못 되어 소벌도리 공이 거두어 길렀다. 6촌 연합 체제를 발전시켜 나라를 세우려고 의논하는 사람들에게 고국 북부여 공주의 아들인 박혁거세가 열세 살이지만 영특하고 덕성이 높아 왕으로 세울 만했다. 어린 박혁거세가 영특하지도 않고 덕성이 없었다면 아무리 왕손이라 할지라도 거서간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아무리 왕손이라 해도 자질이 모자라면 거서간이 될 수 없었다. 두 가지를 겸비했기 때문에 거서간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57년 나라를 세워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고, 부여 시대 고국의 국명을 그대로 옮겨 진한(辰韓)이라 하고 또 따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사서도 후래한 박씨족의 정복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선주민인 6촌장의 추대로 어린 박혁거세가 거서간이 되어 사로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 기사는 박혁거세가 북부여 단군의 외손이기 때문에 거서간이 됐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열세 살의 어린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한 원동력은 단군조선을 승계한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손이기 때문이다. 수천 리 멀리 떠나 한반도 남동부 구석진 곳에 살고 있지만 광활한 만주 대륙은 조상들이 살던 그리운 고향이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옛땅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정착한 이 땅에 고국의 왕손을 모셔 왕으로 삼고 ’진한(辰韓])‘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신라 사람들의 생각이 [삼성기] 말미 <북부여>의 ‘乙未漢昭時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라는 문장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만주의 부여가 신라의 옛땅이라고 한다. 즉 고조선 –대부여-동명-동부여-고구려 모두 우리 신라와 한 뿌리라는 말이다.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라 이름을 보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진한‘이란 국명은 안 쓰고 ’서나벌(徐那伐)이라고만 했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다. 그러나 [삼성기]의 <북부여기>는 ‘진한(辰韓)이라 분명하게 밝히고 ’사로‘斯盧’는 ‘또는’으로 말한다.
신라의 처음 이름은 ‘진한’이다. 그런데도 김부식과 일연이 그 국명을 언급하지 않고 별명을 기록한 것은 의도적으로 신라가 ‘진한’이 ‘북부여’에 연결되어 고려인들과 후세인들이 만주 옛 영토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해가 망한 이상 만주는 옛땅이고 고려 땅만이 지켜야 할 국토였다. 이미 거칠고 사나운 오랑캐들이 살고있는 땅을 생각하는 것은 낭비이며, 혹여 북벌의식을 갖는 자들이 후세에 나타나 옛 영토를 수복하고자 할 때 벌어질 전쟁의 참상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진한’이란 국명은 금기였다. 이러한 국토 개념은 조선 시대에도 여전했고, 현대에도 여전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초기의 신라인들은 부여가 그리운 옛땅 개념이었다. 그러나 중국 세력이 후퇴하고 4국시대가 되어 고구려가 있음으로서 신라인들에게 만주는 옛 땅이 아니라 다시 찾을 수 있는 영토 개념이 되었다. 신라-고구려-백제-가야 4국 시대에 치열하게 전개되는 전쟁을 통해 사국 통일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었다. 4국이 계속해서 싸워서는 출혈만 쌓이고 쌓일 뿐, 어느 나라도 득 될 게 없고, 큰 전쟁을 하더라도 한 국가로 통일하는 것이 민족사 발전에서 최선이라는 생각이 600년대 신라인들의 생각이었다.
안함로가 활동하던 신라 진평왕 620~640년 때는 삼국통일 의욕과 기운이 한창 무르익는 시대였다.
안함로가 무엇을 근거로 ‘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라 했을까. 그 근거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선도산 성모> 설화이다. 이 설화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비록 파소를 중국 황실의 딸로 둔갑시켰지만, 관변학자들이 정사라고 인정하는『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도 ‘帝의 딸’, 공주로 언급하고 있다. 후일 사로국 지배층이 왕권의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해 박혁거세 탄생, 알영 왕비 탄생, 석탈해 탄생, 김알지 탄생을 신화로 만들었지만 ‘선도산 성모’ 설화는 신라인들의 고향이 단군조선-북부여 그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안함로와 신라 사람들은 시조왕 박혁거세와 자기들의 조상이 고조선의 후예인 북부여였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요서 지역의 번조선(番朝鮮-기자조선)이 아니라 만주 장춘 지역의 단군조선-진한(辰韓)-대부여-북부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삼성기]에 ‘據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란 말을 썼다. 당대의 학승인 안함로가 근거 없는 거짓을 사서에 기록할 리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북부여가 세워졌던 만주는 빼앗긴 고향이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함으로써 빼앗긴 고향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대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해가 건국되어 고구려 옛땅을 회복했지만 신라가 직접 회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해와 전쟁을 하지 않고 불가원불가근하며 지내는 것으로 위안하였다. 그러나 발해가 망하면서 옛땅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고려와 초기조선은 한반도의 2/3 정도였다. 한반도 전체가 나라 땅이 된 것은 조선 세종 때였다.
내 개인으로도 이 [삼성기전 상편]의 논주 시작에서 나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근원에 대한 근거를 조금 알게 되어서 기쁘다. 족보에는 “선도산 성모가 나정(蘿井)까지 시오리를 걸어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라고 나온다. 그 구절이 계속해서 찜찜했는데, [삼성기전 상편]를 통해서 해석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나정’은 그당시 6촌민들이 만나는 중심지였을 것이다. 공주님께서 해산하는 모습을 온 촌민들이 주시했을 것이다. 공주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해온 고조선-부여 유민들이 기뻐했고, 그 아들을 거서간으로 모시고 나라를 세움으로써 새 터전에 정을 붙이고 살게 되었다. 우리 밀양박씨의 Y 성염색체는 O1b2 계가 많다. 부여족은 N계다. 양자강 하류에서 살다가 요서-요동 지역으로 이동한 나의 조상들이 북에서 내려온 부여계와 융합하면서 부여 지역에 살았던 것 같다.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장수였고 어머니는 북부여의 공주였다. [삼성기전 상편] 덕분에 그동안 박혁거세 탄생 신화 이전의 궁금했던 부계와 모계를 불확실하나마 조금 알게 되었다. 안씨(安氏)들의 Y 성염색체 하플로도 밀양박씨와 같은 O1b2 계가 다수로 나왔다. 또한 6촌장들의 성씨들도 O1b2 계가 다수이다.
안함로는 국책 방향을 결정하는 당대의 우수한 학자였다. 600여 년 동안 삼국이 서로 싸우는 것은 제 살 제가 뜯어먹기인 것을 안함로는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것이 민족통합의 길이요 더이상 민족의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확신했다. 한 세대 후에 안함로의 뜻이 성공했다. 그러나 고구려 강역을 전부 거두지를 못했다. 당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삼국통일을 할 수 없었고, 삼국통일 후에도 당나라를 축출하려고 했으나 힘이 부쳤다. 그래서 676년 당나라와 타협한 국경선이 평양-원산선이다.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 영토를 포기한 게 아니다. 고구려 영토를 모두 얻고자 했다. 그러나 국력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신라의 국력은 거기까지였다. 신라 때문에 고구려 강토 대부분을 상실했다고 후세인들이 비난하지만, 그 당시 신라의 현실은 외세를 빌어 겨우 한반도의 2/3를 통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런 삼국통일이라도 없었다면, 삼국 간의 고단한 전쟁이 수백 년간 계속됐고, 우리 민족은 갈수록 피폐해져서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항 한 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중국이나 북방민족에게 강토를 점령당했을 것이다. 살기 좋은 한반도를 점령하려고 고려 초기 993년부터 1018년까지 거란족이 세 번이나 침략해왔다. 고려라는 단일국가였기 때문에 온 민족이 합심협력하여 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지켜냈다.
안함로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목표로 흩어진 민족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시조 환인의 설정이 필요했다. 환인을 인간으로 만들어서는 효과가 미미하다. 신으로 만들어야 대중의 흥미와 복종심을 유발할 수 있다. 신라인들을 넘어 백제인들과 고구려인들에게까지 한뿌리 한민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26년 4월 15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70세손 개산팔경 박희용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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