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강좌] 밀고자, 십자가 행진, 사랑의 완성/ 임의진
예수님 생의 종국은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이라 함은 보통의 병고와 병사가 아닌, 살해당함이었기에 붙인 낱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로마제국에 저항한 반역자를 향한 엄중한 형벌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근육이 찢어지고, 갈비뼈가 으스러져 장기를 찌르고, 몸에 뚫린 못으로 인한 유혈 낭자로 죽어가는 형벌입니다. 살(싸륵스)이 찢기고 피(하이마)를 가득 흘려야 죽는 이 처형식은 보통 개인당 1-2일 진행되는데, 예수님은 6시간 정도 매달렸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성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이를 가장 리얼하게 다룬 영화입니다.
신약성서 예수일대기는 공관복음이라 합니다. 이는 같이 보았다고 하는, 동일 사건의 기록물인데 이를 당시 시대에 쓴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에 그러니까 훗날에 기록한 기억의 소산물입니다. 요한복음과 같은 경우 그노시스 영지주의의 흔적이 많이 배여 있다고 하지요. 또 Q자료라 하여 이들 복음서가 보고 베낀 작은 원전문서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각기 다르면서 같은 보도물 가운데, 예수 처형식은 19금을 방불케 하는 매우 디테일한 처절함으로 담겨있습니다. 예수 생애의 가장 극적 순간이며, 이 죽음이 가져다주는 참혹한 비극의 상황이 부활항쟁으로 뒤바뀔 것이라는 믿음은 이 부분을 더욱 어둡고 참담한 상황으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예언(프로페테이아)하는 이들은 대체로 반정부적입니다. 진노(쒸모스) 가운데 깃들어 저주 받는 듯 보이는 이러한 예언자의 최후는 많은 따르는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두려움(포보스)이 가득 번지는 최후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살아생전 부활(아나스타시스/ 아나: 위로 향하여, 스타시스: 일어섬)을 수없이 약속하는 발언을 하십니다. 쓰러지지 않고 꺾이지 않는 불굴의 민중의 생명력,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향한 가치, 복음적 투신과 해방, 자유와 구원의 가치는 그 어떤 파괴적 시도에도 굽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즈음 로마의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 빌라도에 의해 도륙되고 맙니다. 십자가 형벌은 페르시아인들에게 흔한 사형법으로 로마가 이를 이어 받아 사용했지요.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와 같은 사형법을 채택했습니다.
기원후 60년 경엔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4천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했던 방식의 처형은 소작농 반역자에 대한 응징의 처분으로, 죄목은 자칭 이스라엘왕(유대왕)이라 달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장에서 조연을 맡은 동물이 있는데 바로 까마귀와 뒹구는 뼛조각들 해골입니다. 피 냄새를 맡고 온 까마귀는 유해를 쪼아댑니다. 골고타는 그런 민중학살의 비극적 장소입니다.
예수의 혐의 가운데 성전 정화는 가장 큰 반역 행위였어요. 또 황제의 것(카이사르)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구별(마가 12:15-17)도 중죄에 해당합니다. 로마는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이지요. 세금으로 억압받는 민중을 대변한 이 발언은 무엇이 하느님 것이고 무엇이 카이사르의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른바 민중 선동을 한 셈입니다.
또 축귀도 그렇습니다. 적대자들은 예수를 고에스(주술사 마법사)라 불렀어요. 레기온 (6천명의 군대)과 투쟁을 하는 예수, 거기서 2천명의 돼지, 2천명의 레기온이 죽었을 수 있습니다. 이 반란이 이야기로 둔갑되었을 수도 있지요. 거라사의 군대 귀신 이야기는 매우 복잡한 비의와 포괄적 구성미를 갖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예수라는 이가 군중을 선동했다고 보고합니다. 또 기도하는 집 성전을 강도의 소굴(강도: 레스테스, 이는 반역자란 말이지 좀도둑 수준이 아닙니다)로 만들었다는 말은 성전체제에 대한 예수의 준엄한 심판적 고발입니다. 유대교를 지배수단 삼아 무난하게 받아들이고 조종하던 로마에게 대한 폭로이며 저항입니다. 또 황제의 신성한 초상과 그의 복속된 신들의 형상에 예배하지 않았음도 폭로됩니다. (비두니아가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에 보낸 편지/ 기원후 111년)
이 죽음 사건을 희생 제사로 보게 된 것은 바울과 그 선교집단이 최초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저자의 입을 빌려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고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거룩을 안기심에 대하여 얘기합니다... (히브리 10: 5-6)
이를 보면 예수교는 유대교에서 파생한 종교임이 분명합니다. 희생제사라는 구약적 제의가 예수로 인하여 해결되고 연결되었음의 해설입니다.
성만찬(데이프논)도 그런 맥락입니다. 희생제물이 된, 밥이 된, 먹이가 된 예수를 표현하는 비의입니다. 생명 나눔(디아메리조)을 그분 한 몸으로, 십자가 죽음으로... 이를 복음(유앙겔리온)이라 칭하며, 더이상 성전 체제의 희생제물 예배가 아닌 ‘그리스도 합일 예배’를 도처에서, 무교회적으로나 비교회의 모습으로 드리게 된 것이죠.
인류의 미완성이었던 사랑은 이처럼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친구를 위해 죽는 이의 사랑은, 미완성의 사랑은 ‘큰 사랑’, 그리스도 메시아의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요한복음(15:13-14)에 의하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십니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배신과 밀고자 이야기를 이쯤 꺼내겠습니다. 사랑을 부수는 방법은, 그 사랑을 전면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사랑의 시간을 부정하고 망각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이를 밀고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묵묵히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끝내 이해(각성)와 부활로 화해하는 신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화해(카탈라쏘... 화해하다는 뜻)란 로마서 5장 10절에 바울 사도의 기가막힌 해석으로 정의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를 이런 살인과 밀고의 죄조차 용서하고 구원하는 구주, 예수님이 구원자(쏘테르)가 되셨다는 이야기는 이 비극적 십자가를 해방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공감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 찾아오는 복음입니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장자가 절친 혜자와 함께 호숫가(濠水) 방죽 뚝을 거닐고 있을 때였습니다. 장자가 문득 말했지요. “물고기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구먼. 바로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지.” 혜자가 답하길, “자네는 물고기도 아니면서 어찌 물고기 즐거움을 안다고 선뜻 말하는가?”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 莊子曰 : 「儵魚出遊從容, 是魚之樂也.」 惠子曰 : 「子非魚, 安知魚之樂?」
장자가 갸웃하며 말하길,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 즐거움을 모른다고 단정하며 그렇게 말하는가?” 그러자 혜자 왈,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물론 모르지. 마찬가지로 자네도 원래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말이라네.” 莊子曰 : 「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 惠子曰 : 「我非子, 固不知子矣. 子固非魚也, 子之不知魚之樂, 全矣.」 장자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에잇.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처음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물은 건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자네가 알았다는 말이네. 나는 이 호숫가에 거닐며 물고기의 즐거움을 벌써 알고 있고 그 앎을 따라서 말한 것뿐이네.” 莊子曰 : 「請循其本. 子曰 『汝安知魚樂』 云者, 旣已知吾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
공감해 달라고 꺼낸 말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공감은 사실 공감하는 적극적 신뢰가 아니고서는 빙빙 맴돌고 헛바퀴를 돌리지요. 공감은 사건을 바라보는 그윽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이며, 확정적 두둔과 신뢰, 그리고 혜안적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을 향한 이 공감의 마음은, 물고기의 즐거움이나 슬픔까지도 끌어안는, 앎과 배움과 느낌과 함께함의 모든 짓과 멋과 선과 음이란 생각이 닿게 됩니다.
갑오년 농민전쟁(동학), 제주 4. 3 항쟁, 여순 민중항쟁, 순교자 기독청년 전태일의 산화, 광주 5.18 민중항쟁, 4.16 세월호 의인들의 희생적 죽음 등 수 많은 저항 속에 우리는 공감하며 이들 의인들의 죽음을 새리고 기립니다. 이 공감 속에 우리 가운데 놀라운 부활 체험, 합일 체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을 대신하고(방언), 그들의 희망의 꿈을 예언하고, 내 행동으로 그들을 다시금 부활시키고, 이 신비로운 십자가의 행진을 이어가는 ‘실천적 신앙’을 우리는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쬐꼬만 거래적 영혼 구원이 아니고, 거대한 통전적 해방과 우주적 구원입니다.
그러니 혹여 죽음 앞에서, 이 차가운 배신 앞에서, 두려워 떨며 겁먹지 않고, 끝없이 죽고 또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깨부시면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뒤따라 지고 나아감으로 예수님과 합일하는 신비에 깃들게 될 운명입니다. 조선말기 수운과 해월, 그리고 봉준을 떠올려 봅니다. 안중근 토마와 개신교인 류관순을 떠올려 봅니다. 노동 청년 전태일과 광주 항쟁 지도부 윤상원 요한도 생각해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이 예수의 현현이며 부활체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의 몸으로 부활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