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000m 가 넘는 지역의 일기는 불순합니다. 맑다가도 언제 눈이나 비가 쏟아질지 모릅니다. 비 오는 날이면 몸을 날려버릴 만큼 강풍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웬만한 우비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산 길에서 찬비를 맞으면 체온 유지에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친 오르막 길에 비 피할만한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아래 그림은 오흐시에흑에서 생 베흐노까지 고도 프로파일입니다. 주로 유월 중순이나 팔월 말이면 이곳은 환절기여서 날씨가 요동칩니다. 리드(Liddes) 에서 생 베흐노 고개 까지 구간에서 비 맞아 산행을 포기한 경우가 가끔 보고됩니다. 체온이 내려가면 계속 걷겠다는 미련을 버리고 버스나 차량을 구해서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특히 60대 이상이면 생리적으로 회복이 더디어 저체온증 대비는 필수입니다.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협조적이어서 즐거운 산행입니다.
출처: https://www.schweizmobil.ch/en/wanderland/routes/etappe-01033.html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같은 루트로 알프스를 넘으면서 한니발의 공을 인정했습니다. 2천년 전 한니발이 닦아 놓은 길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대부대가 지나가는 길을 쉽사리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4만 군사와 야포를 끌고 온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을 두고 그의 형제들조차 비관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알프스를 넘는 게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이 산을 넘을 수 있는 군사라면 강인함은 증명되었으니 겁먹은 오스트리아 군은 쉬운 먹이 감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넘었습니다. 화가가 노새를 말로 그려 놨습니다. 사진 출처: By Jacques-Louis David - QwEFHqZhgW6ulw at Google Cultural Institute, zoom level maximum,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361554
구름이 많은 날씨였어도 해가 드니 발 동트헤몽 (vsl d'Entremont) 고원지대 경치는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남쪽 방향 멀리 하얗게 눈덮인 봉우리에 구름이 멈칫거리다가 넘어갔습니다. 길 가에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작은 꽃들, 억세게 자란 풀들, 그리고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는 키 큰 침엽수들. 가끔 숲을 지나기도 했습니다. 줄 지어 놓여 있는 벌통은 주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이 피는 시기에 알프스 산중에 벌통이 많습니다. 이 높은 고원은 농약 칠 일이 없으니 꿀은 청정식품일 것입니다.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자동차 길을 건너 21번 도로 왼쪽으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시원한 골짜기 초원을 걸었습니다. 오른 쪽으로 작은 강 드헝스 동트헤몽(Dranse d'Entremont)이 흐르는 계곡은 100m 쯤 낮은 깊은 곳이었습니다. 양 옆에 3000m 가 넘는 준령이 까마득하게 높은 지형이었습니다. 그헝 꽁방 (Grand Combin) 산자락을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한발 한발 모두 의미 있는 오르막이었습니다. 우거진 나무들은 모두 추위에 강한 침엽수들이었습니다. 주로 가문비나무들로 보였습니다. 긴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들만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부흑 생 삐에흐 (Bourg Saint Pierre) 마을에 가까워지자 로헤트 텔레스키 리프트가 있었습니다. 길지 않은 스키 스로프는 아이들이 스키를 배우기 좋은 위치였습니다. 경사도가 완만해서 꼬마들이 저속으로 스키를 익힐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텔레스키는 활주스키 리프트라고도 합니다. 스키를 신고 눈 위에 서 있는 사람을 고지대까지 끌고 올라가는 시스템입니다. 의자나 곤돌라 식처럼 사람을 들어 올려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설치와 운영이 간단한 시스템이고 요금이 저렴합니다. 한 여름이니 슬로프에는 풀이 자라 있어서 소들이 풀 뜯으러 몰려올 것입니다. 스키장 가장자리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마을은 스키 슬로프 언덕 넘어에 있었습니다. 언덕에 샤펠 노트르 담 드 로헤트(Chapelle Notre-Dame de Lorette)는 1663년에 세운 경당이 있었습니다. 외관은 낡았어도 바로크 양식의 제단이 아름다운 경당입니다. 경당 있는 자리가 오늘 가장 높은 해발 1630m입니다. 이 경당을 지나 비박 나폴레옹 호텔 (Bivouac Napoléon) 옆을 지났습니다. 순례자들에게 할인 숙박을 해주는 곳이지만 그래도 비싼 곳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800년 5월 20일 자고 갔다는 옛날 호텔입니다. 4만 군대를 끌고 와 생 베흐노를 넘기 전에 이곳에 머물렀다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나폴레옹 군대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설이 되어가는 이야기만 돌아다녔습니다. 나폴레옹은 1800년 5월6일 파리를 출발해서 제네바를 거쳐 5월 15일에 마흐티니에서 도착해서 지휘관에게 물었습니다.
“넘어 갈 수 있겠소?”
“네, 가능합니다.”
“그래요?
공격개시!”
4만 군사와 탄약, 식량, 무기를 실은 노새들이 그 해 5월 18일부터 이곳을 지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2] 한니발과 그 이후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 그 길에 차량이 다닙니다. 다만 대부분의 물동량은 이제 땅 밑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넘어 간 원정군은 밀라노에 열렬한 환영 속에 입성하고 나폴레옹은 밀라노 오페라 극장에서 옛 애인 가수를 만나 불타는 하룻밤을 보낸 뒤 그 가수를 파리로 데려다가 조세핀의 질투에 불을 질렀다고 했습니다.
구름 속에 갇힌 라 카토뉴 봉우리
청정 벌통
오흐시흑 마을 옆 산 라 카토뉴 봉우리는 구름 속에 있습니다.
텔레스키장
21번 도로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부흑 생 삐에흐 (Bourg Saint Pierre)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인구 180명, 해발 1632m. 마을 이름에 부흑 (Bourg)이 들어가 있어서 과거에 요새나 성이 있던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남쪽 생 베흐노 고개 쪽으로 실제 성터가 있습니다. 리드(Lidde) 마을에서 5km, 300미터를 올라왔습니다. 오늘 총 800m 가까이 올라왔습니다. 마을은 그헝 꽁방의 산 골짜기에 조그만 둔덕에 자리 잡았습니다. 서쪽으로는 깊은 골짜기로 드헝스 동 트헤몽이 세차게 흐릅니다. 남쪽 역사 좁은 협곡으로 Valsorey 개천에 좁은 다리를 걸쳐놓았습니다. 퐁 생 샤를(pont St-Charles) 다리라고 하닌데 샤룰 마뉴 대왕을 지칭하는 모양입니다. 마을은 이탈리아 쪽에서 넘어오는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좁은 길목과 천연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좁은 땅에 짐승 키우거나 나무하거나 곡식을 길러 먹고 살 형편이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오로지 지나가는 나그네들 돈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한달 뒤 9월이 오면 이곳은 겨울이 시작될 것입니다. 반년 이상 눈에 파묻혀 지내기 때문에 필수 인력이 아니면 산에서 내려가고 마을이 거의 다 빌 것입니다. 여름 한철 반짝하는 그런 마을입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길가에 있는 오레오(horreo)가 있었습니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 쥐가 드나들지 못하게 지상에서 높여 놓았습니다. 바치고 있는 기둥은 반질반질해서 쥐가 올라갈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곡식창고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르도록 퍼져 있습니다. 형태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오베르게 오 쁘띠 빌랑(Auberge "Au Petit Vélan")이라는 호스텔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 놓았습니다. 소시지 스파게티, 맥주로 점심. 깊은 Valsorey 협곡 위에 놓인 아치형 다리, 협곡을 지키기 위한 돌무더기 요새. 오래된 물레 방앗간. 마을 생 삐에흐 성당, 로마시대 이정표 기둥(Borne Milliaire) 등의 볼거리가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부흑 생 삐에 마을의 평면도 입니다. 협곡에 흐르는 Valsorey 개천이 마을 남쪽 경계선입니다.
https://doc.rero.ch/record/21361/files/I-N-268_1946_06_00.pdf
빨래를 널었는데 잘 마르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호스텔 침실에 벨기에 사람들 8명이 몰려와 붐볐습니다. 보름째 산악 트래킹하는 혼성 그룹으로 질서 정연했습니다. 이들은 수백 km 산길을 걸어도 화기애애한 모습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세 사람만 모여 며칠 걸으면 잡음이 나던데. 차이는 뭘까 궁급했습니다. 여행 경비관리를 철처하게 개인별로 하고 나눔 또한 분명한 관습이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어설픈 체면 문화, 의미 없는 호의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 저녁 식사는 피자와 포도주였습니다. 동네 사람들, 벨기에 사람들도 같은 메뉴. 내일이 스위스 국경일이어서 마을에서 폭죽을 터트렸습니다. 점심 + 저녁 + 숙박 + 아침식사 = 72 프랑.
마르지 않아 속 썩이는 빨래
[2] M. Gallo, Napoleon : The Sun of Austerlitz, Pan MacMillan,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