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
마지막 날에 민박을 하였다
이돈형
우리는 물개박수가 지나간 손바닥에 보라색 매발톱꽃의 저녁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덤불 타는 냄새가 말 못할 반성을 태우는 것처럼 길고 오래가서 허기가 돌았다
달래려는 맘과 달래지는 맘은 흐르는 물에 씻어도 한 뼘의 걸음이 남아 있었다
새들이 부는 휘파람이 수돗가로 모이고 털털거리며 굴러가는 버스의 꽁무니에선 새끼 어둠이 태어났다
왜 밖에만 나오면 멀리 바라보게 되지, 당신의 말이 더 멀리 가고 있어 출발지에는 지나온 날이 쌓여 갔다
소금기 절은 브라를 벗어 찬물에 담그자 브라는 풍만하고 물컹했고 이따금씩 물 밖으로 삐져나와 검은 물감처럼 풀어졌다
바다에 동전을 던지고 왔으니 잠시 손을 놓아도 속은 훤히 비칠 것이다 당신을 들여다보며 잊을 만한 기분을 나눠주고 싶었다
평상은 나신처럼 햇빛과 그늘이 번갈아 구부러져도 우리에게 부족한 말이 쏟아져도 소란을 떠난 무늬만 들여다보았다
소낙비를 맞아 볼 걸, 걸어 둔 여름은 또 올 것이다 하룻밤이 오랜 안부를 묻어야 할 시간처럼 왔다
저녁을 짓기 위해 당신의 배낭을 열고 빗소리를 찾았다
한파
강기슭은 누가 버리고 간 회의처럼 얼음에 닿아 있다
언 강은 폐쇄된 활주로, 수면을 문질러 술렁거리게 하였다
할 수 없는 일은 스스로에게 우호적이다
언 강에 갇힌 물오리는 할 수 없는 일, 그 일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마 환기되지 않는 절망이 죽은 회의가 물오리의 목일 것이다
길들여지고 품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횡단하려는 세계를 늦게 깨우칠 때가 있다
내일 봐요, 이처럼 쉬운 이별을 물오리는 1인 시위하듯 술렁임 밖으로 밀어낸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남겨진 풍경이 빠르게 얼어 갔다
조심히 다녀와, 이 흔한 말은 언제나 물 건너간 기슭에서 반질거린다
길들여지기 좋은 날이다
빈 것을 비우겠다고
새벽안개를 보러 나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강을 건너는 일이 어려울 것 같아 강가에서 저쪽 물안개를 보고 오겠다던 사람들을 기다렸다
밤새 죽음의 소리로 철철거리던 강이 새벽녘에는 죽음을 몰아내기 위해 물안개를 피우고 있다
새벽 강은 생이 마렵다
스스로 헤아릴 수 없어 우리를 깨운 물안개 속으로 강에 나선 사람들이 잠긴다
죽음의 실마리를 풀어 본 사람이 생겨날까
강은 강을 건너 흐르지 않고 어제를 견딘 방향으로 흐른다
나는 불현듯 눈을 뜬 새벽처럼 강가의 작은 돌들을 발로 차고 있다
빈 것을 비우겠다는 것도 생에 대한 마려움, 강물이 일렁일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나는 품 안의 아이처럼 물안개 걷히는 강가에 서 있다
봄봄봄 하다가
벚나무에 기대 봄을 기다리는 것은 내가 가진 어떤 슬픔보다 구체적이다
어떤 말에도 끄덕이는 사람이 오늘의 논자論者처럼, 피는 봄과 지는 봄의 속내는 같을 거라 하였다
그와 점심을 먹으러 간다
시계視界는 멀수록 슬픔의 심장도 유연해지거나 무릎을 꿇는다고, 물음이 없는 어머니의 눈곱 낀 망망茫茫한 눈이 그 눈이라고
흩날려서 아름다운 꽃잎처럼
흩날려서 아름다운 삶이 있다면 그랬다면 그래서 흩날렸다면
몰락을 모르는 이른 봄나물로 가득한 밥상에 앉아
기댄 봄을 날려도 되겠다고
흩날리는 꽃잎이 내게 무심하듯 사이사이 피고 지는 봄날을 흩날려도 되겠다고
푸릇했던 속내를 들킬까 그와 끄덕이다가
헛봄에 들어 눈을 감았다 뜬다면 그런다면 내게 봄은,
나를 철거한 자리에 다수가 앉아있다
꿈을 꾸었지
나는 쉽게 죽었어 젊은 나이였는데 한순간에 죽었어 그렇다고 누군가가 죽인 건 아니야 짧은 꿈이라서 그들은 살릴 수 없었겠지 깨면서 칼같이 사라져 버린
그래 칼 같다 했지 용기를 다룰 줄 모르는데 칼 같다니, 어쩐지 자꾸 듣다 보니 한구석이 진짜 칼이 되더군
근데 쓸데없이 끄집어내서 어디에 쓸 거냐고?
칼은 줄줄이 흘러내리는 뒷모습이었지 뒷목을 잡고 거침없이 휘두르다 와장창 깨지는 내게서 떠나려는 캠핑카 같은, 캠핑카에 걸린 백기 같은
베었다 싶었는데 베이고 베였다 싶었는데 벤 자가 없는 칼을 가지고 놀아 본 적 있나
베면서 다수는 캐럴을 불렀고
베이면서 나는 독백을 하였지
칼끝에 다수의 입술이 포개지면 한편에서 한 편이 사라질까
꿈같은 얘길 하다 보니 칼집 깊숙한 곳에서 환청이 들려오네
실종된 칼의 입장을 찾습니다 꼭 사례하겠습니다
나를 철거한 자리에 다수가 다 같이 둘러앉아 캐럴을 부르네
believe
believe는 발음이 좋다
내가 좋아할 때 누군가 같이 좋아한다면 believe
코코넛을 따러 간 흑인 소년에게 5달러를 주었다
검고 두툼한 입술과 때때로 기분을 가릴 수 있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어 기다림이 되었다
검은 등에 검은 태양이 새겨진 사람들이 해변을 걷고 있다
등과 태양은 떨어지지 않고 등 뒤의 등은 저마다의 신념으로 검게 빛났다
그러니까 나는
이국의 해변에서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등의 기분을 헤아리며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에 미안은 있었는지
미안에 빠진 예감은 사라졌는지
등이 저리고 기다림은 소년인지 코코넛인지 깜빡 졸은 듯한데
believe는 발음이 좋다
내가 기다릴 때 졸음 같은 것이 같이 기다려 준다면 believe
혓바닥을 내밀면 주르르 흐르는 코코넛을 들고 뛰어오는 소년을 본 것 같다
검은 등을 본 것 같다
독감
생식기에 점이 있으면 강한 사람이래 당신이 죽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강한 남자, 강남, 코미디프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점과 상관없는 구릿빛 근육질과 무엇이든 파헤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그려졌다 힘의 파편으로 살갗이 시렸다 어디서 그런 말을 삼켰을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어, 죽은 불알 만지듯 툭 내뱉었다 달그락거림이 부족한 생활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때론 보이는 것만 믿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어느새 당신은 빨래를 개다 말고 늘어진 속옷을 들어 보였다 백수白手에 식은땀이 뱄다 싱거운 겨울 빛으로 당신의 그림자는 싱크대에 걸쳐지고 찬물에 수건을 적시는 당신에게서 편들어 주는 사소한 점이 보였다 어떻게 숨겨왔을까 당신의 눈빛을 피해 잠들면 그 사소한 점은 커지겠지 강해지겠지 나의 생활은 2% 부족한 발작, 발작에 발작을 더하면 신열이 났다 오늘은 당신에게 그것을 말해 주고 싶었는데 당신의 신열이 나의 신열보다 뜨거웠다
첫댓글 이돈형 시인 새해도 쭉~ 좋은 일 생기길......believe
2018년은 시인 이돈형의 해!
글쵸 이 기운을 계속계속 이어가 포문의 포문을 더욱 활짝 여시고 밝히시기를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