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정도(八正道) - 정정(正定) / 청화 큰스님
<6. 정정진(正精進)>
육(六)은 ‘정정진(正精進)이라,
진지(眞智)를 발용(發用)하여
강인(强靭)하게 열반(涅槃)의 도(道)를 수(修)함을 운(云)함.’
정정진(正精進)이란, 진지를 -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서 강인하게,
어떤 경우든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강인하게 열반의 길 -
열반은 해탈, 극락, 영생과 같은 뜻입니다. -
영생의 길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런 것을 다 안다 하더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갈 수가 없습니다.
쉬지 않고 애써야 합니다.
<7. 정념(正念)>
칠(七)은 ‘정념(正念)이라,
진지(眞智)로써 정도(正道)를 억념(憶念)하고
사념(邪念)이 무(無)함을 운(云)함,’
정념(正念)이란, 참다운 지혜로써 정도를 억념(憶念) 하는 것 -
억념은 마음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말입니다.
정견(正見)은 우리불교에서 말하는 문사수(聞思修)라,
그냥 귀로 들어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지만,
정사유(正思惟)는 생각을 더 깊이 하고,
정념(正念)은 더 깊이 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억념은 마음 깊이 기억해서 잊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념은 그러한 정도의 차이입니다.
정견을 더 깊이 하면 정사유이고, 보다 더 깊이하면 정념입니다.
마음으로 기억해서 잊지 아니하여 사념(邪念)이 떠나면
그때는 삿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8. 정정(正定)>
팔(八)은 ‘정정(正定)이라진지(眞智)로써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선정(禪定)에 입(入)함을 운(云)함.’
정정(正定)이란, 참다운 지혜로써
무루청청한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는 말입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은 무엇인가?
루(漏)는, ‘셀 루(漏)자’입니다.
번뇌를 ‘루’라 합니다.
물이 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번뇌가 있는 법은 유루법(有漏法)이고,
번뇌가 없는 법은 무루법(無漏法)입니다.
마음이 쓸데없는 곳으로 새버려서 온전치 못한 것이 루(漏)입니다.
번뇌가 있으면 마음이 쓸데없는 곳으로 새서 유루(有漏)고,
번뇌가 없으면 무루(無漏)입니다.
무루청정한 수행은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원래 번뇌가 없고
본래무번뇌(本來無煩惱),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말입니다.
본래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부처님만 계시고,
오직 마음만 있음을 보는 수행이 무루청정한 수행입니다.
우리는 꼭 무루청정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여러 가지 차이점을 많이 거론하지만
기독교는 결국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하나로 보는 기독교 교리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의 어느 수승한 대목에 가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그렇게 합리화시킬 수는 있다 하더라도,
우선 표현된 것으로 보면 기독교는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입니다.
어떠한 종교에도 불교처럼 ‘부처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천지 우주는 부처님뿐이다’고 하는 그런 수승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런 진리를 알아야만 참다운 우리 마음의 해방이 있고
참다운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창조를 당해서 얽매여 있다면
우리에게 자유가 없습니다.
참다운 자유, 참다운 인간의 존엄성은 불교 밖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그야말로 가장 수승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또한 일체 중생에게 그런 마음이 다 들어 있으므로
다 평등한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칩니다.
따라서 참다운 평등, 참다운 자유,
참다운 존엄은 불교밖에는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청정미묘한 불성(佛性)뿐입니다.
‘청정미묘한 불성뿐’이라는 참 지혜에 입각해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야 참다운 선정입니다.
억지로 싫은 것을 의심하고 따지고 하는 것은,
사실은 무루청정한 참선이 못됩니다.
세상에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도, 차별할 만한 어떤 엉터리도 없습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청정미묘한 불성에 입각한 수행이 되어야만
무루청정한 참선이고 염불입니다.
우리가 불공(佛供)을 모신다 하더라도,
또는 영가(靈駕)를 천도(遷度)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무루청정한 마음에 입각하면 훨씬 더 천도가 빠릅니다.
팔정도(八正道) 중(中),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삼지(三支)는 계품(戒品),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이지(二支)는
정품(定品),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定進)의 삼지(三支)는 혜품(慧品).
팔정도 가운데, 정어는 참다운 말을 뜻합니다.
사제의 진리를 다 알고서
참다운 지혜에 입각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정업도 역시 참다운 지혜에 입각해서 몸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정명도 참다운 지혜에 입각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진리가 앞서지 않으면 정업도 정명도 못되는 것입니다.
꼭 참다운 지혜가 앞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가치관이 앞서야만
바른 말, 바른 업, 바른 생활이 됩니다.
같은 말도 알쏭달쏭하게 억지로 하면 위선(僞善)에 불과합니다.
도리에 입각해서 말해야 합니다.
도리를 억념해 가지고서, 도리에 입각해서
우리가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업을 짓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그것이 무루청정한 삼업(三業)입니다.
팔정도 가운데 정어, 정업, 정명의 삼지(三支) -
세 가지는 계품(戒品) 즉 계행, 계율에 해당하고,
또 정념, 정정은 정품(正品) 즉 선정에 해당합니다.
또 정견, 정사유, 정정진 등 세 가지는 혜품(慧品)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의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을 간추리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아닙니까.
즉 삼학도(三學道) -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길 도(道)자 -
이것이 가장 간추린 수행 방법인데,
좀 부연하면 이와 같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더 부연하면 무량의 수행법이 있겠지요.
팔정도를 더욱 줄이면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정어, 정업, 정명등 세 가지는 계품 즉 계행에 해당하고,
정념, 정정 등 두 가지는 정품 즉 선정에 해당하고,
정견, 정사유, 정정진 등 세 가지는 혜품 즉 지혜에 해당합니다.
요컨대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첫댓글 번뇌가 있는 법은 유루법(有漏法)이고, 번뇌가 없는 법은 무루법(無漏法)입니다.~ 감사합니다.~
청정미묘한 불성에 입각한 수행이 되어야만 무루청정한 참선이고 염불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8정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