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채 방치된 宮城(경복궁) 밖 풍경
'나라는 망가졌어도 山河는 그대로인데, 도성에 봄이 오니 草木은 무성하구나(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당나라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절창 중의 절창으로 꼽는 '春望'의 앞 구절로, 안록산의 난으로 파괴된 장안으로 돌아온 두보의 눈에 비친 궁성 밖 모습입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부서진 경복궁은 오랫동안 중건되지 못하고 방치되는데, 궁성 밖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궁 서편 필운대와 뒷 쪽 인왕산 자락 그리고 동쪽 삼청동을 읊은 시에서 그 편린이나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직동·필운동 뒷 산자락 필운대(弼雲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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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운대 꽃구경(弼雲臺賞花) / 정선(鄭敾)
사직공원과 필운동 뒷 산자락 필운대(弼雲臺), 이곳에 살아았던 임진왜란 시의 명신 이항복(李恒福)의 호 필운(弼雲)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이 일대의 풍광은 장안에서도 이름이 나, 동대문 밖의 버들(興仁門外楊柳), 서대문 밖 천연정의 연꽃(天然亭荷花), 자하문 밖 탕춘대의 계곡물과 바위(蕩春臺水石) 등과 함께 ‘필운대의 살구꽃(弼雲臺杏花)’을 절승지로 꼽았답니다. 영조 때의 시인 신광수(申光洙, 1712 ~ 1775)는 이 곳의 봄 풍광을 ‘필운대의 꽃 기운이 도성을 압도하니, 눈에 가득 향기로운 봄빛 온 장안에 가득하구나(雲台花氣壓城中 滿眼芳華萬戶同)' 라고 읊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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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새겨진 弼雲臺란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미상이나 이항복의 글씨라기 보다는 후손 이유원(李裕元)의 글씨로 추정됨. 옆에 새겨진 시구(詩句)는 이유원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시를 짓고 새겨 넣습니다. '우리 조상 옛집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솔 암벽에 白雲이 서렸네. 남기신 풍모 백년 넘어 오래이나 어르신의 의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네 / 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 이항복선생의 필운대에서 쓰다 (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 癸酉月城李裕元 題白沙先生弼雲臺)
필운대(弼雲臺) / 박문수(朴文秀, 조선 후기)
君歌我嘯上雲臺(군가아소상운대)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李白桃紅萬樹開(이백도홍만수개)
하얀 오얏꽃 붉은 복사꽃 수만 그루 피었네,
如此風光如此樂(여차풍광여차락)
이러한 풍광 이런 즐거움으로,
年年長醉太平杯(연년장취태평배)
해마다 태평세대 술잔에 길이 취했으면..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암행어사로 人口에 회자(膾炙)되었지만, 사실 그가 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합니다. 아마도 잠시 어사로 활동할 때의 치적이 부풀려지고 백성들의 바램이 보태져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런지.. 그는 오히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로 활약한 노련한 정치가로, 호포제의 주장과 탕평론에 적극 동참하는 등 일찍부터 국정개혁을 이끌었습니다. 박문수가 관직에 있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노론과 소론이 심하게 대립하던 때였는데, 그는 소론에 속했으나 현실 정치에 있어서는 당론에 앞서 나라를 먼저 생각한 정치가였다고 합니다.
필운대 꽃구경(弼雲臺賞花) / 박지원(朴趾源, 조선 후기)
戲蝶何須罵劇顚(희접하수매극전)
꽃에 나비가 극성이라고 어찌 나무랄까,
人還隨蝶趁芳緣(인환수접진방연)
사람들은 되려 나비 따라 꽃을 좇는데..
春靑晝白遊絲*外(춘청주백유사외)
아지랭이 너머로 한낮 봄날의 푸르름이,
井哄烟喧紫陌*前(전홍연헌자맥전)
도성길 앞에는 나들이꾼들 시끌벅적함이..
*遊絲(유사) : 아지랭이 *紫陌(자맥) : 도성 길
各各禽啼容汝意(각각금제용여의)
새 울음 각각인 것은 저들 마음이라지만,
頭頭花發任他天(두두화발임타천)
여기 저기 피는 꽃은 저 하늘의 뜻이로다.
名園坐閱無童髦(명원좌열무동모)
동산에 앉아 둘러보니 더벅머리 애들은 없는데,
白髮堪憐異去年(백발감연이거년)
작년보다 더 허여진 노인들의 머리 가엾어라.
필운대에서 살구꽃 구경(弼雲臺看杏花) / 박지원(朴趾源)
斜陽焂斂魂*(사양숙렴혼) 석양이 갑자기 넋(빛)을 거두어 들이니,,
上明下幽靜(상명하유정)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둑하고 고요하네.
花下千萬人(화하천만인) 꽃 아래서 구경하는 하고 많은 사람들,
衣鬚各自境(의수각자경) 의복과 수염 저마다 볼 만하구나.
*斂魂(염혼)’은 원래 죽은 이가 넋을 거두어 들인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석양이 지면서 빛을 거두어 들인다 는 뜻립니다. 대문장가 박지원의 재치있는 문채(文彩)가 엿보입니다.
꽃구경하는 이들의 복색과 신분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저녁 해 저물녘까지도 즐기는 모습이 조선 제2의 태평성대(영·정조대)답다는 느낌이 듭니다. 열하일기·양반전의 대문장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한시를 잘 쓰지는 않았다고 알려졌는데, 필운대에 대해서만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인왕산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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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비온 뒤 모습(仁王霽色圖) / 정선(鄭敾)
정선이 평생의 절친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노환으로 몸져 눞자 비온 뒤 갠듯이 쾌차하라고 기원하며 그린 그림이랍니다.
이병연은 한시를 잘 지었는데, 특히 겸재의 많은 진경산수화에 그의 화제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인왕산에서 우연히 읊다(仁王山偶吟) / 임인영(林仁榮, 조선 후기)
仁王山下少人來(인왕산하소인래)
인왕산 자락에는 사람 발길 뜸한데,
岸幘孤吟坐石苔(안적고음좌석태)
두건 벗고 홀로 이끼 낀 돌에 앉아 읖조리노라.
日暮東風春寂寂(일모동풍춘적적)
해는 저물고 동풍 불어오나 봄날은 적적한데,
巖花無數望中開(암화무수망중개)
바위 가에 하고 많은 꽃들이 눈 앞에서 피어나는구나.
위 시는 여러 군데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지은이 임인영(林仁榮)은 생몰연대를 비롯 종적이 묘연한 인물로 다만 경종(숙종과 장희빈의 子) 때 사람으로만 적혀있습니다.
인왕산에 올라(登仁王山) / 정조(正祖)
際天嵂屼鎭西山(제천률올진서산)
하늘 가에 우쭉 솟아 서쪽 산을 진압하고,
佳氣長留大地寬(가기장류대지관)
가상한 기운 넓은 땅에 길이 머물고 있구나.
聖世繁華玆境最(성세번화자경최)
태평성세 번창함은 이곳 경치가 제일이라,
弼雲花類憺忘還(필운화류담망환)
필운대의 꽃과 버들에 끌리어 돌아갈 줄 모르네.
정조 대왕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 인왕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시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필운대까지 가서 꽃과 버들을 완상하시고 남긴 시로 사료됩니다.
삼청동(三淸洞)
산이 맑고(山淸) 물이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고 하여 삼청(三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도교에 모시는 신 太淸・上淸・玉淸의 삼청성신(三淸星辰)을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구요.
삼청동에서 비 개인 날 멀리 보니(三淸洞晴眺) -일부 / 이덕무(李德懋, 조선 후기)
鸛鷺微風趨積翠(관로미풍추적취)
황새 해오라기 산들바람에 짙푸름을 따라가고,
松杉麗日宿纖塵(송삼려일숙섬진)
소나무 전나무 고운 햇볕에 잔 먼지마저 일지 않는구나.
樓臺細數觚綾眩(누대세수고릉현)
누대에서 대궐 추녀 끝을 꼼꼼히 세다보니 어지러워,
忘却金莎偃墮巾(망각금사언타건)
금잔디 위에 두건 벗겨진 줄도 몰랐구나.
늦은 봄 상청동 뒤산 누대에 올라 복원되지 않은 경복궁을 내려다 보고 있네요. 여러번 소개한 바 있는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