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이의 ‘오필리어’
라파엘 전파의 화가가 1852년에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라파엘 전파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의 하나로서 그룹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젊은 밀레이가 그린 그림이다.
《오필리아》는 비극적이고 섬뜩한 죽음을 주제로 그린 그림임에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또한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오필리아가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 극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그것은 치밀하게 묘사한 사실적 풍경 위에 화가의 시적 상상력이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 그리고 있는 비극적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재창조하려는 밀레이의 강한 의지의 소산임을 확인할 수 있다.
라파엘 전파 화파의 양식적 특징은 세부까지도 아주 꼼꼼하고 상세하게 그리는 것이다. 또, 상징주의적 기법으로 시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특징으로 꼽는다. 그룹의 화가들은 영국 문학에서 소재를 가져오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문학적 소양도 아주 높았다. 라파엘 전파의 모든 화가들이 세익스피어에서 소재를 취했다.
존 에버트 밀레이(1829-1896)도 이 작품의 소재를 햄릿에서 가져왔다. 오필리어는 햄릿의 애인이었다. 햄릿이 오필리어의 아버지를 죽이자 오필리어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더져 목숨을 끊는다. 그 순간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세익스피어는 정신이 나간 오필리어를 강조하기 위해서 여러 종류의 꽃(각각의 꽃은 다양하게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을 스스로 꽂는 오필리어를 묘사했다. 밀레이도 세익스피어의 묘사를 따라서 꽃을 식물학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다. 떠 빅토리아 시대의 꽃말도 추가하여 그렸다. 보기로서 팬지는 헛된 사랑을 의미하고, 제비꽃은 충절을, 쇄기풀은 고통을, 데이지는 순수를, 패즌트 아이는 슬픔을, 물망초와 양귀비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 꽃들을 그림에 그려넣었다.
죽음은 해골처럼 보이는 오른쪽의 나뭇가지로 암시했다. 이는 오필리어의 죽음을 암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햄릿이 요릭의 해골을 발견하는 유명한 무덤 장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확한 묘사를 하려는 밀레이의 집념은 꽃에 머물지 않았다. 영국의 서리 혹스밀 강 근처에서 네 달 동안이나 그림의 배경을 그렸다. 그의 모델(후에 동료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아내가 되었다.)도 이 작품을 위해서 많은 고통을 참으면서 자세를 취해 주었다고 한다.
세익스피의 작품에서 가져 온 이 그림을 그릴 때 친구이면서, 평론가였던 러스킨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아주 강력하게 강조했다. 그림의 배경은 슈리에 있는 이웰 강을 1851년 여름에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1851-1852년 사이에 모델인 시달은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정장을 하고,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에서 몇 주 동안 포즈를 취하면서 고통을 참았다. 말이 차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욕조 밑에는 여러 개의 램프를 켜두었다고 한다. 이 자세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네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로제티는 이 그림을 두고 지금까지 시달을 모델로 하여 그려진 그림 중에 이 그림이 가장 시달과 닮았다고 했다. 물에 빠진 미친 오필리어를 그린 이 그림은 거의 최초이다. 이후에 수많은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되풀이 해서 이 그림을 모방하여 그렸다.
밀레이는 헌트, 로제티와 더불어 라파엘 전파의 화파를 결성한 인물이다. 그들은 모델을 구할 여유가 없어서 모자점의 점원인 시달을 모델로 섭외했다. 시달은 아주 예뻤다. 특히 로제티는 시달을 강박적으로 사랑을 해서 결혼에 이르지만, 친구 화가들조차도 시달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했다. 시달도 로제티와 결혼을 한 후에 로제티의 강박적인 사랑에 비관하여 우울증에 빠졌다. 아편을 과도로 복용하여 약물과용으로 죽었다. 일부에서는 자살이라고도 말한다.
로제티는 시달의 죽고 난 뒤에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고, 그림도 왕성하게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제티와 시달을 이야기할 때는 팜므 파탈의 한 전형으로 많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서 시달의 팜므 파탈적인 미모를 감상할 수 있다.
밀레이도 친구 러스킨의 부인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함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밀레이는 아주 가까운 친구인 러스킨의 부인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여왕 빅토리아는 자신의 초상화가로 밀레이가 천거되자 퇴짜를 놓았다. 그림을 그리던 도중에 불륜을 저지른 화가 앞에서는 포즈를 취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박토리아 여왕은 밀레이의 도덕성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