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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80년 5월 24일, 기자: 광주 외곽의 진월 마을, 동네 저수지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총탄이 쏟아진다. 5.18 민주화 운동 진압 중이던 공수부대가 이동하며 무차별 난사한 것이었다. 방광범(당시 13세), 이날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13살 방광범군이 사망했다. 당시 광범이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이 같은 비극은 계속된다.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시위진압에 나선 계엄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광주의 열흘,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 300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주제는 5.18 민주화 운동인데요. 시작부터 마음이 무겁네요.
이시원/배우: 정말 짧은 영상을 보는데도 눈시울이 붉어질 수 밖에 없는데 충격을 받았어요. 한 방 맞은 기분이에요. 당시 13살이었던 중학생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모르는게 정말 많구나.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2년전 홍콩에서 많은 홍콩인들도 그런 얘기했잖아요. 민주화를 어느 정도 꿈꾸는 나라들한테는 5.18 민주화 운동은 하나의 상징성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떠한 과정들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많은 사람들이 모를 거예요.
허진모/작가: 모르는 거 넘어서 일부 극우 세력에 의해서 계속 역사왜곡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고 수차례 정치적 쟁점이 되다보니까 대중들한테는 또 5.18이야 광주야 이러면서 피로감이 커졌다고나 할까요. 잘못된 정보로 과소비된 측면이 참 많은 거죠. 아직도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여전히 살아있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이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 계속 곱씹고 재조명을 해야 한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김태훈/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래서 오늘 18일부터 27일까지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알아보는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단편적인 장면들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또 누군가가 난 이렇게 보았는보 했을 때 사실 논쟁이 계속되거든요. 그래서 이걸 차근차근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문서화해야 앞으로 더 이상 왜곡의 문제가 나오지 않을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오제연/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5.18 직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서 군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권력욕은 1980년 4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으로 노골화됩니다. 이에 맞서서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전두환의 집권을 막기 위한 시위를 벌이게 되구요. 그러자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5.17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통해서 전국일원에서 더 많은 계엄군을 투입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계엄군들이 광주에도 대거 투입되게 됩니다. 5월 18일이 되자 많은 학생들이 전남대 교문 앞으로 모이게 됩니다.
허진모: 이날은 어느 때하고는 시위진압 분위기와는 완전 달랐습니다. 왜냐 공수부대가 투입이 되었고요.
이시원: 보통 시위진압은 경찰이 하는 거 아닌가요?
허진모: 5월 18일에 경철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의 수는 많이 잡아봐야 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경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0개중대 지원병력까지 합치면 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1925명).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충분히 경찰력만으로도 할 수 있었는데 사실 공수부대라고 하니까 적후방으로 침투해서 인명살상이라든지 시설파괴하는 그런 부대인데 일반시민들이 그때도 아직 무장했다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투입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허진모: 우리나라의 공수부대는 정규군 중에서도 최상위 수준의 최정예부대였죠. 실제 6.25 한국전쟁때도 우리나라의 공수부대는 김일성 등 북한 지휘부를 생포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져서 투입된 바도 있구요. 이런 최정예 부대가 민간인의 시위진압을 하는데 투입이 된 겁니다. 실제로 계엄 확대이전 5월 14일~16일 3일 동안은 경찰력으로 진압을 하면서 평화롭게 아무일 없이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수부대의 취지나 형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골목 골목 쫓아가고 상점에 들어가서도 따라가서 잡아갑니다. 지나가던 버스도 세워가지고 학생들이면 다 잡아가고 집까지 쫓아가서 잡아가는데 그 안에 엉뚱한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도 구별하지 않고 막 잡아갔다고 합니다. 과거 80년도 시위를 하셨던 분들 닭장 속에 집어넣고 이렇게 되는데 이 사람들은 거의 전쟁포로 수준으로 끌고 가는데 그 과정에서 심한 구타가 이루어졌다는 게 문제였습니다(동영상).
최원정: 우리가 사진들 많이 보잖아요. 그냥 속옷 차림으로 발가벗긴 채 끌려가는 모습이 그렇게 까지 해야 되는 건가요?
오제연: 당시 계엄군의 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냐 하면은 공수부대 투입 첫날부터 두명의 사망자가 나오게 됩니다. 5.18 첫날 희생자 중에 한명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100일 정도된 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에 폭행을 당하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다니엘: 첫날부터 그랬다는 건 이제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하나의 예고편이었던 거같애요.
최원정: 저도 아직 국회나 여의도 일대에 전투경찰들 배치되고 그러면 무서웠거든요. 하물며 시민들은 막 폭행하는 부대에게 어마어마하게 질릴 거 같애요.
이시원: 첫날부터 너무 비상식적이예요.
최원정: 시위 참가했던 학생들이 5월 19일에, 전날 5월 18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에서 적어서 유인물들 배포했는데 (손으로 쓴 편지) 여기 보면 전두환의 살육작전~한 부분을 읽어드릴게요---공수특전단은 대검을 빼들고 미친 망나니처럼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중략~ 흘렀다(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1980년 5월 19일). 이런 애기들 더는 못읽겠네요~
다니엘: 시위진압에 대검을 사용했다구요?
허진모: 특수한 일이 생겼을 때는 날이 세워진 검을 지급을 하는데 그것을 총에 꽂으면 길이가 상상 이상으로 깁니다. 그리고 굉장히 날카롭구요. 너무 너무 위험한 무기가 되는 거죠.
오제연: 1988년에 12월 광주 5.18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리게 되는데요. 시위진압에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느냐 안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쟁점이 됩니다.
-----------------이광용: 1988년 12월 20일부터 진행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 장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당시 계엄군이 시위를 진압하면서 이 대검을 사용했는지가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많은 광주 시민들은 당시 계엄군이 대검으로 머리를 찍거나 허벅지를 찌르는 등 분명 대검을 사용했다고 증언을 했는데요. 그렇다면 계엄군측은 어떤 입장일까요? 당시 계엄군 현장 책임자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일옥/당시 7공수 35대대장: 광주 사태 전 기간 중에 대검을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습니다. 권승만/당시 7공수 33대대장: 저희 대대는 그 자리에서 대검을 총에 꽂은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데모진압을 하면서 대검을 총에 꽂아서 시민들을 향해 데모진압을 하는 그런 것은 교리상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광용: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당시 광주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한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동영상) 김점중/당시 피해자: 그때 당시 다리를 어디를 찔렸는지 모르겠어요. 이 옆에를 찔리고 여기를 대검으로 찔러버리더라고요---------------
----------------기자: 광주기독병원 의무기록실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상자들의 진료기록이 남아있다. 희생자의 얼굴과 몸에 자상, 즉 칼로 인한 상처가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계엄사의 발표를 인용한 신문기사도 자상으로 인한 사상자가 명시되어 있다. 이광용: 시위진압 당시 대검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는 계엄군 측의 주장과는 달리 계엄군측의 발표를 토대로 났던 신문기사에는 대검으로 인한 자상, 그 자상으로 인한 사상자가 분명 존재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원정: 대검을 착검했느냐 안했느냐 지금 여기 사진에서도 보시는 것처럼 저기 대검이 달려 있다는 것만으로 무섭지 않아요 (총에 착검한 진압군 사진). 누가 달려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시원: 당시 시민들은 어땠을까요? 총에 착검을 하면 거의 창 수준이잖아요. 찌르는 것처럼 되는 거잖아요.
김태훈: 일반 병사들은 총검술 훈련할 때 진짜 날이 세워진 착검 총검술 훈련을 하지는 않거든요. 왜냐하면 훈련과정에서도 다칠 수 있기 때문에~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대검을 끼우고 했다는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걸 알면서도 시행했다는 거죠. 그리고 혹시나 또 우발적으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는데 착검을 했다는 건 이미 여기서(허리에서) 끼우고 나갔다는 건 우발적 대응이라고 보기에는 말이 안됩니다.
이시원: 이미 대검 준비를 했다는 거죠.
허진모: 이미 저 상태는 충분히 상대를 적으로 간주한 상태라고 볼 수가 있죠.
오제연: 그 당시 전교사의 작전상황일지를 보면은 5월 18일 20시 15분에 7공수부대가 총검으로 진압을 했다. 7공수부대 총검진압 이라는 용어가 작전상황일지에 나온다는 거죠. 이런 것들을 봤을 때 당시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시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 것만으로도 진짜 과잉진압이잖아요. 거기에다가 학생들을 상대로 착검까지 했다니 이건 비상식적인 수준이에요.
오제연: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에 따르면 1980년 2월부터 폭동진압훈련인 충정훈련만 계속했고 특히 7공수여단 같은 경우는 폭동진압경연대회도 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시원: 경연대회요? 지금 누가 잘 때리나 경연을 했다는 말인가요?
최원정: 잘못 들은 거죠?
이시원: 3월이 개학이잖아요. 2월부터 진압훈련을 했다는 건 설마 혹시 대학생을 상대로 연습을 했다는 건가요?
오제연: 그렇게 폭동진압훈련을 했다는 것은 민주화에 대한 요구 그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더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을 미리 예견을 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신군부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5.18에 앞서서 있었던 1979년 10월의 부마 민주항쟁 때도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을 위해서 투입이 됩니다. 부마항쟁 직후에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작전평가서가 있어요.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의 타격을 해라. 데모대의 간담을 서늘케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하도록 위력을 보여라. 한 마디로 군이 초동단계에서부터 강력하게 진압하라고 한 것이고요.
최원정: 부마항쟁 때 보고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기억 나시죠. 현장에 계엄사령관이 아니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딱 나타나 가지고~ 저희가 경악을 했었는데~
이시원: 설마 그때 그 부마항쟁(1979) 때의 경험을 1980년 광주에서 제대로 실험한 거 아닐까요?
허진모: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죠. 그리고 2월달부터 미리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대학생이 개학을 하고 개강을 하게 되면 시위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예상을 한 거죠. 그러니까 새학기 준비를 학생하고 군인하고 같이 한 거예요.
최원정: 그렇네요.
김태훈: 그 당시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들여다 보지 않으면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이 남긴 수기가 있어요.
---------------공수부대원의 일기: 지휘관들은 우리의 행동이 너무 인간적이라고 질책이 대단하였다. 심지어 유순하게 생긴 몇몇 대원들을 불러내어 진압을 이렇게 해야 한다며 시위진압봉으로 그들을 구타하며 방법까지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5.18 자료총서 11권> 중에서, 500md(헬기), 장갑차까지 동원된 힘든 충정훈련, 매일밤 출동준비 군장을 꾸렸다. 해체와 반복되는 훈련과 훈련의 연속, 또한 퇴근하지 못한 영외거주자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병식사에 대한 불만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학생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게 하였고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복을 학생구타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우리 모두는 충만되어 있었다.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 (중략) 투입됐던 한 공수 부대원의 수기> 중에서~
다니엘: 부마항쟁에서 시작해서 10.26, 12.12, 걸쳐서 공수부대원들이 한번도 휴가를 제대로 못갔다고 하더라구요. 스트레스가 어쩌면 시위대를 향해서 가지 않았을까.
이시원: 놀라운건 지휘관이 분노를 더 부추기고 있잖아요. 보통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역활이잖아요. 근데 그걸 막을려고 잠잠하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사고가 나겠끔 부추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어요.
허진모: 꼭 사냥개 풀기 전에 군기강화, 잔인하게 괴롭히다가 스트레스를 키우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최원정: 공수부대원들 보면 헬멧 쓰고 있잖아요. 시민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더 과감해질 같애요.
김태훈: 정확한 지적이신대요. 이걸 di-identification 이라고 하거든요. 무슨 얘기냐 하면 개인의 신원을 가려버리는 거죠. 진압할 때는 방독면 쓰고 있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거죠. 이렇게 되면 실제로 공격성이 극도로 증가할 수도 있어요. 예전에 원시부족들이 전투를 치르러 나갈 때 얼굴에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다 칠하고 나가잖아요. 왜 그러냐면 그냥 나가는 것보다 그렇게 칠하고 나가면 훨씬 더 좋게 표현하면 용맹하게 싸울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적용이 되면 폭력성만 굉장히 키운 가능성이 있어요.
이시원: 여러가지 상황이 특수부대원들의 공격성을 높힐 수 밖에 없겠끔 조장이 된 거 같애요.
다니엘: 전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왜 하필 광주인가?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는 거 같애요. 왜냐면 그런 계엄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는데 그러면 광주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했나요?
오제연: 예를 들어서 5월 18일 서울에서도 성균관대 학생 한 명이 계엄군으로부터 구타를 당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구타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려요. 근데 반면에 광주에서는 우리가 알듯이 시간이 갈수록 계엄군의 폭력성이 그 정도를 더해가는 거죠. 5월 18일 오전부터 계엄당국은 광주 일원에 계엄부대를 더 증파하는 그런 모색을 하게 되구요. 결국 11공수여단을 광주로 증파하는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19일이 되면은 여기에 더해서 장갑차 헬리곱터 이런 것까지 투입을 하게 되는 거죠.
최원정: 근데 이게 지금 소요가 크지도 않고 학생들 수가 많아봤자 천명 이게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명분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시원: 시위진압 양상이 완전히 다른 것 같애요. 전 이해가 안 가는게 왜 이렇게 강경하게 했나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5.18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북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강경하게 한 거 아니냐 하는 말들도 있는데 이건 좀 팩트 체크를 하고가야 될 것 같애요. 제가 일기로는 전혀 아니거든요.
김태훈: 제가 알기로도 그 당시에 우리나라 정부가 북한과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1980년 2월~8월: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 총리회담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게 잘 들어맞지가 않습니다.
오제연: 1980년 5월에 북한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하는 소위 말하는 북한의 안보위협설 또는 북한의 남침설 이런 것들이 광범위하게 유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소문의 진원지가 중앙정보부였어요. 바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고 있는 그 부서에서 이러한 북한의 위협, 남침에 대한 이야기들이 확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도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검토를 했는데 북한군 동향에 아무런 이상징후가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린 거예요. 한편에서는 남북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한마디로 당시에 이런 북한의 남침설 남침위협설 이라고 하는 것은 신군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일종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용도로 쓰인 중앙정보부의 소문이었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그리고 제가 조금 듣기로 시민들도 신군부가 그걸 이용할까봐 굉장히 그거에 대한 경계를 많이 했다고 들었거든요. 그리고 확실히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신군부에 저항하는 세력이지 이게 전혀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고, 당시 시위대의 구호 중에서 1980냔 5월 15일 서울역에서 10만명의 학생들이 모였을 때 여러가지 구호를 외쳤는데 그중의 하나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 이런 구호가 있었구요. 그 다음에 광주에서도 시위대가 만약에 북한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나가서 싸우겠다 이런 얘기들을 했다는 거죠.
김태훈: 지난 국회에서 전두환이 왜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할려고 했는지 이야기를 했잖아요. 정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은데 이게 광주 이외의 지역에 우리가 지금 북한의 위협에서 우리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사용하기 위한 그런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시원: 하나의 공공의 적을 만드는 거군요! 그게 광주였던 거에요.
-----------------(동영상) 기자: 1980년 5월 20일 저녁 택시기사들이 차량 시위를 벌인다. 광주 시내 곳곳을 다니던 택시 기사들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을 목격했고 직접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유병량/당시 택시기사: 계엄군이 차 문을 열자마자 이유도 없이 물어보지도 않고 학생들을 총구로 그냥 막 쑤셔대더라구요. 제가 이 사람들은 학생이 아니다 이사람들은 직장에서 퇴근한 사람들이다 하니까 이 XX야, 너는 가만히 있어 이 자식아, 하면서 구타를 하더라고요. 총 개머리판으로 제 머리, 여기를~ 기자: 광주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택시 등 시위 차량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어느새 시위는 광주 시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허진모: 그렇죠, 5월 18일, 19일이 지나면서 시위대는 이제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호응하고 가세하는 모양이 됩니다. 시민들이 생각하기에도 군인들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된거죠. 그래서 5월 18일에 학생 시위대 규모는 천명 남짓이었는데 그 다음날인 19일에는 금남로에만 2만여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김태훈: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18일에 시위를 할 때 이미 사상자가 발생했잖아요. 그리고 점점 더 진압이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학생들이 내세우는 시위 구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형제 자매 친척 친구들이 다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위가 아니라 우리를 보호해야 되는 그런 프레임으로 바뀌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광주 시민 인터뷰 중에 이런 말씀 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내가 광주에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서 나는 그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 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아니 상식적으로 내 새끼가 길거리에서 죽도록 맞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어요? 일종의 생존본능 같은 거~
오제연: 이렇게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계엄군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1980년 5월 20일 밤에 광주시청을 지키던 3공수 여단 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가 되요. 그래서 3공수 여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새롭게 공수부대들이 그 지역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와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이때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서 첫번째로 집단 발포를 하게 됩니다
-----------------(동영상) 기자: 공수부대의 발포 후인 1980년 5월 21일 새벽 광주역 부근에서 처참하게 버려진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19세 허봉과 34세 김재화, 이들의 사인은 총상과 구타였다. 슬픔과 분노로 가득찬 광주시민 10만여 명이 도청 앞에 집결한다. 그리고 그 시민들 앞에는 실탄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있었다------------------
오제연: 저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고 저 시신을 시민들이 확인하면서 21일 시위는 훨씬 더 크게 확대가 됩니다. 5.21. 오전 10시경에 도청 앞에는 10만여 명의 광주시민들이 모여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구요. 당시 광주 인구가 73만명 정도니까 어마 어마한 인파가 몰렸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시민들은 버스나 여러가지 차량들을 끌고 나와서 계엄군과 맞섰는데 하지만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있었다는 거죠.
이시원: 저 와중에도 시민들은 공수부대 부대원들한테 이 짓도 먹어야 한다면서 김밥도 주고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최원정: 계엄군한테~
이시원: 그리고 또 광주 시민들은 이때까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 같애요. 이렇게 많이 모여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설마 더 한 짓을 할까.
오제연: 당시 시위대가 요구한 것은 폭력진압을 자행한 계엄군의 공개사과, 연행된 학생 및 시민들의 석방 그리고 정오까지 계엄군이 철수 하는 것들을 계엄군에게 요구를 했어요. 하지만 계엄군은 정오까지도 철수하지 않고 계속 시위대와 대치를 하고 있었고 오후 1시경에 화염병을 통해서 일단 계엄군의 장갑차에 공격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계엄군의 저지선을 뒤로 물러나게 했고 자신들이 동원한 차량들을 이용해서 이 저지선을 뚫을려고 시도합니다. 바로 이때부터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서 집단으로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해요. 많은 사상자가 발생을 하는데 당시 각 병원의 응급실에 통계들을 보면은 이 날 발포로 백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구요. 당시 또 계엄군의 변사자 명단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 명단들의 숫자가 제 각각이긴 하지만 55~58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최원정: 이 날이 5월 22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면서요. 어떤 살생도 금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진짜 무색해지는 아이러니한 날이었네요.
허진모: 그런데 조금 더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사이에 조준 사격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많은 분들이 증언을 하고 있는데요. 조준사격의 대상은 또 시위대 뿐만 아니라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고요. 빌딩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직장인들을 향해서 쏴서 피격 당해서 사망한 분도 있구요. 주택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신 7개월의 임산부가 맞아서 사망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고생이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총에 맞아 죽고요.
이시원: 이게 무슨 시위진압이에요. 이건 정말 명백한 폭력이자 학살이죠.
오제연: 정작 군 자료에는 이날 발포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어요. 심지어 군 자료에는 시민들이 먼저 총을 들고 발포를 해서 자신들이 여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어떤 행위를 했다 이런 식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거죠. 하지만 2018년에 국방부 특별조사 위원회에서 이런 자료들의 문제들을 점검을 해봤는데 당시 군 자료들이 대부분 의도적으로 조작되거나 은폐되어 있는 정황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문제인데 지금 군 자료를 우리가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은 군 관련자들의 증언도 있지만 아까 우리가 대검문제에서 봤듯이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있고 더 큰 문제는 이런 여러 조사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얘기를 해주어야 할 분들이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대검 장착한 사건 군인 있잖아요. 그 사람이 누군지도 파악했어요. 그분한테 증언을 요청했는데 거부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에요.
이시원: 저는 이걸 파면 팔수록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 나치가 몰락할 때 가장 먼저 했던게 관련자료 은폐였는데~지금 똑같이 하고 있거든요.
오제연: 지금 나오는 소위 5.18에 대한 수많은 음모론과 같은 이야기들은 그런 군 자료에 굉장히 의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군 자료 자체가 조작되고 은폐되어 있다, 역사학적으로 사료 비판인데 그런 사료 비판 없이 자기들이 봐서 조금 끌리는 것들, 자기들한테 유리한 것들만 몇 개 뽑아가지고 그걸로 소설을 쓰는 거죠.
최원정: 지금 까지 집단 발포 명령자나 책임자에 대해서 그 의혹이 규명되지 않고 있어요. 집단 발포를 결정하고 명령한 사람이 누구였을 것 같애요?
허진모: 5.18 직전에 그러니까 1980년 4월에 강원도 사북에서 광부들이 노동항쟁을 합니다 (사북항쟁-1980년 4월 21일~24일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에서 발생한 노동항쟁), 그런데 신군부에서는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여기에도 공수부대를 투입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총기사용에 대한 원칙을 알 수가 있는데요. 총기사용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얻고 난 후에 가능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1군사령부 보안부대<동원탄좌 사태진정 상황>-총기 사용은 긴급시라도 육군참모총장 승인 후 가능),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광주에서도 함부로 발포할 수 없었던 거죠. 다음에 상황적으로 봤을 때도 동급 동종의 무기를 갖춘 적을 상대로 교전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제반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현장에 있는 하급 지휘관이 원칙을 어겨가면서 독단적으로 발포 할 수 있을까. 발포는 분명 군최고 지휘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 면이죠.
김태훈: 그런데 우리가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계속 확인하는 노력을 해오고 있어요. 저는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누구인지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발포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는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논쟁이 발포명령을 안했으니까 책임이 없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절대 안된다는 거죠. 누가 했던 간에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제연: 5.18 당시 군 자료가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은폐되는 바람에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특정하는 것은 현재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록이 없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구요. 또 하나 여기서 약간 복잡한 문제가 당시에 명령체계가 이원화 되어 있었던 문제하고 관련이 있어요. 원래는 계엄하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수직적인 구조로 말단 부대원까지 명령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사실 그 구조 속에서 전두환이 위에 있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 전두환이 누가 봐도 가장 실권자였고 실제로 당시 공수부대는 전두환에게 가장 충성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그런 공식적인 지휘계통과는 전혀 무관하게 부대들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고 이런 이원화된 명령계통에서 전두환의 책임소재가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거죠.
허진모: 관리책임도 있고 지휘책임도 있고 상급자인데 그 어떤 경우라도 책임을 져야죠.
최원정: 그래서 5월 21일은 어떻게 흘러가나요, 교수님?
오제연: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맞서서 시민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위해서 총을 들기 시작합니다. 시민들은 광주 인근의 경찰서, 지서, 파출소 이런 등지에 있는 무기고로 가서 무기들을 꺼내오는 거죠. 그러면서 스스로 무장을 합니다. 계엄군은 일단 21일 오후 늦게 광주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지게 됩니다.
허진모: 계엄군 철수하고 나면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안정화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시신을 수습하고 그러는데요. 광주기독병원 같은 경우에는 헌혈자들이 몰려오는데 1400여명 정도가 몰려오고요. 그것을 받을 인력이 없어서 다 헌혈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니엘: 저도 들은 얘기가 뭐냐 하면은 그때는 질서 자체가 잘 유지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은행이라든지 농협 같은데 그런 금융기관에서도 도둑질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허진모: 맞습니다. 외신에서도 굉장히 놀랐다고 하죠. 단 한 건의 약탈과 방화도 없었다죠.
오제연: 엄청나게 많은 총기가 지금 밖으로 나온 상황에서도 그런 상황 임에도 광주시내 질서가 이렇게 잘 잡혀있고 또 시민들이 힘을 모았다라고 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태훈: 생각해 보면 그 당시가 지금 계엄군이 철수를 했으나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잖아요. 통신이 끊어져 있고 외곽으로 이동하고 그 상황에서 그렇게 안정적인 상태로 사회를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요. 지금 코로나 때문에 유럽의 여러나라들 낙담을 하고 있죠. 그런데 봉쇄 때문에 힘들어 하는 많은 분들이 있고 그중에 일부는 폭동을 일으켰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거든요.
허진모: 그거 보다 훨씬 더 심한 전투상황, 전쟁상황과 같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광주시민들이 얼마나 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는지를 볼 수 있고 더구나 불순세력이 했다 라는 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 그런 걸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최원정: 5월 21일 오후에 이제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철수했는데 또 외곽에서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광용: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이 시위 현장에서는 일단 철수했지만 계엄사령부는 전국에 파견된 계엄군 병력 2만2천3백42명 중 절반이 넘는 만5천6백13명을 광주지역에 배치시키며 압박을 고조시키고 있었습니다. 특히 공수 부대원들에게 1인당 실탄 무려 580발 수류탄 2개씩을 지급하면서 사실상 전시상황에 돌입합니다. 한 공수 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영화 람보에 나오는 주인공 처럼 탄띠를 양쪽 어깨에 교차시키며 두를 정도로 실탄을 많이 지급했다고 합니다--------
다니엘: 아니 시내에서 지금 철수했는데 왜 많은 탈환이 필요한 거죠? 말이 안되잖아요?
이광용: 광주 시내에서 잠시 물러났던 계엄군은 광주 외곽지역에서 만행을 이어가는데요. 여기 주남 마을에서는 5월 22일부터 공수여단 병력이 주둔하면서 길을 막고 사람과 차량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습니다. 특히 23일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던 미니 버스에 계엄군이 총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하는데요.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부상자 3명 중 두 명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확인사살 후에 암매장까지 했다는 겁니다.
이시원: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네요.
이광용: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5월 24일 11공수여단이 이곳 송암동 부근을 지나던 도중 매복해 있던 같은 군 전투교육 사령부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시민군이 공격을 하는 줄 알고 계엄군 끼리 오인사격을 하는 상황이 발생한 건데요. 이로 인해서 11공수여단 대원 9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합니다. 11공수여단은 현장 수습을 한 후에 인근 마을 젊은이들을 무단 연행해 4명을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이시원: 아니 가만히 있는 시민을 도대체 왜요? 오인 사격하고서 분풀이 하는 건가요?
이광용: 여기에 더해서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공수부대들에 대해 불상폭도들에 의해서 장렬히 전사한 것처럼 꾸미고 무공훈장까지 추서합니다.
이시원: 어휴~ 말도 안돼~
이광용: 광주 외곽지역에서 공수 부대원들에 의해서 폭력에 많은 민간인이 희생을 당했는데요. 이곳 진월 마을 부근에 살던 11살 초등학생 전재수 군은 마을 공터에서 놀다가 공터 바로 앞을 지나던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아무 이유없이 희생되었습니다.
다니엘: 군인아니면 적으로 취급하고 무작정 쏘는 그런 느낌이네요. 굳이 11살 아이까지는~?
이시원: 이거는 그냥 광기라고 밖에 볼 수가 없을 것 같애요.
최원정: 최후의 발악 같은 건가요~ 군인들이 수세에 몰린 것도 아니고, 도저히 이해가 안돼요.
허진모: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그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최원정: 한 다큐멘터리에서 아버지께서 전재수 학생이랑 동생이 집에서 막 시끄럽게 싸우면서 노니까 너희들 나가서 놀아라 했는데 그게 그 아들이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그래요.
허진모: 처음에 보셨던 방광범 학생도 전재수 학생이 희생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수지에서 놀다가 희생되었던 거죠.
이시원: 정말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곳에서 계속 이런 희생이 있었던 거잖아요. 저희가 이 광주에 5.18 민주화 운동을 너무 잘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최원정: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에 의해 민간인의 학살이 이어지는 가운데 광주에서 열흘 마지막 날 5월 27일이 다가왔습니다.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철수를 했습니다.
-------------------김정기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 관을 붙들고 통곡하는 엄마들, 사람들, 그리고 도청, 마지막 사수대가 남은 전남 도청~--------------------
이시원: 지금 관을 붙들고 사람들이 우는 데요.
최원정: 계엄군이 다시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모두 불안에 떨고 있었을 거에요.
이시원: 저기가 도청인가요?
최원정: 저기에 마지막 사수대가 도청에 남았었죠~
다니엘: 마지막 전투 같은 느낌이에요.
이시원: 지금 무기를 반납하고 그러는 것 같애요.
최원정: 반납하지 않고 남아 있겠다고 끝까지 결의를 다지는 일부 시민들입니다.
오제연: 하지만 시 외곽이 계엄군에 의해서 봉쇄된 상황에서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두가지 의견으로 나뉘게 됩니다. 한편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먼저 반납하자 라고 주장을 했고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계엄군이 먼저 자신들의 행위를 사과하고 또 책임자에 대한 처벌 같은 조치를 취해야 우리가 무기를 반납할 수 있다 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싸우고자 했던 우리가 흔히 항쟁파 라고 부르는 시민군들은 전남도청에 모여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허진모: 항쟁파도 정말 실탄사격을 해가면서 싸우려고 나갔던 건 아니죠. 만약에 진짜 붙었다면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모조리 전부 다 해산해 버리면 그들이 마음대로 자기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어떻게 결론을 지을지 모르니 그러한 여러가지 고심 끝에 남아 있기를 주장했던 세력들이죠. 그 사람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널리 알려져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제연: 시민군에서도 항쟁파들도 이것이 너무 과도한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폭탄이나 이런 것들은 굉장히 잘 관리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구요. 이렇게 시민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계엄군과 타협을 모색할려고 했는데 그런데 계엄군측에서는 사실상 투항을 요구하는 것이고 안그러면 무력으로 진압을 하겠다.
허진모: 그래서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들은 광주 시내로 들어옵니다. 새벽 4시에 3공수여단이 전남도청으로 들어갑니다. 최정예 부대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을 합니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방하나 방하나를 수색해 가면서 무차별 발포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두 손 들고 투항한 사람들까지도 사격을 했습니다.
이시원: 정말 적군도 그렇지 않겠어요.
최원정; 사실 정말 어른과 아이 싸움이라고 했는데 진압이~
오제연: 그렇죠, 도청 진압 1시간만인 새벽 5시 10분에 계엄군은 광주시를 완전히 장악을 합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사라져 가는 시민들-상황종료 후 연행되는 시민을 구타하는 계엄군-그렇게 계엄군은 광주를 점령했다), 그리고 오전 7시 27분에 보도문을 발표했어요. 그 내용을 보면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병력을 광주 시내에 투입하였다.
최원정: 어떻게 이런 말을 함부로 하죠. 선량한 시민들을 구출을 했다구요. 참~ 어이가 없네요.
이시원; 무고한 희생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런 보도를 할 수 있는지~
최원정: 대부분 광주 시민들은 문 걸어 잠그고 다들 집에서 통곡을 했을텐데요.
오제연: 5월 27일 새벽에 선무방송을 하던 한 여성이 광주 시민들에게 호소를 하는 거예요. 지금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 같고 지금 그대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그들과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방송을 듣는 광주 시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굉장히 저려오고 너무나 먹먹해지는 그리고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드는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진모: 지도 교수께서는 그때 증언들을 들으셨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서워서 집안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서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계엄군이 들어와도 다시 희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너무 무서웠을 것같아요.
오제연: 보았잖아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그들이 광주 시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두 눈으로 직접 경험했던 분들이고 그 앞에서 당당하게 나서서 맞서기는 너무나 어렵지 않았을까.
최원정: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장악한 후에도 무고한 희생이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읽어드릴게요, 이금제-한약방으로 출근하던 길에 총격사망, 김성근-우체국 근처에서 총격사망, 양동선 & 오세현-직장 근무 중 총격사망, 김명숙-당시 14세 계엄군의 검문이 두려워 도망치다 총격사망, 염행렬-당시 나이 16세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사망,
이시원: (울먹이면서) 정말 말을 이을 수가 없네요.
최원정: 왜 이래야 되는 거죠? 다 상황이 종료 되었는데~ 광주를 진압한 진압군들은 설마 대단한 어떤 승리를 얻은 군인처럼 축하의 분위기에 휩쌓였을까요~
허진모: 광주를 다룬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제가 본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동영상). 시민군들을 진압하고 난 다음에 민간인을 상대로 그 짓을 하고 이겼다고 생각해서 그 짓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다들 모여서 힘차게 군가를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근데 그중에 한 계엄군이 그 노래를 부르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영상).
오제연: 5.18 민주화운동 진압 후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라고 하는 기구를 설치합니다. 국보위는 신군부의 집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고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유신헌법에 따라서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결국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됩니다. 12.12 사태부터 약 6개월간 진행된 긴 쿠데타가 그 과정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전두환이 폭력적으로 진압을 하면서 마무리가 된 그런 상황이었다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동영상).
이시원: 결국 저렇게 권력을 찬탈했네요.
최원정: 얘기 듣고 나니까 앞으로 저 얼굴은 못볼 것 같애요. 그렇지 않아요?
다니엘: 진짜 그래요.
최원정: 해외 취재를 다니는 피디나 기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미얀마 태국 중국의 소수민족들을 만나면 그들이 먼저 5.18 민주화운동을 얘기를 한대요. 아시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민주화 항쟁이었다. 우리도 그 길을 좀 따라가고 싶다. 그래서 2011년 이었죠. 민주화 운동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는데 5.18 정신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될 것 같애요. 오늘 5.18을 맞이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시원: 끔찍하고 부정적인 사건일수록 자기도 모르게 피하게 되잖아요. 5.18민주화운동도 그런 것 아니었나 싶어요. 저도 좀 반성하게 되었구요. 이건 단순히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군부에 맞서는 독재에 맞서는 여러 시민들의 한 목소리였음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 같애요.
다니엘: 대한민국 사람들은 참 평화를 좋아하면서도 용감하고 필요할 때 정말 나서서 싸우는 사람들인 것 같애요. 이런 사건들 잘 밝혀내고 다같이 극복하면 이건 대한민국의 사회통합에 정말 중요한 부분이 된다고 생각하고 더 강한 나라를 만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태훈: 前아시아 월드 스트리트 저널 기자 노먼 소프의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그분이 광주 도청에서 마지막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시신을 봤는데 눈이 반 정도 감겨 있어서 반쯤 감긴 눈을 감겨주고 싶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우리는 과연 광주에서 희생당한 분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그동안 무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제대로 정확한 진실을 파악하고 그걸 공식화 해 나가는 작업을 하면 그때 희생당한 분들의 눈을 편안하게 감겨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진압군에 죽임 당한 수십명 희생자들 관 안치 동영상),
허진모: 서양 역사학계에서는 40년의 법칙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이 뭐냐면 한 사건이 일어나고 40년 정도가 지나면 좀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수많은 파편적인 기억들이 검증이 되고 그 다음에 새로운 문서가 공개가 되고 발견이 되고 그리고 핵심증언자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거나 이런 현상으로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그런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많은 분들이 아직도 5.18이냐 아직도 광주냐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요 이제 5.18민주항쟁이 40년을 좀 넘겼습니다. 이제야 말로 제대로 된 검증을 시작해야 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제연: 5.18 민주화 운동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정치군인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국민을 지켜야할 군대가 국민을 지키지 않고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바로 5.18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죠.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당시부터 그 권력자들의 의도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그 왜곡이 수많은 진상규명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작까지 불식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5.18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제가 5.18과 관련된 어떤 문제들을 해결할 때는 저 같은 역사학자들이 진상을 잘 구명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좀 더 성숙할 필요가 있다 그때 5.18은 정말 역사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이제 부터가 시작이라는 여러분들의 말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역사가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쓰러져간 많은 희생자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좀 더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역사저널 그날 300회였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00회에서 정리).
①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서 군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권력욕은 1980년 4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으로 노골화된다. 이에 맞서서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전두환의 집권을 막기 위한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러자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5.17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통해서 전국 일원에 더 많은 계엄군을 투입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계엄군들이 광주에도 대거 투입된다. 5월 18일이 되자 많은 학생들이 전남대 교문 앞으로 모인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광주의 열흘,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② 5월 18일 경철 병력만으로 진압가능, 광주시내 시위 학생들 수는 천명 정도, 경찰 10개중대 천명, 육군 공수부대는 정규군 중에서도 최상위 수준의 최정예부대, 6.25 한국전쟁 때도 한국 공수부대는 김일성 북한 지휘부를 생포하는 목적으로 편성 투입, 이런 최정예 부대를 민간인 시위진압에 투입, 계엄 확대이전 5월 14일~16일 3일 동안은 경찰력으로 진압 평화롭게 종료, 공수부대는 완전히 달랐다. 계엄군은 무자비했다 공수부대 투입 첫날부터 두명의 사망자, 5.18 첫날 한명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청각 장애인, 100일된 아기와 귀가하는 도중에 폭행 당해 사망,
③ 5월 19일에, 5월 18일에 투입, 공수특전단은 대검을 빼들고 미친 망나니처럼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중략~ 흘렀다: 시위진압에 대검 사용, 1988년 12월 광주 5.18국회청문회, 시위진압에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한 쟁점, 많은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 분명 대검 사용했다. 계엄군측 당시 7공수 33대대장과 35대대장 대검사용한 일 전혀 없다, 광주기독병원 의무기록실 5.18 민주화운동 사상자들 진료기록에 희생자의 얼굴과 몸에 자상, 칼로 인한 상처라고 기록, 당시 계엄사 발표 인용 신문기사도 자상으로 인한 사상자가 명시.
④ 당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5월 18일 20시 15분에 7공수부대가 총검진압, 계엄군 대검 사용 명백한 사실,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 1980년 2월부터 폭동진압훈련인 충정훈련만 계속했고 특히 7공수여단은 폭동진압경연대회도 개최, 2월부터 폭동진압훈련을 했다는 것은 민주화에 대한 요구시위가 더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을 예견, 막기 위해 신군부 미리 준비, 5.18이전 1979년 10월 부마 민주항쟁 때도 공수부대 시위진압 투입, 직후에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작전평가서에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군대만 보면 겁이나서 데모의지를 상실하도록 위력을 보여라. 초동단계에서 강력하게 진압하라.
⑤ 부마항쟁 때 현장에 계엄사령관이 아닌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출현, 부마항쟁(1979) 때의 경험을 1980년 광주에서 실험, 2월부터 새학기 준비를 학생과 군인이 같이, 한 공수부대원의 일기, 지휘관들은 우리의 행동이 너무 인간적이라고 질책, 심지어 유순하게 생긴 몇몇 대원들을 불러내어 시위진압봉으로 그들을 구타하며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500MD(헬기), 장갑차까지 동원된 힘든 충정훈련, 매일밤 출동준비 훈련의 연속, 퇴근하지 못한 영외거주자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병식사에 대한 불만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학생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게 하였고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복을 학생구타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모두는 충만, 부마항쟁에서 시작해서 10.26, 12.12, 공수부대원들은 한번도 휴가를 못갔다.
⑥ 진압할 때 방독면 쓰면 누군지 모른다. 이러면 공격성이 극도로 증가, 원시부족들 전투 나갈 때 얼굴에 다 칠했다. 그냥 나가는 것보다 칠하고 나가면 더 용맹하게 싸운다. 여러가지 상황은 특수부대원들의 공격성을 높힐 수 밖에 없었다. 5월 18일 서울에서도 성균관대 학생 한 명이 계엄군으로부터 구타를 당한 사건 발생, 학생들에 대한 구타 금지 명령. 광주에서는 5월 18일 오전부터 계엄당국은 광주 일원에 계엄부대 증파, 11공수여단 광주로, 19일에 장갑차와 헬리곱터까지 투입, 그 당시 한국정부는 북한과 회담 진행 (1980년 2월~8월: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 1980년 5월에 북한 남침설은 허위, 이 소문의 진원지는 중앙정보부, 바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고 있는 그 부서에서 확산,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에서도 북한군 동향에 이상징후가 없다는 결론,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장악을 위해 분위기 조성,
⑦ 1980. 5.18 광주항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신군부에 저항하는 세력이지 이게 전혀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고, 당시 시위대의 구호 중에서 1980냔 5월 15일 서울역에서 10만명의 학생들이 모였을 때 여러가지 구호를 외쳤는데 그중의 하나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 이런 구호가 있었다. 그 다음에 광주에서도 시위대가 만약에 북한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1980년 5월 20일 저녁 택시기사들이 차량 시위를 벌인다. 광주 시내 곳곳을 다니던 택시 기사들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을 목격했고 직접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계엄군이 택시차 문을 열자마자 이유도 없이 물어보지도 않고 학생들을 총구로 그냥 막 쑤셔대었다. 광주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택시 시위 차량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어느새 시위는 광주 시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5월 18일, 19일이 지나면서 시위대는 이제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호응하고 가세하는 모양이 되었다. 시민들이 생각하기에도 군인들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5월 18일에 학생 시위대 규모는 천명 남짓이었는데 19일에는 금남로에만 2만여명이 모였다.18일에 시위를 할 때 이미 사상자가 발생했다. 점점 더 진압이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학생들이 내세우는 시위 구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형제 자매 친척 친구들이 다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시위가 아니라 우리를 보호해야 되는 그런 프레임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내가 광주에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서 나는 그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 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⑦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계엄군이 점차 수세, 1980. 5. 20. 밤에 광주시청에 3공수 여단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 3공수 여단 구출하기 위해 새롭게 공수부대 이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와 시민들 사이에 충돌, 이때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서 첫번째로 집단 발포, 공수부대 발포 후인 1980.5.21. 새벽 광주역 부근에서 처참하게 버려진 두 구의 시신발견, 19세 허봉과 34세 김재화, 사인은 총상과 구타, 슬픔과 분노로 가득찬 광주시민 10만여 명이 도청 앞에 집결, 시민들 앞에는 실탄으로 무장한 계엄군, 시신을 시민들이 확인하면서 21일 시위는 훨씬 더 크게 확대, 5.21. 오전 10시경 도청 앞에 10만여 명의 광주시민들이 시위시작, 당시 광주 인구가 73만명 정도, 어마 어마한 인파, 시민들은 버스나 여러가지 차량들을 끌고 나와서 계엄군과 맞섰는데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있었다. 시위대 요구는 폭력진압을 자행한 계엄군의 공개사과, 연행된 학생 및 시민들의 석방 그리고 정오까지 계엄군이 철수, 계엄군은 정오까지도 철수하지 않고 계속 시위대와 대치, 오후 1시경에 시민군들 화염병을 던져 계엄군의 장갑차에 공격, 계엄군 뒤로 물러나게 했고 시민군들 차량들을 이용해서 저지선을 뚫을려고 시도, 이때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서 집단 발포사건 발생, 많은 사상자 발생, 각 병원의 응급실에는 백여명의 사상자가, 계엄군도 55~58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기록,
⑧ 더 소름 끼치는 것은 많은 분들의 증언, 조준 사격이 있었다고, 대상은 시위대 뿐만 아니라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고, 빌딩에서 지켜보고 있던 직장인들을 향해서 쏴서 사망한 분도 있고, 주택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신 7개월의 임산부가 맞아서 사망했고, 여고생이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총에 맞아 죽고, 이건 시위진압이 아니고 명백한 폭력이자 학살, 군 자료에는 이날 발포와 관련된 자료가 없다. 군 자료에는 시민들이 먼저 발포를 해서 자신들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포를 했다. 이런 식의 기록만 남아 있다. 2018년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자료들의 문제들을 점검을 해봤는데 당시 군 자료들이 거의 의도적으로 조작되거나 은폐되어 있는 정황확인, 지금 군 자료를 신뢰할 수 없다. 큰 문제, 군 관련자들의 증언도 있지만 대검문제에서 봤듯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조사 과정에서 중요한 얘기를 해주어야 할 분들이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대검장착한 사건 군인을 파악했는데 당사자가 증언을 거부,
⑨ 지금까지 집단 발포 명령자나 책임자가 규명되지 않았다. 5.18 직전에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에서 광부들이 노동항쟁, 신군부는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여기에도 공수부대 투입, 그 과정에서 총기사용에 대한 원칙, 총기사용은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얻고 난 후에 가능(1군사령부 보안부대<동원탄좌 사태진정 상황>), 광주에서도 함부로 발포할 수 없었다. 상황적으로 봤을 때도 동급 동종의 무기를 갖춘 적을 상대로 교전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제반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현장에 있는 하급 지휘관이 원칙을 어겨가면서 독단적으로 발포 할 수는 없다. 발포는 분명 군최고 지휘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현재까지 발포 명령자를 계속 확인하는 노력,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 실제 누구인지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발포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는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발포명령을 안했으니까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흘러가면 절대 안된다. 누가 했던 간에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5.18 당시 군 자료가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은폐되는 바람에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특정하는 것은 현재 어려운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기록이 없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명령체계가 이원화, 원래는 계엄이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수직적인 구조로 말단 부대원까지 명령이 이루어져야 되었다. 그 구조 속에 전두환이 위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전두환이 가장 실권자였고 실제로 당시 공수부대는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그런 공식적인 지휘계통과는 전혀 무관하게 부대들이 움직였을 가능성, 이런 이원화된 명령계통에서 전두환의 책임소재가 모호해지는 측면, 책임에는 관리책임도 있고 지휘책임도 있고 그 어떤 경우라도 책임이 있다.
⑩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맞서서 시민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위해서 총을 들기 시작, 시민들은 광주 인근의 경찰서, 지서, 파출소 이런 등지에 있는 무기고로 가서 무기들을 꺼내와 스스로 무장, 계엄군은 일단 21일 오후 늦게 광주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진다. 계엄군 철수하고 나면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안정화를 위해서 노력,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시신을 수습, 광주기독병원 에 헌혈자들이 1400여명 정도 몰려와서 인력이 없어서 다 헌혈을 받지 못했다, 그때 광주는 질서 유지가 자체로 잘 유지되었고, 은행이나 농협 같은 금융기관에서도 도둑질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지금 엄청나게 많은 총기가 밖으로 나온 상황에 광주시내 질서가 잘 잡혀있고 시민들이 힘을 모았다라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현상, 그 당시 계엄군이 철수를 했으나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상황, 통신이 끊어져 있었고 안정적인 상태로 사회를 유지, 전투상황, 전쟁상황과 같은 측면에서 광주시민들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 불순세력이 했다라는 건 말이 안된다. 5월 21일 오후에 외곽에 있는 계엄군에게서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다.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이 시위 현장에서는 일단 철수했지만 계엄사령부는 전국에 파견된 계엄군 병력 2만2천3백42명 중 절반이 넘는 만5천6백13명을 광주지역에 배치, 압박을 고조, 공수 부대원들에게 1인당 실탄 580발 수류탄 2개씩을 지급하면서 사실상 전시상황에 돌입,
⑪ 광주 시내에서 잠시 물러났던 계엄군은 광주 외곽지역에서 만행, 주남 마을에서 5월 22일부터 공수여단 병력이 주둔하면서 길을 막고 사람과 차량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 23일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던 미니 버스에 계엄군이 총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이 중상, 더 충격적인 건 부상자 3명 중 두 명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확인사살 후에 암매장, 5월 24일 11공수여단이 송암동 부근을 지나던 도중 매복해 있던 같은 군 전투교육 사령부의 총격을 받았다. 시민군이 공격을 하는 줄 알고 계엄군 끼리 오인사격을 하는 상황 발생, 이로 인해서 11공수여단 대원 9명 사망 38명이 부상, 11공수여단은 현장 수습을 한 후에 인근 마을 젊은이들을 무단 연행해 4명을 살해,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공수부대들에 대해 불상폭도들에 의해서 장렬히 전사한 것처럼 꾸미고 무공훈장까지 추서, 광주 외곽지역에서 공수 부대원들에 의해서 폭력에 많은 민간인이 희생, 진월 마을 부근에 살던 11살 초등학생 전재수 군은 마을 공터에서 놀다가 공터 바로 앞을 지나던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아무 이유없이 희생,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그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⑫ 처음 방광범 학생도 전재수 학생이 희생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수지에서 놀다가 희생,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곳에서 계속 이런 희생이 발생,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에 의해 민간인의 학살이 이어지는 가운데 광주에서 열흘 마지막 날 5월 27일 시 외곽이 계엄군에 의해서 봉쇄된 상황에서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두가지 의견, 한편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먼저 반납하자 라고 주장을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계엄군이 먼저 자신들의 행위를 사과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조치를 취해야 무기를 반납할 수 있다 라고 의견 양분, 마지막까지 남아서 싸우자는 항쟁파 시민군들은 전남도청에 모여서 마지막 결전을 준비, 항쟁파도 실탄사격을 해가면서 싸우려고 나갔던 건 아니다. 모조리 전부 다 해산해 버리면 진압군들이 마음대로 자기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어떻게 결론을 지을지 모르니 여러가지 고심 끝에 남아 있기를 주장했던 세력들, 그 사람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어떤 과정으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널리 알려져야할 필요가 있다.
⑬ 시민군 항쟁파도 이것이 과도한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폭탄이나 이런 것들은 잘 관리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다. 시민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계엄군과 타협을 모색할려고 했는데 계엄군측에서는 투항을 요구하였고 안그러면 무력 진압을 하겠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들은 광주 시내로 들어온다. 새벽 4시에 3공수여단이 전남도청으로 들어간다. 최정예 부대가 압도적 병력으로 공격한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방 하나 하나를 수색해 가면서 무차별 발포, 두 손 들고 투항한 사람들까지도 사격, 사실 어른과 아이 싸움이었다. 도청 진압 1시간만인 새벽 5시 10분에 계엄군은 광주시를 완전히 장악, 계엄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사라져 가는 시민들-상황종료 후 연행되는 시민을 구타하는 계엄군-그렇게 계엄군은 광주를 점령했다, 오전 7시 27분에 보도문 발표,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병력을 광주 시내에 투입하였다. 무고한 희생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 광주 시민들은 문 걸어 잠그고 다들 집에서 통곡, 5월 27일 새벽에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 같고 그대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그들과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서워서 집안의 이불 속에서 벌벌 떨었다고, 계엄군이 들어와도 다시 희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시민군이 나서서 맞서기는 너무나 어려웠던 절박한 현실,
⑭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장악한 후에도 무고한 희생은 계속, 이금제-한약방으로 출근하던 길에 총격사망, 김성근-우체국 근처에서 총격사망, 양동선 & 오세현-직장 근무 중 총격사망, 김명숙-당시 14세 계엄군의 검문이 두려워 도망치다 총격사망, 염행렬-당시 나이 16세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사망, 상황이 종료 되었는데 광주를 진압한 진압군들은 대단한 승리를 얻은 군인처럼 축하의 분위기에 휩쌓였다고, 계엄군이 시민군을 진압하고 난 다음에 민간인을 상대로 그 짓을 하고 이겼다고 생각해서 다들 모여서 힘차게 군가를 부르는 장면, 그 중에 한 계엄군이 그 노래를 부르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던 것, 5.18 민주화운동 진압 후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를 설치, 국보위는 신군부의 집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고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유신헌법에 따라서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결국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12.12 사태부터 약 6개월간 진행된 긴 쿠데타 과정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전두환이 폭력적으로 진압을 하면서 마무리가 된 상황, 전두환은 결국 그렇게 권력을 찬탈했다. 해외 취재기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미얀마 태국 중국의 소수민족들을 만나면 5.18 민주화운동 얘기를 한다고, 5.18은 아시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민주화 항쟁,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다고. 2011년 민주화 운동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는 5.18 정신에 대해서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한다.
⑮ 前아시아 월드 스트리트 저널기자 노먼 소프는 광주 도청에서 마지막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시신을 봤는데 눈이 반정도 감겨 있어서 반쯤 감긴 눈을 감겨주고 싶었다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희생당한 분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확한 진실을 파악하고 그걸 공식화 해 나가는 작업을 하면 그때 희생당한 분들의 눈을 편안하게 감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서양 역사학계에는 40년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한 사건이 40년 정도 지나면 좀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 수많은 파편적인 기억들이 검증이 되고 새로운 문서가 공개되고 발견이 되고 핵심증언자들이 정직한 진실을 말하고 이런 현상으로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말한다. 5.18민주항쟁은 40년을 좀 넘겼다. 이제야 말로 제대로 된 검증을 시작해야 될 때다. 5.18 민주화 운동의 본질은 정치군인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국민을 지켜야할 군대가 국민을 지키지 않고 국민을 죽인 사건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이 당시부터 그 권력자들의 의도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그 왜곡이 수많은 진상규명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불식되지 않았다. 5.18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이제 부터가 시작이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