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변화 / 최미숙
게으름을 피우느라 오후 세 시 넘어 나왔더니 산책로가 온통 햇빛 투성이다. 아직은 그늘이 좋다. 바람이 없는데도 잎들이 졌다. 잣 잎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었다. 하천 따라 무더기로 핀 억새와 갖가지 들꽃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을 실감한다.
주변을 세 바퀴 돌고 후문에 들어서니 초등학교 남학생 셋이 정자에 앉아 스마트 폰 게임에 빠져 있다. 아파트에서는 도통 노는 아이를 볼 수 없었는데 반가워 살며시 뒤로 가 들여다보았다. 기척을 느낀 아이 한 명이 눈짓으로 친구에게 신호를 보내자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아이들과 게임 이야기하다 “재미있게 해라!”고 말했더니 “고맙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의례적인 인사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다. 다들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건강했으면 하고 바랐다.
요즘 들어 정수(가명)가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한동안 잠잠해 다행이라 여겼는데 수년간 몸에 밴 생활이 어디 가겠는가. 학교 친구는 물론이고 이웃 학교 학생과도 붙어 학교로 전화가 오기도 했다. 점심 먹고 잠깐 쉬고 있는데, 5학년 아이가 급히 오더니 정수가 싸운다고 한다. 놀라서 나갔더니 화장실 앞에서 같은 반 친구와 말다툼하고 있었다. 몸싸움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순간 정수가 상대 아이가 들고 있는 청소용 밀걸레를 밟자 막대가 빠져 버린다. 아이가 막대를 위로 들자 때리려고 했다며 왼쪽 옷자락을 잡고 흔든다. 아이가 정수 손을 떼려 하자 주먹을 날린다. 순식간에 말리려는 아이까지 여러 명이 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날뛰는 아이를 두 손으로 힘껏 붙들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잡고 휘두를것 같았다. 1학기 말, 자신보다 훨씬 덩치 큰 친구에게 실내화를 벗어 얼굴을 내리치는 바람에 놀란 적이 있었다. 그만하라는 내 말이, 아이들 고함 소리에 묻혀버렸다. 둘이 엉겨 붙어 바닥에 뒹굴며 빙빙 도는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내가 그만 나자빠지고 말았다. 순간 그동안 조심했던 허리가 찌릿하다. 놀란 아이들이 옆으로 와 괜찮냐며 부축한다. 옆 반 남자 선생님이 떼어놓자 그제야 싸움을 그친다. 정수 눈 밑 몇 군데가 손톱자국으로 뽈긋했고, 귀 뒤쪽에도 길게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오후에 안 사실이지만 상대 아이는 가슴을 물렸다는데 상처가 꽤 깊다고 했다.
정수는 분이 안 풀렸는지 한참을 씩씩댔다. 남자 선생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친구 탓을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동안 아이가 처한 상황이 안타깝고 가여워 후배 교감에게 몇 번 도움을 청했다. 퇴직하고 나니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 내가 직접 나서기가 어려웠다. 사고만 일으키는 아이가 이쁘지는 않겠지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날 일로 그동안 다들 정수에게 왜 그렇게 냉담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는 그냥 넘어가도 되는 일도 기어이 시비 걸어 몸싸움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그러다 안되면 112에 신고했고, 담임도 아동 학대범으로 두 번이나 전화해 경찰이 오기도 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에이디에이치디(ADHD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판정을 받고부터 오랜 기간 문제 행동의 원인을 전적으로 병 탓으로만 돌려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정수를 교실로 데리고 왔다. 친구들과 함께 지내야 할 기간이 1년도 더 남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또 자신만 따돌린다고 핑계를 댄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동안은 정수의 폭력에 당하고만 있던 아이들이 이제는 참지 않고 같이 덤빈다. 친구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아이를 보면 짠하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먹을 휘두를 때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동안의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맥이 빠졌다.
다음 날, 담임을 만났다. 상대 아이가 진단서를 끊어 제출했고 학폭을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지금까지는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어쩌면 정수나 부모님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을 객관적으로 보며 문제를 정확히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가을 하늘이 맑다. 점심시간, 4층 교실에서 내려다본 운동장은 아이들 노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피구와 축구를 하고, 한쪽에선 고학년 여학생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사이로도 역시 화사한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생명을 다한 잎이 떨어진다. 각각의 낙엽도 살아온 흔적이 다르듯이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부디 따뜻한 변화가 있기를.
첫댓글 선생님의 마음을 학생들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변화를 바라는 선생님의 마음이 그 애들에게도 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르치는 일은 어려운 직업인가 봐요. 정수가 바르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정수가 두 분 선생님의 마음을 언제나 헤아릴까요?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