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패터슨처럼
김단혜
운동화 끈을 묶고 편한 옷을 걸치고 휴대폰도 두고 시집 한 권 챙겨 천천히 걷는다. 그동안 너무 빠르게 걸었다. 속도를 잃어버린 채 걷기도 뛰기도 아닌 부자연스러운 속도로 달렸다. 저녁 바람을 가르며 내 속도를 생각하며 힐 앤 토우 ~~. 발끝이 땅에 닿는 느낌이 좋다. 달근한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오래도록 사람 냄새, 신선한 공기,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해 살가움을 잊고 살았다. 낮은 담장을 넘어오는 꽃에 인사하며 익숙한 거리 눈도장을 찍으며 걷는다. 자주 가는 카페는 꽃찻집 주리울풍경이다. 그곳에는 꽃차를 만드는 여인이 있다. 오래 앓으면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그녀가 꽃차를 만지며 다시 건강해졌다고 한다. 여유가 있어서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차를 마시면 여유가 생긴다고 한다. 그녀가 매일 앉아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위시본체어에 앉는다. 마치 내 인체에 맞게 디자인한 의자처럼 몸이 편해진다. 오늘은 무슨 차를 마실까? 콜레스테롤을 낮춰준다는 천일홍차, 맨드라미꽃차, 유자별빛차, 수레국화차 ….그녀가 가져다줄 꽃차가 궁금하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 권하는 차라며 목련꽃차를 내린다. 꽃 한 송이가 우리 둘을 위로하고도 향기가 남는다. 꽃차 한잔했을 뿐인데 마음은 피어난다. 목련꽃처럼 환하게 웃어본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 <패터슨>의 배경은 미국의 뉴저지주 소도시 패터슨이다. 감독 짐 자무시는 시인을 꿈꾸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해 시인이 살았던 패터슨을 여행하며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영화는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보여준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하루하루가 마치 시의 한 연처럼 연결되어 있다.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서 패터슨은 예리하고 미세한 순간을 포착하는 섬세한 능력이 있다. 매일 보는 풍경을 마치 처음 본 풍경처럼 마음에 담고 승객의 말에 귀 기울인다. 스탠리 런치박스를 들고 동네를 걷는 출근길 패터슨의 일상은 단조롭고 사소하다. 폭포가 있는 공원에서 쏟아 내리는 물줄기를 보며 아내가 준비한 도시락을 먹는다. 동네를 걸어 건물과 건물 사이 언뜻 보이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이 전부다. 애완견 마빈과 저녁 산책을 즐긴다. 산책길에 들르는 닥이 운영하는 바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이 영화의 백미다.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낸다. 맥주 한 잔을 놓고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시를 쓴다. 소확행,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실천한다.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속도를 유지하는 일상이 담담히 담긴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다. 일상이 기록되는 비밀 노트, 오늘 본 장면이 시로 태어나고 어제와 연결되어있다. 시를 쓰는 지하실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책이 나오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패터슨의 무표정한 모습만큼이나 담담한 무채색의 일상엔 시적인 리듬이 있다. 삶의 구석구석에 들여놓은 시 같은 일상의 여백을 느낄 수 있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건 아내, 로라가 한 수 위다. 로라의 일주일은 도, 미, 솔~처럼 매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꿈꾸는 여자 로라는 자신만의 색과 끼가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다. 블랙과 화이트의 패턴을 좋아해 집안은 행위예술가가 치르는 퍼포먼스 무대다. 칠하고, 자르고, 만들고, 꾸미고 심지어 남편의 도시락에도 후식인 귤에도 애완견의 목줄까지도 블랙과 화이트로 그림을 그려 넣는 행복을 아는 여자다. 팻시 클라인 같은 컨트리 가수를 꿈꾸며 할레퀸 기타를 친다. 케이크 가게를 여는 꿈을 꾸며 컵 케익을 굽는다. 좋아하는 일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여자다. 남편에게 시를 읽어 달라고 하며 시 쓰는 남편을 응원한다. 무엇보다 옆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면서 자신의 행복도 양보하지 않는다. 패터슨 부부는 오랜만에 외출해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돌아온 토요일 밤, 애완견 마빈이 대형사고를 친다. 패터슨의 시작 노트인 비밀 노트가 갈기갈기 찢긴 것이다. 산책길에서 만난 일본 시인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좋아해 시인이 살았던 도시 패터슨에 여행 온 것이다. 패터슨이 만난 여행자는 어쩌면 감독 짐 자무쉬 같고 패터슨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며 빈 노트를 전해준다.
<패터슨>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텅 빈 노트를 펴고 꾹꾹 눌러 쓴다.
오늘은 패터슨처럼 ….
[김단혜 프로필]
『한국작가』 2010년 수필등단. 시집『괜찮아요,당신』 책리뷰집『들여다본다는 것에 대하여』. 수필집『빨간 사과를 베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