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서평은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서 가져왔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말살 정책(집단 학살, 강제 이주), 20세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수 백인 정권이 1990년대 초까지 다수 흑인 주민들을 상대로 펼쳤던 인종 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 21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음울한 실화들은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21세기의 중동 땅에서 식민지를 두고 잔혹행위를 일삼는 국가가 있다.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국가가 중동 지도상에 나타난 것을 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어로 '나크바(Al-Nakba, 대재앙)'라 일컫는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영토를 4배나 넓혔고, 21세기의 문턱을 넘긴지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다.
'전쟁이 아닌 일방 학살'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투쟁 의지를 분쇄하기 위해, 특히 강경 투쟁을 외치는 정치군사조직인 하마스 세력을 누른다는 명분 아래 걸핏하면 군사 작전으로 숱한 사람들을 죽여 왔다. 지난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월에 걸쳐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해 들어갔을 때도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366명이었다. 이스라엘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국제 사회로부터 비판받는 데엔 사망자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들이 많았다는 점이 작용했다(어린이 430명, 여성 1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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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이젤딘 아부엘아이시 지음, 이한중 옮김, 낮은산 펴냄). ⓒ낮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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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망자는 15명에 그쳤다. '전쟁이 아닌 일방 학살'이라고 비판받는 근거이다. 이스라엘 군은 탱크, 전폭기, 아파치 헬기, 불도저로 주택과 공장들을 무너뜨렸고, 거대한 콘크리트 부스러기들의 무덤이 생겨났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공군은 가자 상공에 3000여 차례 출격하여 1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스라엘 육군의 마구잡이 탱크 포격이 엄청난 피해를 입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바로 그 무렵 이집트 라파 검문소를 통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들어가 보니, 거대한 파괴 현장이 따로 없었다.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과 동물의 시신들이 뿜어내는 악취였다. 학살과 파괴의 흔적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곳 가자 지구 주민들로부터 조금씩 다르면서도 하나같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병사들은 사람 죽이고 집 부수는 일을 즐겼던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슬며시 들었다. 가자 지구 곳곳에서 저질러진 이스라엘 군의 파괴 행위가 도를 넘어서 인간성을 포기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현장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억압과 학살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중이다. 바로 5개월 전인 2012년 11월에는 단 8일 동안에 162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마구잡이 포격과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민간인들이었고 그 가운데 적어도 37명이 어린이, 13명이 여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굳이 1949년 제네바협약을 비롯한 국제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전쟁에서 민간인들을 죽이고 다치도록 하는 것은 전쟁 범죄다.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는다?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어디선가 쏜 총탄이 당신의 집안으로 날아 들어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치자. 그럴 경우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까. 처음엔 놀라움과 슬픔으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곧 정신을 차리면서 도대체 누가 총을 쏘았는지를 밝혀내려 들것이다.
딸의 죽음에 책임 져야 할 인간(들)을 찾아냈다면? 그(들)를 향해 죽일 듯 덤벼들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우리 인간이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었을 때 앙갚음을 떠올리는 것은 조건반사적 행위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적인 응징으로 앙갚음을 하지 않더라도 공권력(법률)의 힘을 빌려 가해자를 처벌하려 들것이다.
총탄보다 더 살상력이 큰 포탄이 집안으로 날아들어 한꺼번에 사랑하는 딸 셋을 잃은 사람이 있다. 그런 그가 딸을 죽인 자에 대한 처벌(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가해자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딸들의 죽음을 운명으로 여기고 덮으려 한다면? 그런 얘기를 듣는 당신은 피해자가 딸을 잃은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었다고 믿기 십상이다.
딸 셋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증오는 병"2009년 1월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인 하마스의 세력을 꺾기 위해 한 달 가까이 가자 지구를 맹폭하면서 무려 1370명의 사망자를 낳은 바 있다. 신간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이한중 옮김, 낮은산 펴냄)는 바로 그 때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3명의 친딸과 1명의 조카딸을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이젤딘 아부엘아이시가 쓴 책이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공중보건대학원 교수로 재임 중인 저자는 4년 전 그날의 참극을 다음처럼 전한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 엄청난 소리, 그 강렬한 섬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돌연 진공 상태라도 된 듯 숨이 막혔다. 분진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나는 폭발이 딸아이들 침실에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실 문 앞에 이르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침실 가구, 책, 인형, 운동화, 나무 조각 등이 내 딸들과 조카의 조각난 몸뚱이들과 함께 쌓여 있었다. 마야르는 목이 달아난 채 몸만 쓰러져 있었다. 천장에는 터져 버린 뇌의 조각들이 붙어 있고, 아이들 손발은 누가 급히 떠나느라 두고 간 장갑이나 신발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216~217쪽)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랑하는 딸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도, 로봇이 아닌 36도 5부의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람인지라 슬픔 속에 강렬한 분노와 증오를 느꼈다. 그는 절규한다.
"그들의 몸이 말 그대로 찢기고 목이 달아나는 모습을 당신이 보았다면, 그 어린 생명들이 일순간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63~264쪽)저자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 그의 딸들이 죽임을 당한지 여러 날 동안 그가 만난 사람 대부분은 복수를 말하거나 암시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증오와 분노를 삭이고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증오는 병이며 평화를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맹세한다. 가해자를 용서하겠다고. 그가 믿는 이슬람 종교의 가르침에 바탕해서다.
"응징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이스라엘인에게 보복한들 내 딸들이 살아날까? 증오는 병이다. 증오라는 병은 치유와 평화를 가로막는다." (230쪽)
"나는 신앙인의 눈으로 사태를 보려 했다. 하느님이 딸들을 내게 맡기셨다가 이제 찾아가신 것이라고." (232쪽)
"나는 신앙의 힘으로 맹세할 수 있었다. 증오하지 않겠다고. 분노하지 않겠노라고. 고통을 잘 인내하고, 인간이 지어낸 불의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을 용서하라는 것이 코란의 가르침이다." (264쪽)
"증오는 평화를 가로막는다"<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를 읽으면서 솔직히 내내 갈등을 느꼈다.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니? 모든 이가 우러러 볼 성인이 하신 말씀이라면 모를까, 저자의 말은 위선이 아닐까. 한편으로 그의 진정성이 미심쩍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팔레스타인 의사로서는 드물게 이스라엘 병원에서 근무한 전력이 있고,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전공의 과정을 밟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기에 딸들의 죽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어차피 그의 딸들은 죽었다. 그의 말대로 증오한다고, 복수를 외친다고 딸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책을 잡고 끝까지 읽어보는 인내심을 보인 독자라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을 낳고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에 '증오를 버렸다'는 저자의 평화주의 논리에 공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너무나 소중한 딸들과 조카를 잃었다. 중동 지역의 고질병과도 같은 보복을 한다 해도 그들이 살아 돌아올 리는 없다. 복수와 증오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지혜를 쫓아 버리고, 슬픔을 키우며, 갈등을 연장한다. 영혼을 말라 죽게 만드는 참극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다면, 60년 동안 우리를 갈라놓은 위태로운 분단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241쪽)
"내 딸들이 마지막 희생자이길…"저자는 가자 지구 난민촌의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을 일상적으로 보고 들어왔다. 그런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저자는 "증오는 우리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독약과도 같다"고 여긴다. 증오를 버리고 그의 딸들의 죽음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로 가는 길에 '마지막 희생'이 되길 바란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유대인(이스라엘)과 아랍인(팔레스타인)이 서로에 대한 증오를 거두고 진심으로 대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중동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주장한다.
"오슬로협정(1993년)이 체결되고서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평화 회담은 결렬되었다가 재개되고 다시 결렬되기를 거듭했다. 그것도 몇 국경 지역의 몇몇 제곱미터를 양보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말이다. 몇 제곱미터나 어느 산꼭대기나 골짜기를 양보한다고 해서 중동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양쪽 모두 그런 외부적인 변화보다는 내면에서부터 비롯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중이며, 증오를 거부하는 내면의 힘이다. 그러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의 딸들은 이 지역에서 누군가가 치러야 할 마지막 희생이 될 것이다." (261쪽)저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서로에 대한 존중을 통해 분단의 벽이 아니라 평화의 다리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직업인 의사답게 그는 환자의 치료에 빗대어 중동 평화의 해법을 제시한다.
"의사인 나는 환자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자꾸 나빠지면 다른 치료 방식을 찾아보려고 궁리해 보게 된다. 평화로 가는 이 길에서, 우리가 과거에 실패했던 원인을 찾아보고 우리가 왜 불행과 불만과 불안에 시달리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원인은 우리 안에 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증오는 고질병인 만큼 스스로 고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265쪽)
"생존권 인정이 먼저다"<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는 전 세계 다섯 대륙에 20개의 언어로 번역됐다(원서 <I Shall Not Hate>의 초판은 2010년 발간). 중동 현지의 피지배자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반응이 어떨까 궁금해진다. 아마도 온건파인 파타 정파를 지지하는 사람이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강경파인 하마스 정파를 지지하는 사람이면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마스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 책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면, 토론장의 분위기는 비판 일색이기 십상이다. 팔레스타인의 생존권을 박탈해온 이스라엘의 강압 통치가 지닌 폭력성, 일방성, 잔혹성을 잠시 잊었거나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끝에 '서로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 마련이다. "(세 딸을 잃고도 증오를 버렸다는) 당신은 이스라엘의 파시즘적 국가 테러가 지닌 잔혹성을 잊었느냐"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중동 현지 취재 때 가자 지구에서 만났던 하마스 대변인 파우지 바르훔의 주장을 곱씹어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이란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전쟁 범죄를 일삼고 있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이 먼저 팔레스타인의 삶의 권리, 생존권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우리 땅에서 물러나라고 점령자에게 요구하며 저항하는 것이 잘못인가?"
중동 평화의 조건은?위와 같은 하마스 쪽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와 아울러 증오를 버리고 서로를 존중해야 평화가 온다는 저자의 주장도 원론적으로 옳다. "증오는 병이다. 증오라는 병은 치유와 평화를 가로막는다"면서 전쟁과 폭력을 멀리하려는 평화주의에 이러니저러니 토를 달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저자는 세 딸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아픔을 딛고 중동의 분단에 다리를 놓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는 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양쪽 모두 증오를 버리고 평화를 이루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전망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른다.
첫째, 이스라엘에 평화협상을 중시하는 온건 정권이 들어서고
둘째, 팔레스타인에 대화를 중시하면서도 대표성을 지닌 온건 정권이 들어서고,
셋째, 미국 워싱턴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특히 이스라엘이 문제다. 지금의 이스라엘 정치 지형처럼 ('두 개의 국가 해법'을 제시한 1993년의 오슬로평화협정을 휴지처럼 여기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우두머리로 한) 보수강경 우파와 극단적인 유대 종교 정당들이 손을 잡고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를 지배하는 상황 아래서는 어떤 형식의 대화나 평화회담도 공허하고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런 조건들이 다함께 갖춰지는 날이 오기까지 중동 땅을 붉게 적셔온 피는 그 흐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이젤딘 아부엘아이시가 2013년 5월 한국을 방문합니다.
5월 21일 오후에 한신대학교, 22일 저녁에는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이 책을 중심으로 중동 평화에 관련된 대담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
첫댓글 그는 신앙의 힘으로 분노와 복수심, 증오를 이기겠다고 합니다... 그의 신앙은 이슬람이고, 그의 경전은 꾸란입니다.
우리 대담의 주제는 "서남아시아의 분쟁과 종교 그리고 평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