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명한 유리를 좋아한다. 여유로운 시간 거실에 누워 커다란 유리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행복해진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판 너머 봄 하늘을 바라보면 까닭 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뭉게구름 피어나는 파란 하늘에 제비 한 쌍이 창공을 가르는 여름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가을 하늘에 마음을 헹구어 내는 일이나 함박눈이 나비 되어 온 하늘 가득 날아 내리는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아쉽도록 쉽게 가버리는 초승달을 바라보다 놓쳐 버리는 일이나 보름달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려 보는 일도 나는 좋아한다.
아파트에 살고부터 나의 하늘이 한결 넓어졌다. 햇볕도 잘 들고 시야가 확 트여 실내에 앉아서도 밖을 환히 내다 볼 수 있게 된 것은 투명한 유리의 덕분이다.
유리는 이미 오천년전 이집트에서 사용했으며 우리나라도 낙랑시대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모래에서 얻어지는 규사나 석염에다 석회석, 탄산나트륨 등을 섞어 가열하여 엿처럼 녹인 다음 급랭시켜 유리를 만드는데 원료와 약품배합에 따라 판유리, 광학용 유리, 색유리 등이 되어 이용되며 일명 초자(硝子)라고도 한다.
지금이야 유리가 흔해져서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애용될 뿐 아니라 뛰어난 예술품으로 창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어리 때만 해도 유리는 무척 귀했다.
창호문 한가운데 화투 장만한 유리를 문살 한 칸에 붙여 놓고 밖의 상황을 살피던 때가 있었다. 인기척이 나면 우선 그 유리를 통하여 밖의 분위기를 파악했고 아버지의 귀가 시간이 늦을 때면 식구들이 번갈아 그 유리에 한 쪽 눈을 대고 밤늦도록 기다리곤 했다. 그 조그만 유리 조각이 안과 밖의 중재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창호문의 은은하고 품위 있는 흰빛이나 부드러운 질감은 우리 정서에 맞고 공기의 소통도 잘 되어 몸에 좋다고 하지만 때 맞춰 창호지를 바르는 일이 번거롭고 잘 찢어지는 단점이 없지 않다. 그러니 창호문 대신 유리문이 등장하고는 생활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며 간유리를 만들어 가릴 것은 가릴 수도 있게 했으니 주거 문화의 일대 개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수채화 한 폭 같은 산뜻한 장면이 있다. 소꿉놀이 그릇 속에 안경알 만한 유리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유리 칼로 정교하게 도려 낸 동그라미 모양이 아니고 둘레가 이 빠진 것처럼 들쭉날쭉 했다. 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다가 동글납작한 돌 위에 놓고 다른 또 하나의 돌로 자근자근 두드려 조금씩 깨어내고 원(圓)모양에 가깝도록 둥글린 것이다. 유리는 어느 만큼 긁힌 자국이 있어 입김을 호호 불어 치맛자락에 문질러 보아도 말끔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건 내게 무척 소중한 물건이었다. 가끔 그것을 눈에 대고 하늘을 보거나 해를 바라보면 참 신기해 보였지만 정작 신비한 놀이는 따로 있었다.
서쪽 하늘에 비단 폭을 펼친 듯 노을 빛이 곱고 장독대 옆에 분꽃이 활짝 필 무렵 앞마당 한 귀퉁이를 간장 종지만큼 호비호비 파내고는 흙을 다독거려 봉숭아 꽃잎이며 분꽃, 한련들을 한 송이씩 따다가 그 구덩이에 색깔을 맞춰 배치한다. 그리고 그 유리를 빠지지 않게 얹고는 고운 흙을 밀어낸다. 그러면 동그란 유리를 통하여 보이는 꽃잎들이 어쩌면 그렇게 곱고 선명하던지.
그 놀이는 내가 연출한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신비감에 빠져드는 마력이 있었다. 꽃잎을 바꾸어 넣어 보기도 하고 유리면을 아주 작게 내 놓고 한 쪽 눈을 대고 보기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서산을 넘고서야 그 비밀스런 나의 마술놀이 장소를 아무도 모르도록 흙을 꼭꼭 덮어놓고 들어가면서도 누군가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누가 망가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그 곳을 찾아가 보면 꽃들은 금방 화장이라고 한 듯 싱싱하게 웃고 있었다. 떡갈나무 숲속에 아무도 모르는 샘물을 나 혼자 마시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심정으로 유리에 흙을 덮고 학교로 가는 기분은 혼자만의 숨겨진 기쁨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였던가. 예쁜 여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네모의 유리 조각 석 장을 맞춰 삼각 기둥을 만들고 그 끝에 삼각형의 유리를 막아 만든 만화경을 처음 들여다보았을 때의 그 놀라움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썰은 색종이 조각을 넣고 빙빙 돌리기만 하면 화려한 꼿이 피고 나비가 되며 희한한 추상적 무늬를 연출해 내던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유리는 또 한번 내게 신통력을 보여준 신기한 존재였다.
중학교 때 심부름 갔던 친척집 안방 윗목에 놓인 농의 아주 작은 서랍을 살짝 빼어 보았을 때 놀랍도록 눈부시던 부로찌가 있었다. 작은 유리 조각들을 벌집처럼 붙여 만든 것인데 뒤쪽의 핀이 떨어져 나가 못쓰게 된 것이었다. 그 빛의 현란함이 이루 표현 할 수 없이 아름다워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듯 싶었다. 그 자리에 오로 넣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놓질 못했다. 주머니 속에 살짝 감춘 못 쓰는 물건을 오래도록 내 비밀스런 장소에 숨겨 놓고 몰래 꺼내 보고는 했었다. 죄의식이 내 마음에 상흔으로 남았을 것이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나는 투명한 유리에 남다른 애착을 갖는다.
나는 유리컵, 유리병, 유리 접시, 유리 수픈, 유리구슬, 유리로 된 장식품에 관심이 많다. 유리 접시만 써서 음식상 차리기를 좋아하고 사계절 유리그릇을 애용한다. 그 맑고 투명함이 좋고 때로는 빛의 요술을 부리는 신비스러움이 좋다.
나는 사람도 유리 같은 사람이 좋다. 속이 말갛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숨김없이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대개 이슬처럼 순수하다. 그리고 이지적이며 맺고 끓음이 분명하고 칼칼하다. 그러나 유리는 너무 꼭 쥐어도 깨지고 너무 느슨하게 쥐어도 깨진다던가. 그것처럼 사람도 너무 가까이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기 쉽고 또 너무 멀리하면 그만큼 정이 붙지 않는다.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 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유리의 속성이요 인간의 속성이 아닐까.
나는 글쓰는 이 중에 유리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 그와 대화를 많이 나누어 본 것도 아닝요 특별한 인연으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흠모하다가 세미나나 행사 때면 인사 정도를 나눌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은 열심히 읽는다. 유리를 좋아하는 만치 그의 글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글을 읽고 난 훗맛은 청정수를 마신 것 만큼이나 신선하고 담백하며 파란 호수를 바라보는 듯 하다.
유리의 투명함처럼 번뜩이는 지성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썰미는 놀랍도록 명쾌하다. 유리가 빛을 받으면 갖가지의 화려한 변신을 하듯 그의 글은 때로는 신비한 환상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그 사람의 글은 유리처럼 맑으면서도 달빛처럼 은은하고 때로는 아침 이슬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 듯이 한없이 맑고 밝고 신선하다.
글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듯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 사람됨이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기 때문일 것이다.
맑교 투명한 유리를 보는 것도 좋지만 유리 같은 사람을 대하는 것은 더욱 좋다.
세상이 유리처럼 맑고 투명 할 수 없을까.
독락당(獨樂堂)
이사를 하고 나서 김여사가 그림 한 점을 들고 왔다.
4호 크기의 한국화인데 화법이 지극히 절제된 그림이다. 원래 생략되고 여백이 많은 것이 한국화의 특징이라 하지만 이 그림은 단순한 선으로만 처리되어 그림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가 한층 고졸(古拙)하다.
화선지의 한 가운데 묵색으로 그린 새 한 마리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서 있고 새의 뒤쪽으로부터 휘어진 나뭇가지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새의 머리 위를 지나 발 앞에 머물렀다. 나뭇가지 중간쯤에 곁가지를 치고 그 끝에 수수꽃다리를 닮은 붉은 꽃 한 떨기가 피어 있으며 새는 그 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 '獨樂堂'이란 세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이 이 그림의 전부다.
우선 크지 않고 소박한 한국화인 것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내가 좋아하는 개를 그린 것도 마음에 들었다. '獨樂堂'이라. 어딘가 낯익은 듯한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한다면 혼자서 즐기는 집이 아니가. 그러나 내 짧은 식견으로는 쉽게 그림을 읽어 낼 수 가 없었다.
김여사는 자기가 무척 좋아하는 그림이며 어느 무명 화가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것을 나에게 주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묵혀 두느니 주고 싶은 이에게 주어 그 그림이 어딘가에 걸리고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기쁘지 않겠느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림을 받아 놓고 좀 부담스러웠다. 그림을 그린 이는 나와는 일면식도 없을 뿐 아니라 김여사에게 준 그림이 엉뚱하게 나에게 와 있다면 그 화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그림을 놓고 한동안 망설이던 끝에 표구를 해 놓고 보니 그림은 훨씬 더 좋아 보였다.
그 그림은 내 글방에 거는 것이 제격일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김여사와의 인연도 인연이려니와 내 집에서 혼자 즐거워 할 곳이 내 글방밖에 더 있겠는가.
오래 전부터 나 혼자만의 공간을 꿈꾸어 왔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서 생각을 키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오붓한 공간을 말이다. 그러나 그런 여건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저에 살던 집들은 모두 방 세 칸을 넘지 못했다. 안방은 우리 내외가 쓰고 아이들 둘이 한 칸 씩 차지하고 나면 나만의 공간이란 마음으로만 그리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평수는 크지 않지만 방이 네 개여서 다행이었다. 집안의 책들이 한 방으로 모였다. 내가 가진 책이라야 귀한 책도 비싼 책도 없지만 삼십 여 년을 모아 온 책들이다. 3면에 책들을 둘러 꽂고 책상을 들여놓으니 그런대로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서재라는 묵직하고 품위 있는 말을 쓰기에는 너무 초라하여 '책방'이라고 해 보았더니 '書店'을 말하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글방'이라고 해보니 얼마나 글을 쓴다고 글방 운운한다는 것이 쑥스러워 그것도 마땅치 않으니 '책방'이랬다 '글방'이랬다 오락가락 하곤 한다.
어쨌던지 그 그림을 책상 앞에 걸어 두고 바라 볼 때마다 화가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는 왜 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새를 그렸으며, 또 이 새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이 어떤 것이기에 혼자서 즐거울 수 있는 것인가. 휘어진 나뭇가지는 무엇을 의미하며 꽃 한 다발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린 이의 의도를 물어 볼 수 있다면 쉽게 내 의문이 풀리고 그 그림을 제대로 소화하고 음미하며 즐긴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얼마 후 김여사가 우리 집에 들렀기에 걸린 그림을 같이 보며 그림이 내 방에 걸린데 대한 양해도 구할 겸 화가를 만나 볼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좋아라며 그 집을 한 번 방문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화가의 사람됨에 무척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래저래 화가에 대한 호기심마저 더해져서 화가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부추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그 무렵 화가는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갔다지 않은가. 화가를 만나는 일은 시지부지 되고 말았다.
글방 책상에 앉기만 하면 그 그림의 새와 내 눈이 마주치게 된다. 어느 날 나는 그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인공인 새의 모습이 꼭 나를 닮아 있지 않은가. 나는 몸에 살집이 있는 편으로 가슴이 좀 부르고 몸집에 비하여 머리가 작은 편인데 그 새 역시 살집이 있는 데다 가슴이 불룩하고 머리가 작은 편이었다. 몸매가 볼수록 나를 닮아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한 떨기 꽃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새가 마치 풀리지 않는 글 한 편을 놓고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 나와 그럴 듯 하게 닮아 있다.
나는 혼자 있기를 즐긴다기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싫지 않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묘한 행복감을 느낄 때가 많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런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아닐까. 글을 쓰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 음악을 듣는 일, 그리고 어려운 일의 매듭을 푸는 일이나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일도 철저히 혼자일 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부터 나는 새와 나를 동일시하여 거울 앞에 서듯 그 새를 통하여 나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그 그림이 내방에 걸린 것이 우연만은 아닌 어떤 연(緣)이 닿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 이 그림은 걸려야 할 곳에 걸린 거라고 그럴듯한 구실로 화가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적당히 희석되어 갔다.
獨樂堂은 알고 보니 조선 시대 학자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이 경주의 옥산서원에 지은 서당 이름이란다. 정면 40칸 40척 측면 2칸 16척의 팔작(八作)지붕 단층 건물로 보물4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도 잘 보존되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獨樂堂의 후원에도 晦齋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심었다는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단다.
獨樂堂을 찾아간 시인 박인로(朴仁老)가 선생을 사모하는 간절한 심정과 그곳의 경치를 읊은 獨樂堂이라는 가사(歌詞)도 있다지만 대한 일이 없으니 알지 못 한다. 숲에 둘러싸이고 기와 담장을 둘러 쳤다는 그 서당에서 晦齋선생은 무엇이 그토록 즐거웠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세상사 모두 잊고 학문에만 몰두하며 살았을 고고한 선비의 모습이 그림 속 새의 모습에 겹쳐진다.
그림을 걸은지 일년도 넘어서야 그 화가와 김여사와 내가 조촐한 한식집에 마주 앉았다. 화가는 첫인상이 단아하고 정갈한 선비형으로 눈빛이 아주 맑았다. 언뜻 '식물성'이란 말을 떠 올렸다. 얼른 보면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데 마흔 여덟이란다. 그도 이제 중년으로 인생을 달관할 나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대하기가 편했다. 말수가 적었지만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주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그림을 사사한 적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운 적은 없어요. 그저 종이 펴놓고 먹 갈아서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립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그리기 때문에 누구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욕심 같은 건 전혀 없이 초월한 듯 그야말로 혼자서 그리는 일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獨樂堂을 그린 의도를 묻자 그는 아주 간단 명료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보잘것없는 나뭇가지 밑에서만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면 누가 뭐라던 그곳이 가장 좋은 내 집이요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겠느냔다.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더 캐묻지 않았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며 나를 잃어버리고 살기가 십상인데 누가 뭐라던 자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인픔이 돋보인다.
나도 내 글방에 獨樂堂이라는 이름을 걸고 새의 모습처럼 유유자적하며 즐기면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