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에서 평양만두 먹고, 고구려 대장간 구경해볼까
작년 여름은 지독한 장마로 인하여 취재를 다닐 때마다 진흙에 빠져 운동화가 성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뜨거운 폭염으로 인해 떠나는 나의 발걸음을 망설이게 만든다. 경기도의 도시 탐방도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고, 경기별곡 1권 출판도 한달 앞으로 다가온 만큼 신발끈을 다시 한번 고쳐 매고 남은 여정도 즐겁게 떠나보기로 하자.
이번에 탐방할 도시는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도시지만 그 존재감이 크질 않아 좀처럼 발길이 쉽게 가지 않는 구리라는 동네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는 남양주 사이에서 조그맣게 끼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역사적인 명소가 없는 편은 아니다.
우선 구리의 면적을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현재 총 8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리시의 면적은 33.33㎢으로 시와 군으로 이루어진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이며 심지어 서울시의 강남, 송파, 노원구보다도 작다. 택시를 타고 구리시의 번화가인 돌다리에서 가장 먼 지역으로 이동해도 1만 원이 넘지 않는다고 하니 거의 도시가 아니라 동네로 느껴질 정도다.
크기는 작지만 최근까지 도시의 중요성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배후에 자리한 인구 70만의 남양주시는 도시의 중심지가 별내, 오남, 금곡, 평내 호평 등으로 각기 분리되어 있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거나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려면 비교적 가까운 구리에 가서 해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구리의 상권은 도시의 규모보다 꽤 번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양주의 다산신도시가 점차 남양주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이마저도 머지않아 옛말이 될지도 모른다. 구리라는 도시에 우리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우선 구리라는 지명에 얽힌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여행을 함께 떠나보도록 하자. 우선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 보면 구리라는 명칭의 어원이 된 구지와 망우리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통합되어 구리면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처음에 양주군에 속해있었던 구리면 일대는 해방 후 서울시의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구리면에서 옛 망우리면 지역은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현재의 중랑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남은 구리면 지역은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 구리읍이 되었으며, 1986년 구리시로 승격되며 현재에 이르렀다.
이처럼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가진 역사가 길지 않은 구리시지만 굵직한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구리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 강동구와 마주 보고 있다. 서쪽에는 아차산이 서울과의 경계를 가르며 그 능선을 용마산 불암산 수락산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다.
우리에겐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아차산, 높이는 295m로 높지 않은 무난한 동네 뒷산과 다를 바 없지만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점으로 인하여 여기를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끊임없는 다툼을 펼치곤 했다. 이 흔적들은 아차산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 유적들의 존재로 증명되었다.
특히 이 산의 능선에서 남한에서 몇 안되는 귀중한 고구려 유적인 고구려 보루 및 산성들을 살필 수 있다. 도시 자체의 정체성이 부족했던 구리시는 고구려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창이었고, 그것에 대한 반발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고구려를 소재로 한 드라마인 <주몽>이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이러한 열기에 힘입어 구리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먼저 구리경찰서 앞 삼거리로 가보면 광개토태왕광장이 있고, 거기엔 광개토대왕의 동상과 실물 크기의 광개토태왕비가 들어서 있다. 처음엔 고구려 유적이 일부 있다고 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사실 구리시에는 고구려 유적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 최대의 분묘군인 동구릉이 현존하고 있다. 한때의 일시적인 트렌드로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그래도 이왕 구리에 왔으니 고구려를 테마로 잡고 그 여정의 첫발을 내디디려고 한다. 강변북로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달리다가 광나루에서 빠져나오면 이윽고 워커힐 호텔을 지나가게 된다. 거기가 바로 서울과 구리의 경계라 할 수 있다. 그곳을 지나면 아차산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게 되고 유턴을 통해 구리가 자랑하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로 곧장 들어가게 된다.
잠깐 그전에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지나칠 수 없는 맛집이 있다. 평양식 만두로 유명한 묘향만두라는 가게가 초입에 자리 잡고 있기에 식사를 든든히 하고 나서 답사를 이어가기로 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오전 11시라 본격적인 식사 시간 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가게의 대부분이 손님으로 가득 찼을 정도로 꽤나 인기였던 집이다. 겨우 자리를 잡고 이 집의 명물인 손만두국과 묘향뚝배기를 시켜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메뉴가 나왔고, 그 맛이 궁금해 허겁지겁 국물을 떠먹어 보았다.
과연 만둣국은 잘 고아진 사골국을 먹는 듯했고, 평양식 만두답게 피는 두껍고 속은 꽉 차 있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평양냉면으로 대표되는 이북음식은 나 같은 영남 출신 사람들에게 싱겁고 밍밍한 느낌이 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매력이 있다. 이 식당도 그런 매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을까 생각한다.
식사를 마친 후, 아차산 계곡을 따라 조금 들어가다 보면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날머리와 함께 이색적인 건물이 있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 나온다. 이미 주차장은 아차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객들로 인해 만차였지만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였다.
2008년 개장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장으로 쓰일 때만 해도 방문객이 많아 상당히 붐볐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고 고구려 마을의 입장료도 없어졌지만 인적은 드물어 보인다. 입구로 가면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 위주로 전시되었는데 부담 없이 가볍게 돌아 볼 만하다.
이제 외향도 독특한 고구려 대장간 마을로 입장한다. 고구려 당시를 알려주는 실증적인 자료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상상을 기반으로 지어졌다. 덕분에 게임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어키는 듯하다. 거물촌, 연호개체, 담덕채 등 우리가 흔히 보는 기와집의 형태가 아니라서 신선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우려와 달리 꾸준한 관리가 이어지는 듯했다.
특히 대장간 마을의 하이라이트는 마치 불가마와 같은 대장간이다. 불을 피우는 가마와 무기, 갑옷 등을 충실하게 재현해 놓았다. 태왕사신기 또는 이곳에서 촬영된 드라마 등을 보신 분이라면 나름 감동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긴 시간 있던 게 아닌데도 온몸이 땀으로 한가득이다. 차에서 땀을 식히며 다음 장소로 이동해 본다.
운민 역사기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