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농민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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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농민신문의 당선작을 만나보겠습니다. 올해 농민신문의 당선자는 양정순 시인입니다.
양점순 시인은 1958년 전남 함평 출생입니다.
심사는 곽재구와 안도현 시인께서 하셨네요.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이렇게 평을 했습니다.
당선작으로 고른 ‘모란 경전’은 첫 행부터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한 폭의 따스한 풍속화를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말과 생각을 버무리는 솜씨는 안정돼 있고 과하게 감정을 노출하지도 않는다. 최대한 전통적인 서정에 가까워지려는 이러한 노력이 요즘 시단에서 보기 드문 것이어서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 대부분이 과거에 기반을 둔 서정이라는 점은 조금 우려스럽다. 능숙한 문장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알고 좋은 시인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농민신문 신춘문예임을 의식한 듯 전통 서정의 무게에 중심을 실은 심사평이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당선작을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시는 구조적으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을 교차시키면서 자연과 인간의 삶을 연결짓고 깊은 감정과 사유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고요와 침착의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차분한 서사를 이어가고 있죠.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삶 그리고 죽음의 순환을 그려냅니다.
이 시의 주요 테마는 나비와 꽃입니다. 나비는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고 모란꽃은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상징합니다.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는 시의 첫문장은 마치 비문을 새기는 것처럼 묘사되어 삶의 기록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사랑채 여인의 웃음소리, 할머니 무릎를 베고 누운 아이 할아버지가 그린 니비 등 가족과의 따뜻한 순간들은 모란꽃과 함께 피어나는 웃음소리로 변합니다.
꽃잎을 불어 날리는 아이의 모습은 부음을 전하는 장면과 연결되며 도화의 죽음과 사라짐도 함께 언급되는데
이는 죽음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농민신문 당선작 양점순의 '모란 경전'에서 우리가 시창작 관련해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감각적인 묘사를 통한 이미지와 상징의 활발한 사용을 들 수 있겠습니다. 나비, 모란꽃, 붉은 꽃잎 등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모란꽃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고, 나비는 자유와 영혼을 상징합니다.
첫 연에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그리고 셋째 연에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시 중간에 나오는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는 구절.
그리고 끝부분에 "죽음을 이해하는 일/떨어진 꽃잎 한 장이/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이미지 구사와 상징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시의 주제에 깊이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시각,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시의 장면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이 시는 전통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리듬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같은 반복적인 구절은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게 하죠.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같은 구절은 음성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고,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럼 날아오는 나비 한마리" 같은 구절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주며 리듬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기여합니다.
이 시는 전통적인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편의 풍경화를 그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는 가족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가 되는데, 모란꽃을 통해 삶과 죽음, 가족의 사랑과 기억을 담아냅니다. 모란꽃은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상징하는데, 나비와 모란꽃을 통해 죽음과 이별의 슬픔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죠.
모란꽃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영남의 노래 '모란 동백'과 연결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