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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논어 자한편
세한도: 18세기 /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 23.7X108.2cm / 손창근 소장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 180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에 귀양 가서 그린 그림이다. 비틀어진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 세 그루, 윤곽만 있는 단순한 집 한 채를 그려낸 쓸쓸하고 황량하며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그림을 왜 국보로 지정했으며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치는가? '세한(歲寒)'이란, '추운 겨울' 이란 의미다. 최고의 벼슬 자리에 있다가 하루 아침에 제주도로 귀양가서 세상과 유리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처절하게 뿜어내는 고독의 절정,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그림은 극한에 달한 인간의 외로운 내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을 통해 자기의 생각을 넘어선 극한의 외로움을 표현한 그림인 것이다. 그럼...'세한도'. 그 속에 숨은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추사의 이상과 혼이 담긴 '세한도'는 그림과 긴 발문(108cm)과 '세한도'를 보고 느낀 수 많은 감상문이 길게 이어진다. 세한도는 '초묵법'으로 그려졌다. '초묵법(焦墨法)'이란? '벽해타운'(碧海朶雲-김정희가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집)에서 김정희는 이 '초묵법'을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에게서 전수 받았다고 말했다. 보통 수묵화의 경우는 농담을 표현하는데 진한 먹과 연한 먹 두 가지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김정희는 하나의 먹으로 오로지 붓의 완급을 통해 농담을 표현했다. 즉, 느리게 그리면 진하게 되고, 빠르게 그리면 연하게 되는 원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필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순간순간의 힘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필력이 있아야만 가능한 것이 초묵법이다. 마른 붓과 진한 먹물만으로 거칠고 메마른 느낌을 담아낸 세한도는 김정희의 필력이 낳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김정희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 청나라 정조경(程祖慶)은 문복도(捫腹圖)에서 자기보다 한 살 어리고 만난 적도 없는 완당(阮堂-金正喜의 호)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이는 완당이 당시에 이미 조선만이 아닌 중국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의 학문적 깊이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당시 조선은 중국 황제의 생일이나 동지에 정기적인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그것을 '사행(使行)'이라고 한다. 사행의 기간은 대략 움직이는 기간 왕복 2달, 체류 기간 2달로 총 4개월간이다. 이 사행의 주 목적은 외교이나, 부수적으로 지식인들이 견문을 넓히고 중국이나 세상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김정희는 순조 때인 1809년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던 아버지 김로경이 동지사(冬至使)'로 중국 북경으로 갈 때,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사신들이 자기의 자제(아들이나 제자)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불렀다. 당시 김정희의 나이 24세였다. 김정희가 중국에 따라 간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석학들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 중에 '운대 완원'과 '소재 옹방강'은 그의 정신 세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정신적 스승이다.
첫째, '운대 완원(雲臺 阮元 1764~1849)' 중국 강남지방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절강성 양조우는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김정희는 뻬이징에서 양조우 출신의 석학 '운대 완원'을 만났다. 완원은 당시 나라의 주요 관직을 거친 정치가이자 대학자인데, 김정희는 중국에 가기 전에 벌써 그의 존재를 알고 갔다고 한다. 1810년 그들은 깊이 있는 만남을 가졌는데, 그 만남을 통해 김정희는 완원이 확실이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임을 확인했고, 완원도 김정희를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매우 영민하며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소재 옹방강(蘇齋 翁方綱 1733~1818) 추사가 중국에 갈 때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이 바로 '소재 옹방강'이었다. 1810년 갓 25살이 된 김정희는 당시 78세의 노학자 옹방강을 만났다. 옹방강과의 단 한 번의 만남을 통해 추사의 일생이 거의 결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만남을 준비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있었고, 그의 나머지 일생은 그 만남에서 얻은 것을 자기 스스로 체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 고령의 대학자 옹방강은 조선의 이름없는 젊은이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거듭 찾아가 간청한 끝에 겨우 만나주었는데, 둘은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때, 옹방강은 김정희의 비범함을 알아 보고,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 중국 동쪽에 있는 나라 중 김정희의 경술문장이 제일 뛰어나다고 극찬을 했다. 추사의 학문적 자세를 높이 사서 옹방강이 추사에게 써 준 편액 청나라에서 돌아 온 김정희는 옹방강의 가르침대로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함)의 자세로 조선의 비와 탁본을 고증하고 연구했다. 그 결과 1815년에 북한산에 이름도 없이 서 있던 비(碑)를 최초로 해독해 냈는데, 그 비석이 유명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이다. 조선의 금석학(金石學)은 김정희에 의해 시작하고 완성되었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옹방강과 편지로 교류하며 그에게 배움을 요청했고 옹방강은 조선의 영민한 젊은이에게 그의 학문을 고스란히 전수했다. 김정희는 옹방강이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이므로 그가 죽기 전에 그의 학문을 빨리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김정희는 벼슬도 뒤로 한 채, 옹방강, 옹방강의 제자, 혹은 중국에서 교류한 다른 학자들과 편지로 교류하며 학문과 예술을 습득하는데 온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추사 사후 1년 뒤, 제자 이한철이 그린 관복의 영정影幀초상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초상으로 얼굴에는 어려서 앓은 마마자국까지 그렸다. 추사 김정희의 집안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면서 최고의 명문가를 이루게되고, 그의 아버지 김로경에 이르러 절정기에 이른다. 김정희는 순조 19년 30 중반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그는 빼어난 집안 배경 속에서 승승장구한다. 순조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을 밀어내기 위해 '효명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자 김정희 가문에 더욱 힘이 실린다. 아버지 김로경은 효명 세자의 최측근이었는데, 효명 세자는 특히 김정희를 총애했다. 그러나...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김정희 집안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1834년 어린 헌종이 즉위한 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는 다시 시작된다. 1840년 병조판서 김정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는데, 마침 그때, 조정에선 윤상도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를 빌미 삼아 대옥사가 단행된다. 55세의 추사도 터무니 없는 무고를 받아 혹독한 심문 끝에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김정희로선 학문적 교류를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30년만의 중국 사행길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윤상도의 상소가 안동 김씨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음에도 김정희의 제주도 귀양은 강행되었다. 이유는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들로선 반 외척 세력의 결집을 사전 차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생각이 상당히 남달랐다. 스승이나 부모가 달아 놓은 주석을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는 폐쇄적인 교육 방식과 출세를 위해 과거 시험에만 연연해 하는 것은 훌륭한 인재의 탄생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그래서인지 김정희는 서얼 출신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고, 승려인 '초의'를 친구로 삼았으며,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 '오경석', 화원(畵員)인 '전기' '이한철'과 같은 중인(中人)들을 제자로 두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세한도가 그려진 데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소치가 완당의 유배시절 모습을 소동파의 입극도를 번안하여 그린 것이다.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으로 완당의 초상을 그려 유배지의 처연한 자태를 나타냈다. 남제주 대정읍, 복원된 추사 유배지- 가시 돋친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
제주도 추사 유배지 1840년 추사는 당시로서는 절해 고도인 제주도 대정(大靜)의 한 민가에 유배 당한다. 그리고 유배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圍籬安置-가시 울타리를 두룬 집 안에서만 생활해야 함)에 처해졌다. 그는 그 안에서 음식과 의복을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했고, 끝없는 풍토병에 시달렸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 그의 나이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집에 편지를 보내, '김치를 얻어 먹을 수가 없고, 또 젓국과 새우젓이 없으니, 집에서 절인 무우나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처절한 유배 생활 중에서도 유일한 희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릴 때부터의 친구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이었다. 그는 안동 김씨의 최측근으로 순조와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서로 대척점에 있었지만,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주 절친했다. 최근 발견된 김유근 문집인 '황산유고(黃山遺稿)'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절친했는 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시시비비나 세속의 부귀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고 역사나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눌 뿐이다. 우린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허전하다..." 그런 김유근이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김유근은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김정희가 권도인에게 보내는 편지엔 그의 절망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몸이 백 번, 천 번 꺾여도 한 오라기 목숨을 이어온 것은 친구 김유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으니 제 목숨은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어디에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유배 3년째(1842년 11월 13일) 그의 부인 예안 이씨가 운명을 달리 했다. 그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부인이 죽은 다음 날, 병석에 있는 부인을 걱정하는 안부 편지를 썼다. "먹고 주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동안 무슨 약을 드셨습니까? 아직도 자리 보존하고 계신지요? 너무도 염려되어 갈수록 가만히 있질 못하겠습니다. -1842. 11. 14일 편지 세한도는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그려졌다. 그렇다면 '세한도'는 왜 그렸을까? 세한도는 제목 옆에 받을 사람이 '우선(藕船)'임을 적어 놓았다. '우선'은 그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호이다. '세한도'라는 제목 옆에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을 쓰고 완당(阮堂-김정희가 노년에 즐겨 쓴 호)이라는 관서 아래에 '正喜'와 '阮堂' 도인을 찍었다. 恩誦堂集에 실린 李尙迪(1804~1865) 초상화 이상적은 역관 시험 합격 후, 중국을 12 차례나 다녀온 당대 최고의 역관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통역만 하는 역관이 아니었다. 그는 헌종 임금이 애송할 정도의 뛰어난 시를 지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중국에선 김정희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증거로 북경의 고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 거리'에 이상적의 당시 위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그의 중국 8차 연행이었던 1487년, 중국 문인들은 이상적의 글을 모아 12권의 책으로 된 '은송당집(恩誦堂集)'이란 문집을 만들었다. 이런 이상적은 유배지에 발이 묶인 채 선진문물에 목말라 하는 김정희에게 청나라의 최신 학문 동향을 전해 주는 유일한 소식통이었다. 당시 역관들은 심부름 하면서 전달해야 할 물건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정희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김정희를 위해 중국에서 잊지 않고 책이나 여러 학문적 자료들을 가져다 전해 주었고, 심지어 황청경해(皇淸經解)라는 1400권, 360책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분량(한 수레에 해당한다고 한다)의 유교 경학의 완결편까지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미 세력을 잃고 세인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스승 김정희에게 상당한 신분적 위협을 감수해 가며 새로운 학문을 전해 주는 이상적에게 김정희는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김정희는 이렇게 영악하지 않고 변함없는 이상적에게 사마천의 말을 빌려 고마움을 표현했다. "사마천이 말하길,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시대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인데, 세상의 권세와 이익에서 초연하게 벗어났으니... 사마천의 말이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그는 위와 같은 공자의 말로 이상적의 우정에 대한 칭송을 했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고 했는데, 그대가 나를 대함이 귀양 오기 전이나 후에나 변함이 없으니,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만 하지 않는가?"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 찍힌 '長毋相忘' 도장 '세한도'는 '선비는 유불리(有不利)를 따지지 않는다.'는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의 의리에 대한 김정희의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잊지 말자... 스승과 제자의 정이 담긴 글이다. 그렇다면, 그 고마움의 표현이 이 그림을 그린 유일한 이유였을까? * 명작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이 세한도가 한중일 삼국을 넘나들며 명작으로 만들어졌는가? '해객금존 제2도'란 18명의 중국 문인들의 글이 그림과 함께 있는 책인데, 그 책 속에 김정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들은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았다고 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지고 북경에 가서 중국 문인들에게 감상할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유배 5년째인 1844년에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렸는데, 당시 그는 해금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던 막막한 시기였다. 그리고 청나라와 우리 나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고립된 채 점점 잊혀져가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희망을 잃은 그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절박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만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이 '세한도'에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이상적이 곧 중국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중국의 유력한 지식인들과 통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자기가 그려 준 '세한도'가 반드시 그의 손을 거쳐 중국 문인들에게까지 보여질 거라는 계산을 했다.
세한도의 그림 부분 쓸쓸하게 그려진 '세한도'... 그건, 김정희...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세한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김정희의 계산을 엿볼 수 있다. 이 세한도는 크게 세 부분 종이를 이어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발문과 그림의 종이 질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그림 부분은 한지를 뜰 때 남은 자국까지 있는 거친 종이이고, 발문은 매끄러운 최고급지에 칸까지 그어 단정하게 씌어 있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도 동생들에게 부탁해서 항상 최고급지를 썼다. 그런데, 왜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주는 그림에는 유독 거친 종이를 썼을까? 일부러 조작난 종이를 이어 붙여 그렸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림을 그린 재료 자체가 곤궁함을 표현하여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린 사람의 어려운 상황이 더욱 강하게 전달 된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1844년 여름에 그려진 '세한도'는 그 해 겨울, 이상적이 중국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상태를 중국의 유력한 문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역할을 그가 수행하리라는 점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자신을 표현한 그림이 바로 쓸쓸한 '세한도'란 그림이다. 즉,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세한도를 그렸으나, 그 이면에는 젊은 시절부터 교유했던 청나라 친구들에게 자신이 현재 처한 불우한 정치적 상황을 전달하는 메시지도 담겨 있는 그림이다. 이런 스승의 의도를 잘 아는 이상적은 그 해 겨울(1844년) 동지사절 때, 이 그림을 북경에 가져간다. 그리고 모든 공식 업무가 끝난 1845년 정월, 청나라 문인들이 이상적을 위해 잔치를 열여주는 자리인 자금성 근처 병부시랑 오찬의 집으로 이 그림을 가져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청나라 문인 17명 앞에서 이 그림을 꺼내 보이며 함께 감상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이 감상하는 모습을 그림으로도 그리게 된다. 그리고 이 17명의 쟁쟁한 중국 문인들이 그림을 보고 감상문을 썼다. 결국 김정희의 의도대로 중국의 유력 인사들이 김정희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정희는 이상적이 중국에서 가져온 중국문인들의 칭찬하는 감상기를 보게된다. 김정희는 이 글을 보고 상당히 기뻐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잊혀진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유배 생활을 더욱 힘들게 했는데, 중국의 꽤 괜찮은 학자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칭찬하고 위로하며 동정하는 글을 쓴 걸 보곤, '아, 아직 난, 죽은 게 아니구나..!! 살아야겠구나..!! 아니, 살아야 할 이유가 있구나..!!' 이렇게 삶의 의지를 불붙일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 점이 막막한 남은 유배 생활에 굉장히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소치 허련이 그린<완당선생의 초상> ; 호암미술관 소치가 그린 몇 폭의 완당선생 초상 중 하나로 후손인 김승렬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초상화 측면에는 윤희구(尹喜求)의 배관기(拜觀記)가 쓰여 있다 유배 생활에 지치고 무력감에 사로잡혔던 추사 김정희는 이 세한도를 통해 자신을 알아주는 의미 있는 사람들의 응원의 메시지를 접하고자 하였고, 이 메시지는 어둠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그의 삶에 새로운 희망과 재기의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스승과 제자의 변함 없는우정과 의리, 한 선비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갈망이 담긴 쓸쓸한 그림 '세한도'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제주에서 북경까지 건너가게 된 '세한도'는 이후, 파란만장한 흐름을 따라 다시 우리의 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2006년 2월. 일본 됴쿄 '후지즈카 아키나오'씨의 집에선 아주 특별한 기증식이 있었다. 100여 년 가까이 집안에 보관 중이던 추사 관련 2000여점의 자료를 추사가 만년에 살았던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여기에는 추사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김정희와 후지즈카 집안의 인연은 대를 이은 것이다. 아키나오씨의 아버지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 1948년) 교수는 김정희 전문 연구가였다. 북경에서 돌아온 세한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30년대 '지카시'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그림이 김정희 연구가에게 넘어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지카시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해 버리고 만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이 너무도 애석하게 생각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몇 달간 설득한 끝에 지키시로부터 이 그림을 돌려받게 된다. 吳世昌과 尹喜求의 拜觀記가 좌우에 적혀있다. 추사 김정희에 의해 탄생된 '세한도'는 이렇게 기나긴 여정을 거쳐 국보로 만들어졌다. 세한도의 맨 끝에는 독립 운동가인 이시형, 오세창, 정인보의 발문이 있다. 정인보의 감격어린 발문에서 이 세한도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다. " 손재형이 이무기가 삼킨 것을 빼앗으니, 옛물건 이로부터 온전해졌네. 뉘 알았으리. 그림 돌아온 것이 강산이 회복될 조짐인 것을."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예술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영혼일 수도 있다. 이 세한도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절박한 문제를 그림의 주제로 택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제시한 그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림에 대한 앎과 인식만큼 새로운 정신적 효용가치로 다가온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세상살이도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스산하다. 쥐꼬리만한 이익 앞에서 옳고 그름이 뒤집어지고 눈 앞의 권세가 진리의 척도가 되어버린 부박한 세태 속에서 고졸한 그림 한 장... '세한도'의 울림이 아프게 다가 온다. 출처 = KBS 역사스페셜 세한도 발문 (歲寒圖 跋文)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참고> |
추사의 낙관 모음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