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윤여희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아우 슈비츠 소장인 루돌프 회스 중령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짧은 시간에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개조하는 능력을 인정받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가족과 피크닉을 가고,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버지이다. 그의 아내 헤트비히는 유대인에게서 빼돌린 밍크 코트를 입고 거울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담장 너머에서는 비명, 신음소리, 총성, 굴뚝 위의 검은 연기가 비극을 상상하게 한다. 딸 집에 방문한 헤트비히의 엄마는 잘 가꿔진 정원을 칭찬하지만 이른 새벽 쪽지를 남기고 그 집을 떠난다. 그러나 헤트비히는 개의치 않는다.
회스 중령의 전근이 확정되지만 헤트비히는 자신이 꿈꿔왔던 삶이라며 낙원인 이 집을 떠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회스 중령이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주는 흑백 화면 중에 빛나는 소녀가 인상 깊었다.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유대인 작업구역에 사과를 놓아두는 폴란드 소녀는 실존 인물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념관이 된 수용소를 보여준다. 오래전 유럽 패키지여행에서 아우슈비츠를 들린 적이 있다. 교실 만한 공간마다 여행용 가죽 가방. 잘린 머리카락. 의족 등이 쌓여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후 속이 메스꺼워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잔혹한 수용소 내부는 보여주지 않지만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의 아우성이 들리는듯하다. 아우슈비츠 담장 너머의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사회복지와 심리 상담을 공부한 나는 ‘죽음의 수용소’를 감명 깊게 읽었다. 빈 대학의 교수인 빅터 프랭클 박사의 아우슈비츠의 체험기이다.
수용소에 도착하여 집필중인 원고를 빼앗기고 머리도 깍인 후 두 줄로 서게 된다. 다음날 다른 줄의 사람은 가스실로 갔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수용소 안에서의 삶은 한 사람이 죽으면 먹다 남긴 감자 또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가고 묽은 스프에 콩 한 알이라도 더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목숨 부지에 집중할 뿐 철저하게 타인에게 무관심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수용소 안에서도 일부는 자기의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한다. 유리 조각으로라도 면도를 하여 일할 능력이 있어보여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수용소에 먼저 들어온 동료가 알려준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며 종교에 의지하거나 농담을 하며 견뎌낸다.
빅터프랭클은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는 자신의 모습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임을 깨닫는다.
또한 쾌적한 강의실에서 청중들이 자신의 강의에 경청하고 있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과 고통을 이겨낸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삶의 의미 즉 일과 사랑임을 알게 된다.
빅터 프렝클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 할 수 있는 자유까지 빼앗아 갈 수는 없음을 깨닫고 로고테라피 이론을 창안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로 될 수도 있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빅터프랭클은 수용소를 전전 하면서도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색하지않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한나 이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려본다. 상부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는 회스 중령. 주변의 고통은 철저히 외면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집착하는 그의 아내 헤트비히. 그리고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조용히 떠나는 헤트비히의 엄마. 아우슈비츠 노동자를 위해 몰래 사과를 놓아주는 폴란드 소녀. 영화관을 나오며 진지하게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살게 하는 의미, 희망은 무엇일까? 피할 수 없는 시련은 받아들여도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을 작은 선택의 소중함을 생각해본다.